1992.3.17 미국 시민 최고 영예의 상 '자유의 메달'을 받다


매출액 규모 3900억 달러,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직원 숫자 210만여 명, 매출액 기준으로 늘 세계 1위를 다투는 기업. 명실상부한 세계적 소매 유통기업 월마트를 일컫는 말이다. 월마트의 성공 이야기는 그 창업주 샘 월튼의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성공 스토리와 만나보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아칸소 주 벤톤빌의 월마트 중앙 사무소 강당에 아침부터 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잠시 뒤 보도진이 도착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 부부가 등장했다. 그들의 눈은 연단 위의 한 사람 쪽을 향했다. 74세 생일을 앞둔 휠체어에 탄 노인, 1990년 초 골수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선고를 받고서도 비행기를 타고 월마트 지점을 돌며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긴 사람, 바로 월마트 창업주 샘 월튼이었다. 월튼을 향해 월마트 직원들이 외쳤다. “나에게 W를! 나에게 A를! 나에게 L을! 나에게 ‘갈겨 쓴 글씨’를!(이 대목에서 막춤 비슷한 춤을 춘다.) 나에게 M을! 나에게 A를! 나에게 R을! 나에게 T를! 그게 뭐죠? 월마트! (WAL-MART) 그게 뭐죠? 월마트! 누가 최고죠? 고객이요!” 전 세계 월마트 매장에서 직원들이 외치는, 이른바 월마트 구호다. 그날의 구호는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대통령 부부와 보도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1992년 3월 17일 월튼은 백악관이 수여하는 미국 시민 최고 영예의 상인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약 3주 전이었다. 백악관에서 수여식이 열려야 하지만, 암 투병 중인 월튼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통령 부부가 직접 벤톤빌로 왔던 것이다. ‘겸손이 근본인 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또한 성공을 결코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소매상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메달에 새겨진 문구다. 그리고 그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형적인 미국인 샘 월튼은 기업가 정신을 실천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종업원들에 대한 극진한 배려와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 차별화하고자 하는 남다른 욕구는 그의 경력에서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것들이었다. … 충실한 가장이자 업계의 지도자이며,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인물로서 샘 월튼은 신념과 희망, 고된 노동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사업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성공한 이 기업계의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오클라호마 주 킹피셔 근교에서 태어난 월튼은 예닐곱 살 때부터 잡지 판촉일을 했고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신문 배달을 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풍족하지도 않은 가정형편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성적도 우수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우유를 직접 짜서 배달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미주리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생 클럽 회장, 4학년 남학생 명예학회 회장, ROTC 엘리트 단체 대표, 성서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식당 웨이터로 일하고 수영장 구조 책임자로도 일했으며, 신문 배달을 사업 비슷하게 운영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 배달 구역을 늘려나가면서 한 해 5천 달러 수입을 올릴 정도였다.

 

 

 

 

사업 성공 원칙의 하나로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를 꼽은 샘 월튼

 

유명한 경영대학원 와튼스쿨 진학을 계획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1940년 6월 대학 졸업 후 아이오와 주 데모인의 작은 상점에서 18개월 동안 일하면서 뛰어난 판매 능력을 발휘했다. 1942년 입대해서 항공기 공장이나 포로수용소에서 관리직으로 일했고 1943년에는 헬렌 롭슨과 결혼했다. 월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이들도 그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 나는 10살이 되기 전에 깨달았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고객을 위해 1달러를 절약할 때마다 우리는 경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게 된다.”

 

월튼의 딸 앨리스의 회고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식으로든 회사 일을 거들었다. 나는 사탕 계산대 뒤에서 일하기도 하고, 다섯 살 때는 팝콘 바를 맡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사업 이야기가 빠지는 법은 없었다. 언젠가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말이지,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 상점을 열려고 하셔.”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

 

 

1945년 전역 후 월튼은 자신의 돈 5천 달러와 장인에게 빌린 돈 2만 달러로 아칸소 주의 인구 7천 명 소도시 뉴포트에 있는 벤프랭클린 잡화점을 매입해 1945년 9월 1일 개업했다. 폭 15미터, 길이 30미터의 전형적인 구식 잡화점이었다. 길 건너에는 벤프랭클린 잡화점보다 두 배인 15만 달러의 연 매출액을 올리는 스털링스토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벤프랭클린 잡화점은 프랜차이즈 상점이었지만, 월튼은 독자적인 영업 전략을 폈다. 그것은 부지런히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어떤 물건을 80센트에 샀다고 하자. 나는 그것에 1달러를 매김으로써 1달러20센트의 가격을 매기는 것보다 세 배 이상 많이 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 하나 당 이윤이 반으로 줄어들지 몰라도 세 배 이상 많은 물건을 팔게 됨으로써 총 이익은 훨씬 더 늘어났다. 얼마나 간단한가. 가격을 낮춤으로써 판매량을 늘린다는 간단한 원리다.”


2년 만에 장인에게 빌린 돈을 다 갚고 이글스토어라는 상점을 하나 더 냈으며, 개업 5년이 될 무렵에는 연 매출액 25만 달러를 올리면서 아칸소 주 최고 매출 및 이익의 소매상점이 됐다. 그러나 월튼은 이런 성공을 뒤로 하고 뉴포트를 떠나야 했다. 점포 임대차 계약 5년 후 계약을 갱신할 옵션을 월튼 자신이 갖는다는 조항을 계약 당시 빠뜨렸던 것. 점포 땅 주인은 계약을 갱신해주지 않았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음은 아칸소 주의 낡고 초라한 인구 3천 명의 시골 도시 벤톤빌이었다.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해 월튼스 염가상품 판매점을 개점하고(오늘날 월마트 방문자 센터), 1950년 7월 29일 첫 신문광고를 냈다. 월튼은 곧 벤톤빌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점원의 증언이다. “월튼 씨는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사람도 크게 소리쳐 부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붙임성 있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했다. 여행에서 돌아 온 그가 가죽끈 샌들을 보여주며 최고 히트 상품이 될 거라 말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그러자 그가 통로 끝 매대 위에 몽땅 쏟아놓고 한 켤레 19센트 가격을 붙였다. 시내 모든 사람들이 그 샌들을 갖게 되었다.”

 

한 상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얼마든 다시 새로운 상점에 투자하는 것이 월튼의 방식이었다. “월마트가 한 중년 남성의 위대한 아이디어로 하룻밤 사이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공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월튼은 유능한 상점 책임자들을 스카우트하면서 속속 잡화점을 개점해 나갔다. 훌라후프가 대유행하던 시기에 월튼은 다른 업자와 절반씩 투자하여, 훌라후프와 똑 같은 크기의 호스를 만들 수 있는 제조업자에게 호스를 공급받아, 다락방에서 직접 훌라후프를 제작했다. 아칸소 북서부 지역 아이들 대부분이 월튼의 손을 거친 훌라후프를 하나씩 갖게 되었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1950년대 말 월튼은 미국 최대의 잡화점 경영자가 되었다.

 

 

 

 

 

 

 

소형녹음기 갖고 다니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다

 

 

1962년 7월 2일 아칸소 주의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했지만 2년 간 경쟁업체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후 스프링데일과 해리슨에 2호점과 3호점을 내면서 약진하기 시작했다. 할인판매를 통해 중소도시의 상권을 장악해나가는 전략이 주효했던 것. “우리는 모든 품목을 할인 판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언제나 싸게 팔아야 합니다. 월마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낮은 가격과 고객만족을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다른 어디에서도 더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환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

 

 

 

 

 

 

 

남들이 위험하다고 충고했지만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나가는 전략으로
월마트를 늘려 나갔다.(1911)


1969년에 월튼은 14개의 잡화점과 18개의 월마트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1일 월마트를 상장시켰다. 처음 상장했을 때 주당 거래가격은 16달러50센트였다. 당시 1,650달러에 100주를 산 주주라면, 여러 차례의 주식배당을 통해 20년 뒤인 1990년대 초에 3백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7년부터 87년까지 월마트의 연평균 순투자 수익률은 46%에 달했다.

 

월마트의 출점 전략은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 나가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월마트에 우호적일 것이라 예상한 지역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한 다음 그 구역 일대에 여러 점포를 세워 완전히 장악해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고 지역이 좁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만으로 고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월튼은 상점 부지 물색을 위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월튼은 소형녹음기를 갖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했고, 즉시 실행으로 옮겼다.

 

1970년대 중반 월마트 점포는 100개를 넘어섰고 매출액 1억7천만 달러에 이익도 600만 달러를 넘어섰다. 1974년 56세 때 월튼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한동안 여유롭게 생활했다. 그러나 월튼이 물러나 있는 동안 회사 내에 분열이 일어났다. 젊은 사원들과 나이 든 사원들이 반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1976년 6월 월튼은 회장으로 복귀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당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월튼은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을 정리하여 제시했다.

 

첫째, 당신의 사업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사업에 전념하라.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일을 사랑하라.

둘째,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

동료들에게 회사 지분을 갖도록 장려하고 할인된 주식을 제공하고 퇴직 때도 주식을 교부하라.

셋째, 동반자들을 자극하여 도전하게 만들어라.

좋은 실적에 충분한 보상을 하고 늘 재충전시키고 책임자들끼리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여 동기를 부여하라.

넷째,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동반자들에게 알려라. 정보는 힘이다.

동료들에게 힘을 부여해서 얻는 이익은, 정보가 누설되는 위험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다섯째, 동료들이 나의 사업을 위해 하는 일에 늘 감사하라. 진지하게 절제된 언어로 칭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늘 듣고 싶어한다.

여섯째, 성공을 자축하고 긴장을 풀고 즐기면서 열정을 보여주어라.

일곱째, 모든 사원들의 말에 귀 기울여라.

고객들과 얘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내야 한다.

여덟째, 고객의 기대를 넘어서라. 고객이 원하는 것 이상을 주도록 하라.

당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과하고 보상하라. 월마트 1호점 간판에 쓰여 있던 ‘만족 보증’이 최선의 전략이다.

아홉째, 비용을 경쟁자보다 낮게 통제하라. 월마트는 유통업계에서 매출 대비 비용이 가장 낮은 회사였다.

열째,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을 택하고 있다면 그 반대로 가는 게 당신만의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인구 5만 명 이하 소도시에서는 할인점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근로자 착취값싼 중국산 유통으로 미국 경제 약화에 일조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월마트는 2003년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초우량 기업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월튼 개인은 직원들을 가족이나 동료처럼 대했다고 하지만 복지 혜택이나 임금 수준이 동종 업계에서 뒤떨어지는 편인데다가, 가격경쟁력 유지를 위해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면서(이 원칙은 중국에서 깨졌다.) 사실상 저임금 근로자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값싼 중국산만 수입해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의 경쟁력 약화에 일조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최대 규모의 매출과 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매출 증가율이 떨어지고 순이익도 기대에 못 미치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미국 서민층의 실질 구매력이 한계에 도달해 월마트의 저가 전략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진단을 하기도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월튼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특유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우리가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또 한 가지가 바로 지나친 자만이다. 월마트에서 일하기 위해 자부심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자부심을 작게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침내 곤경에 처하고 말지도 모른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샘 월튼, 불황 없는 소비를 창조하라>

(샘 월튼, 존 휴이 공저, 김미옥 옮김, 21세기북스)
1990년부터 샘 월튼이 존 휴이와 함께 작업해 내놓은 회고록이다. 월튼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처세실용서, 경제경영서의 구실을 하기에도 충분하다.

 

<월마트, 슈퍼마켓 하나로 세계유통을 지배하기까지>

(로버트 슬레이터 지음, 남문희 옮김, 해냄)


 

 

샘 월튼, 불황 없는 소비를 창조하라월마트, 슈퍼마켓 하나로 세계유통을 지배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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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물세계사]샘 월튼(1918~1992)|작성자 최종욱

 

1.기회를 포착하는 직관

2.고객이 기대하는 것 그 이상을 제공하다

3.자신을 최대로 낮추다

4.부를 자랑하지 않는 세계제일의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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