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심이 만난 e-사람]

1,500만부 베스트셀러 먼나라 이웃나라의 국민작가가 먼총장에서 이웃총장으로 돌아오다!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다는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을 만나다

 

대한민국에 이보다 더 바쁜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1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만화그리는 일을 53년째 지속하고 있는 그는 덕성여대 1호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덕성여대 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1090 평화와통일운동 이사로 통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주요 저서에는 베스트셀러인 ‘먼 나라 이웃나라’, ‘세계의 만화 만화의 세계’, ‘국제화 시대의 세계 경제’, ‘신의나라 인간나라’, ‘가로세로 세계사’,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등이 있다. 취임 후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원복 총장에게 작가로서의 삶과 총장으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 사진: 백승휴 작가


 

요즘 근황은?

3 1일에 취임해서 오늘이 50일째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총장의 업무라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학교의 모든 것들, 덕성이 들어간 것은 모두 다 챙겨야 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네요.

 



재능Talent을 찾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신문반을 했는데 신문반의 친구 아버지가 한국일보를 창간했어요. 그 친구 아버지 신문사를 구경가서 친구가 나를 신문반에서 만화그리는 애라고 소개하니까 '어 너 잘됐다. 이거 베껴서 그려와 봐."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필사도 아닌 미군에서 나온 만화를 종이에 대고 베끼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가 1962년 고1 때였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이상을 계속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만화는 저급한 문화로 취급받았었는데 75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올 컬러로 된 고급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스테릭스>라는 프랑스 만화인데 르네 고시니가 쓰고 알베르 우데르조가 그린 만화로 로마군과 싸우는 켈트족 전사들의 이야기였지요. 그 작품을 보고 만화도 고급문화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한국에 돌아가면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고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이미지출처http://www.vaio.or.kr/935693


 

제가 66학번인데 그 때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때문에 공대 붐이 한창이었습니다. 경기고 3학년 480명 중에서 360명이 서울대 공대를 갔을 정도였죠. 건축공학이 재미있을 것 같아 건축공학과를 선택했는데 첫날부터 미분·적분을 접했어요. 이건 아니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학교에 거의 안 가고 만화만 그렸습니다. 독일에 유학 가서는 만화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만화와 연관성이 있는 시각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왜 그렇게 ‘외도’를 많이 했느냐고 묻는데 전 한 번도 외도한 적이 없습니다. 건축공학, 시각디자인, 만화 모두 종이에 없던 걸 그려내는 것이니까요.

 

고수의 훈련법Training?

간단하다. 원고료 받는 재미로 계속 그리면서 연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훈련된 것이지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엔 한 분야만 깊이 알면 됐지만 요즘엔 T자형, 이제는 T자보다 더 유익한 ㅠ자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일을 즐기면서 오래할 수 있었습니다.


ㅠ자형 인재를 설명하는 이원복 총장



그리고 다작을 안하는 것도 저만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최고의 질을 고수해야 하니까요.

만화그리는 것은 집 짓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화는 예술이 아니라 과학에 가깝습니다. 만화는 자료수집, 정리, 분리가 오래 걸리지 그림은 손에 익어서 빨리 그리면 반년이면 그릴 수 있습니다. 자료수집은 평소에 꾸준히 하고 있어요. 우선 이해를 하고 글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스토리라인을 짭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1975년만 해도 우리나라는 외국으로 나가기도 힘들고 외국인이 (국내에) 거의 없는 섬 아닌 섬 같은 나라였습니다. 9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에 처음 가서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로마시대부터 외국과 교류하며 글로벌화된 독일에서 지내면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테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지요.

학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해서 어린이신문에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6년 동안 매주 항공우편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한 번도 ‘펑크’ 낸 적이 없습니다. 술 마실 것 다 마시면서요. 이제까지 신문 연재만 40년 넘게 했는데 마감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습니다. 프로가 뭡니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게 프로입니다. 학생들한테도 좋은 작품을 내는 게 훌륭한 게 아니고 마감을 잘 지키는 게 훌륭한 거라고 가르쳤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 15: 에스파냐

저자
이원복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13-03-21 출간
카테고리
아동
책소개
"34년간의 대장정을 이어온 [먼나라 이웃나라]가 마지막 여행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요즘 전공한 것과는 다른 직업을 가지는 학생들이 많은데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당장은 탑Top이 되지는 못하지만 오래 할 수는 있습니다. 오래 견뎌야 그 일을 정복할 수 있게 되고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젠 30년 경제활동을 하던 시대에서 60년 이상을 경제활동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인생을 두 배로 살 수 있습니다. 단거리에서 마라톤을 해야 하는 시대에 좋아하는 일을 해야 완주할 수 있습니다. 과거엔 전공 하나만으로도 잘 살 수 있었지요. 이젠 자기 전공만 아는 ‘전문 바보’는 소용없습니다. 100세 시대’에선 일생 동안 적어도 서너 개의 직업을 갖게 될 겁니다. 미래엔 한 가지 전공으론 버티기 어려울 거에요.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 오프라인 소통Talk은 잘 하고 있는지?

다른 만화가들과 따로 만날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학교에 있고, 그분들은 화실에 있으니까요. 그저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소통도 제가 아날로그 세대라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청춘들과 만날 수 있으니 아주 막혀있지는 않은 거 맞겠지요.




 

어떻게 시간Time을 견뎠는지?

천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매사 긍정적이에요. 자기에게 철저하기보다는 철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하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31년간 덕성여대에서 학교밥을 먹고 변함 없이 모든 평생을 여기서 같이 했는데 학교가 어려워진 이 때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내 몫을 해야겠다 생각해서 총장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누렸던 학교의 평판들을 되찾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교육의 질을 높이고, 연구환경을 개선하고, 학교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방송, 라디오에 출현하는 것은 덕성여대 타이틀이 공짜로 나가기 때문이지요. 하하하!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 사진: 백승휴 작가


요즘 청년실업문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압니다. 옛날엔 무슨 일을 하던 블루오션이었는데 지금은

디지털화되고,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청년실업률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3, 5, 삶포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시작하기 전부터 진 것입이다. 옛날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하면 죽으니까요. 지금은 포기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때Timing는 언제?

만화를 그릴 수 있고, 그 만화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 바로 제 인생의 최고의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생동안 한 것이 만화를 그리고 가르친 것 뿐입니다. 기복없이 잔잔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분들과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부모와 형제의 힘없이 혼자 컸기 때문에 평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빚을 진 것이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홀로 지켜야 했으니까요.

총장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자유롭게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자유로워선 안되겠지요. 총장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통일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통일문제입니다. 만약 당장 통일이 된다면 우리나라는 망할 거에요. 독일통일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이 그렇게 잘 사는 나라도 아니고 북한은 가장 못사는 나라인데 북한 먹여살리다가 남한과 같이 무너질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통일이 올 텐데 늦을수록, 준비를 안 할수록 젊은이들 몫이 됩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통일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1090평화와통일운동이 해야 할 가장 큰 핵심은 민간교류차원에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진출처http://www.mediapen.com/news/articleView.html?idxno=69055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관심갖기입니다.  우리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먼저에요. 그런 측면에서 현재 1090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알기가 통일이다라는 슬로건은 아주 적절한 거 같습니다.

대학에서도 강연을 할 때면 늘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통일은 내일 올 수도 있고, 아주 먼 훗날 될 수도 있다. 대비 없이 갑자기 통일이 되면 남북이 모두 쓰러질 수 있다 . 그래서 우리 대학도 통일을 대비한 차별화된 교육을 도입하고 싶다.

여러가지 통일 프로그램을 만들어 강의 외에도 진행하려고 합니다. 통일준비를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덕성여대의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넓은 분야를 조금씩 아는 ‘한일자()형 인재’가 대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자기만의 전공이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갖춘 ‘T자형 인재’가 인기죠. 미래 사회는 두 개의 전공에 대해 융합적인 시각을 갖춘 ‘ㅠ자형 인재’ 시대가 될 것입니다. 융·복합 전공제를 통해 학생 스스로 적성과 목표에 맞게 수강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뷔페형 커리큘럼’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현재와 같이 학생들에게 수강 과목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도시락형 커리큘럼’으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는 데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덕성여대를 ‘21세기형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양성하는 학교로 키울 것입니다.

총장이 된 이후에 개인적인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덕성이 예전의 명성을 찾고 나면 전 다시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 사진: 백승휴 작가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인터뷰 내내 지켜볼 수 있었다. 유학 시절 폐차 직전의 중고차로 유럽을 돌아다녔던 이 총장은 여행과 독서가 나의 가장 큰 밑천이라고 말한다. 먼총장에서 이웃총장으로 돌아온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이 머지않아 덕성여대의 과거 명성을 되찾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만화 그리는 일을 계속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그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

 

 

덕성여대 이원복 총장 인터뷰는 1090 평화와통일운동 청년분과위에서 모바일매거진 1090CCTV 커버스토리에 담기 위해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사진은 백승휴 작가가 수고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가 가르친 대로 살지말라,트랜드가 아닌 나로서는 살아라

 "누가 가르친 대로 살지 마라, 트렌드가 아닌 나로서 살아라"

  • 정리=이위재 기자
  • 100세시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김정운 “100년을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2014.01.04 18:11

    ·유인경이 만난 사람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투자 않나. 이제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한때 다방면에 걸쳐 맹활약을 하던 대중적 스타였다. 명지대 교수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라는 타이틀을 필두로 베스트셀러 저자로, 방송 진행자로, 최고 강연료로 모셔야 하는 명강사로 명성을 떨쳤고, 급기야 CF 모델까지 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는 이 모든 직함을 서울에 두고 2년 전 홀연 일본 교토의 미술대 학생으로 변신했다.

    그 이후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국내 최초로 ‘휴테크’란 개념을 제안하며 ‘잘 놀아야 성공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책을 통해 중년남성들의 심리를 꿰뚫은 그는 정말 잘 놀고 있을까. 50세에 그 아까운 교수직을 내려놓고, 그 많은 강연료를 뒤로 하고 떠난 그에게 ‘안녕하게 사는 법’을 듣고 싶어 모처럼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요즘 안녕한가.

    “매우 안녕하다.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 우선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혼자 우아하고 고상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장을 봐서 미리 그릇에 담아둔 샐러드, 빵과 직접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해서 내린 커피를 클래식을 들으며 먹고 마신다. 8시에 일어학원에 가서 일어공부하고, 학교로 돌아와 학생식당에서 300엔(3000원 정도)짜리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그림수업을 받으며 6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현재 교토 사가현 예술전문 단기대학생이다. 일본화 전공이다. 만화를 전공하려 했으나 영어가 가능한 교수가 일본화 교수밖에 없어 일본화를 배우고 있다. 뜻밖에 내가 너무 일본화를 잘 그려 교수도 감탄한다. 저녁에는 돌아와 책 번역하고 다른 책도 읽는다. 내가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 싶으면 칭찬해주려고 목욕탕에 가서 온천도 하고, 맥주도 마신다. 밤에 쓸쓸하면 가족과 통화하고 카톡에 올려진 사람들의 사진을 본다. 2012년 1월 3일에 큰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나는 5일 교토에 왔다. 그 사이 아들은 제대했고 난 계속 학생이다.”

    50세에 가장이 직장, 그것도 65세 정년이 보장된 교수를 그만두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존경하는 이어령 선생이 인생에서 정점을 찍지 말라고 했다. 정점에선 내려올 일만 있기 때문이다. 50세 무렵에 난 정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안정된 교수직, 하루에 수십 군데에서 오는 강의 요청, 수십만권이 팔린 책들, 아이돌처럼 밴을 타고 다니고 기사와 비서도 있었다. 바쁘다면 헬기를 보낼 테니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많았고, 방송 제의나 정치권의 유혹도 많았다. 그러다 이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점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후회는 없나.

    “내가 가장 잘한 결정이 교수직 그만둔 것과 그림을 시작한 것이다. 상황에 밀려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교수 체질이 아닌데 억지로 하던 교수직을 그만두니 행복하다. 학생들에게 강의는 해도 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은 부족했다. 그림 역시 내가 어떤 대상에 이렇게 몰두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재미있다. 말과 글 등 자기표현의 수단이 많은데, 말과 글은 나중에 후회하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때가 많다. 그림은 가장 후회 없는 자기성찰의 수단이다. 논리적 성찰은 아니지만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만년에는 전공에 관계없이 다들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만년도 아닌 나이에 그림을 그려 뭐할 건가.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이걸 어떻게 어디에 써먹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시작해서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거나 공부를 할 때 늘 그 결과, 활용도를 궁리했는데 그림에 대해서는 결과물에 대한 강박이 없다. 원래는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의 성을 다루는 ‘에로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만화 대신에 일본화를 배우는 중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말 잘 그린다. 앞으로 글로만 표현되지 않는 또 하나의 영역을 그림과 같이 담아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기는 하다.”

    50세에 훌쩍 떠나 많은 중년남성들이 부러워한다. 물론 김정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도 하지만….

    “‘당신이니까 가능하다’는 말은 불쾌하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호모헌드레드, 100세인의 삶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다. 45~60세를 신중년으로 칭할 만큼 생애주기도 달라졌다. 학교로 치면 학제가 개편된 셈이다. 그렇다면 각각 삶의 과정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일부일처제도 고민할 문제다. 25세에 결혼한 한 배우자와 75년을 계속 사는 게 행복일까. 내 아들에게도 가능한 한 늦게 결혼하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100년 동안 사용할 에너지를 50년 만에 다 쓰는 셈이다. 지난 총선 때 정치권의 유혹이 많았다. 정치를 하면 굉장히 폼나게 잘할 자신도 있고, 그런 제안을 받으니 갑자기 역사와 민족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그런데 가족과 상의하니 아들이 ‘아빠가 정치하면 정말 잘할 것 같지만 분명히 일찍 죽을 거예요’라고 했다. 정치하며 받을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정치만 하기엔 내가 너무 다른 능력이 많다. 국가적 낭비다.”

    정치를 안 해도 우리 국민들, 특히 남성들은 모이면 다들 정치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은 진정한 나라 걱정이나 덕담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건 일단 한국 사회의 기본 정서가 집단불안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발전방향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한국 사회에서 불안은 아주 다양한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사안이 ‘보수 꼴통’과 ‘좌빨’로 아주 간단히 나뉘는,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도 집단불안에서 출발한다. 불안할수록 적을 분명히 하면 내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확실한 한 명의 적을 만들어놓고 그를 욕하면서 자기위안을 삼는다. 집단불안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국제통화기금 사태부터다. 그 전까지는 불안할 여지조차 없었다. 우선 가난을 극복해야 했고,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민주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우선이었다. 좀 생활의 여유도 생기고 민주화의 바람이 부니까 불안해지고, 그걸 정치혐오로 표현하는 것이다.”

    집단불안의 해결이나 치유책은 없나.

    “정치공학적이나 사회구조적 문제는 논외로 하고, 각각 개인의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 일단 나를 위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나도 일본에 처음 와서 6개월 동안 너무 외로웠다. 럭셔리한 밴을 타고 하루에 7~8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갑자기 아줌마들이 타는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300엔짜리 도시락을 먹는 생활을 하니…. 그런데 내 시간이 많아지니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다. 인생 100세란 말도 나 혼자 내 인생과 내 문제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으니 뇟속 깊이 이해된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많다는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상식이 없어서다. 내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상식이 내것이 된다. 매일 뼈빠지게 회사에서 시달리고 밤마다 술마시고 남 욕하는 등 삶 자체가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데 태도가 어떻게 상식적이 되나. 상식적 사고는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식적 의문을 가질 때 나온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 차분히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왜 바쁜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주말에 나와 별로 가깝지도 않은 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등에 길이 막히는데도 부지런히 다니는 이유가 뭔가. 정직하게 말하면 내 자식 결혼식이나 내 장례식에 그들이 와주길 기대해서다. 그럼 내 자식의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르고 내 장례식도 소리 없이 치르면 되지 않나. 그런 것들이 행복의 본질과 무슨 연관이 있나. 불편한 것을 쳐내면 내 시간이 많아진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상식적이 되고, 상식적이 되면 주변에도 관대하게 된다. 쫓기니까 공격적이 되고, 바쁘니까 짜증이 나고 몰상식해지는 거다.”

    10년 전부터 잘 놀아야 성공한다, 그게 주체적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념에 변함이 없나.

    “그렇다. 주체적 삶의 조건은 지속가능한 삶이다. 지속가능한 경영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다. 그 원동력은 삶의 재미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일본 가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같은 인간들’을 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남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 자연히 주변사람들과도 즐거움을 나누고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정치인 비판하거나 사회구조를 지적하기 전에 더 근원적인 질문,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던져야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고 지속적으로 행복하려면 삶의 매 순간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5일제 시행 후에 휴식과 여가에 대한 필요성을 알게 되고, 나와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정작 시간이 나도 자기 시간을 엉뚱한 데 쓰지 않나. 얼마 전 자료를 보니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다는 악플러의 60%가 중년남성들이라고 해 놀랐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어젠다가 얼마나 다양한가로 측정된다. 미국과 유럽 신문의 주말판을 보면 안다. 정원 가꾸기를 비롯한 각종 취미, 문화공연 행사 안내와 평들, 정치가 아닌 사회·문화분야의 에세이 등 두툼한 뭉치의 주말판 신문을 읽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그걸 주제로 대화를 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남의 이야기에 악플을 달 시간이 있나.”

    대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52세다. 나이를 의식하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성욕이 약해졌다. 톨스토이가 나이 들어서 가장 좋은 것이 성욕이 사라진 것이라는 말을 예전엔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 섹스 대신에 다른 것에 관심이 확장된다. 그림, 디자인 등등…. 나이 들어 시력이 약해지고 성욕이 감퇴되는 등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문화에 눈을 돌리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 나이 또래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삶의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100세까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물론 젊은 여자들이 나를 더 이상 남성으로 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청마의 해인데 새해 계획이나 독자들에게 줄 덕담은.

    “말의 해라고 마구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난 100세 시대답게 인생의 계획도 1년 주기로 짜지 않고 5년 주기로 짜고 있다. 앞으로 3년간은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예정이다. 또 5년 정도 시간을 갖고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근대 미적 감각의 변화. 인상파 이후의 미술과 산업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에 대한 연구를 문헌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보고 느끼고 글로 쓸 계획이다.”



    “지난밤에 만난 사람들에게 너무 내 자랑을 해서 오늘 아침에 후회했다”는 김정운 박사. 이렇게 잘난 척을 해도 그가 밉지 않은 이유는 그는 수시로 자기성찰과 반성을 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교수생활을 할 때 내려갔던 입꼬리가 많이 올라간 것만 봐도 그는 진짜 행복한 것 같다. 아, 나도 사표를 쓰면 내 입꼬리가 올라가질까….

    <글 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21세는 찰스 핸디의 주장대로 포오토폴리오 인생이다.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경영해야 하는 시대이다..제레미 리프컨은<노동으 종말>에서  향후 20년에 인류가 쓰고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데 노력의 10%만 필요하다고 주장한바 있었다.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업인들과 사회학자들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대통령 공약으로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주5일제를 시행하므로서 오늘날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이 표면화 되었다.그런데도   정치권은 아직도 정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고 국민을 조롱하고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이미 붕괴되고 있다. 코펜하우스의 미래학자 룰프예센은 "미래 사회는 개인의 개성과 정체성을 존중하며 집단보다는 개인의 삶을 추구한다"는 '르네상스 소사이어티'에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이제는 직장인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 회사가 자신의 일자리를 언제까지나 보장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과거의 사고이다. 공무원이나 선생님처럼 철밥통을 보장해주는 곳도 60세까지일 뿐이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시대, 100세를 사는 시대인데 말이다.

    20대를 만나면 "들어갈 직장이 없다"고 하고, 30대를 만나면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다"라고 하고, 40대를 만나면 "직장 다닐 날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고, 50대는 "아직 더 일할 수 있다"고 한다. 모두 다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정작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고, 더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음에도 '일'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애써 외면한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대규모 고용은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지 못한다면 이런 상황은 10년 후, 20년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일속에서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기는 핵심이 되고 있다.

     

    1인기업은 사업규모가 일반기업에 비해 소규모 뿐이지 지향하는 목표까지 작지는 않다. 사업규모를 키우고 안 키우고는 문제가 아니고 개인의 가치와 철학에 의한 개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1인기업이 일반기업과 다른 점은 양적인 삶보다는 질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매출크기, 직원 수, 사무실 크기 등 외형적인 것보다는 자신의 역량 발휘, 명성, 행복,삶의질등 추구한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사업규모를 크게 할 필요는 없다. 역으로 말하면 사업규모가 크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하루 아침에 만들수 없다.시대환경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심오한 자기분석을 통한 자신의 브랜드 방향 설정을 하며 ,좋아하고 ,하고 싶은 자신이 잘 하는 業을 할때 브랜드가 될수 있으며 ,이에 바탕을 둔 스토리와 가치가 흠벅 잠겨 있을 때 1인 기업으로 승화 될수 있다.직장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일을 해석하면 회사를 퇴직한 후에도 자신의 이름만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다. 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퍼스널 브랜드를 가진다는 것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의 바라는 희망이고 삶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필연에 의해 은퇴 8년전부터 개인 브랜드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육하는 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향후 60대 후반 이후의 업을 위해 일년전부터 나의 브랜드 만들기에 흥미와 함께 시간관리를 하고 있다.즉 시니어와 스포츠인의 라이프 코칭에 대하여 지식과 정보를 융합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한편 'DS 평생교육원'에서는 소상인시장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업종전환 프로그램을 5월부터  시행할 예정인바 적극 참여 하시어 여러분의 브랜드와 1인기업을 만들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DS 평생교육원장 이 경 진 배상

    암중비약(暗中飛躍)

     

    -어둠 속에서 날고 뛰다.의 뜻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이면에서 책동함.
    -비밀한 가운데 맹렬히 활동함

    암중비약(暗中飛躍)


    사람들은 내가 53세가 돼서야

    맥도널드를 창업해

    하루아침에 성공했다는 데 놀라움을 표한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재능을 갈고 닦다가,

    좋은 기회가 왔을 때 꽉 잡았을 뿐이다.


    내가 하루아침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나는 30년이라는 길고도 긴 밤을 보냈다.


    맥도날드 창업자 레이 크록(1902~ 1984) 어록 中


    맥도널드 햄버거,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 드플레인에서 첫 번째

    매장을 개점한 이래 2011년 말 기준 전세계 119개국 진출에 연매출

    270억 달러의 매출과 전세계 3만350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세계적 브랜드(가치는 359억달러)매일 6,900만명의 셰계인이 먹는

    식품 햄버거의 실질적인 창업자 “레이 크록”의 어록이다.


    그는 안목, 디테일, 현장의 힘으로 세계인의 식문화를 바꾼 기업인이다.

    그의 세가지 힘을 완성한 것은 바로 끈기와 의지였다.

    그의 고백처럼 30년간의 긴 어둠을 깰 수 있었던 힘 역시 어둠 속에서

    길러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나긴 터널 속에서도 끈기와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해 힘을 기른 자가

    결국 이기는 자임을 레이 크록은 보여 주고 있다.

    한00의 사례(공군 ,헌병,대학원석사)

     

     그는 전역후 자격증을 몇개 획득하였다.우리 교육원에서만도 골프레저산업경영관리사,장비관리사, 골프지도자등과 생활체육지도자. 환경관리사등의 국가자격증을 갖고 있다. 그의 열정과 노력이 결실이 온다고 믿었기에  그에게 강의도 한꼭지 주었다. 골프장 경기운영과 룰이다.골프티칭프로 양성과정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아마도 수강생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에 꿈은 골프장에서 운영관리자로서 일하고 싶어 했다. 오크밸리cc 코스관리부에서 취업을 하여 말단 직원으로 야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월 급여는 170만원이고 숙박이 가능 하다고 하였다.공군 고급장교답지 않게 야전에서 인정 받아가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의 회사는 골프장을 대상으로 코스 및 조경의 용역관리를 하는 회사이다.국내 용역회사중에 규모가 매우 큰 회사라고 볼수 있다.앞으로 한프로 같은 인원이 지속 필요하므로 우리에게 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의 생각이다. 앞으로 취업만을 담당할 수 있는 전담조직을 만드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양성된 자원을 취업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확대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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