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4.15 맥도날드 정식 프랜차이즈 제1호점을 시카고 근교에 개점하다
|
|
어느 작은 주방용품 회사의 영업자인 그의 일과는 시카고 인근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한꺼번에 다섯 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신제품 멀티믹서를 내놓았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 |
믹서기 팔던 크록,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를 보고 사업가 감각이 발동
레이 크록이 시카고 디플레인스에 개장한 맥도날드 1호점. 지금은 맥도날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의 작은 드라이브인 식당에서 이 신제품을 무려 8대나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호기심을 느낀다. 직접 방문해 보고 나서야 그는 왜 이 가게에서 멀티믹서를 그렇게 많이 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사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것이다.
사업가 특유의 감각으로 그는 이 식당을 전국의 도로변마다 세우면 ‘딱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당 주인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고, 양측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만나 계약 조건을 결정했다. 매장 이름을 비롯하여 메뉴, 매장 구조, 운영 방식, 심지어 일종의 상징물인 금색 아치까지도 원래 주인 형제가 쓰던 것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합의했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자 새로운 동업자 레이 크록은 식당 주인 형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 식당의 이름은 주인 형제의 성(姓)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었다. 바로 ‘맥도날드’(McDonald’s)였다. | |
맥도날드라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식당의 창안자는 모리스(1909-1971)와 리처드 맥도날드(1909-1998) 형제다. 뉴햄프셔 출신인 이들은 1920년대에 캘리포니아로 와서 영화업계에서 일하다가 1937년에 처음 식당을 차린다. 1948년에는 메뉴와 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대혁신을 이룩하여,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와 음료수를 손님들이 직접 가져가게 하는 대신, 가격은 낮추고 음식의 질은 높인 셀프서비스 매장을 만든다. 식당이 성업 중이던 1954년, 레이 크록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찾아온 것이다. | |
53세의 나이에 맥도날드 사업을 시작해 매일 아침 직접 청소하기도
레이 크록은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사업 재간을 발휘하여 소다수며 악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쟁에 나가려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입대가 거절되자 일종의 편법으로 적십자의 구급차 운전기사가 된다. 당시 그의 동료 중에는 월트 디즈니라는 만화가 지망생이 있었고, 역시 시카고 출신인 또 다른 청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수법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해 졸지에 ‘상이 용사’ 대우를 받았다. | |
이후 주방용품 회사에서 일하던 인연으로 맥도날드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크록은 아내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5년 4월 15일,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제1호 지점을 개장한다. 물론 맥도날드의 최초 매장은 샌버너디노의 본점이고, 그 외에도 크록을 만나기 전에 맥도날드 형제가 허가한 10여 개의 프랜차이즈 지점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맥도날드가 시작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제1호 매장은 바로 디플레인스 지점이다. 전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그때, 크록의 나이는 무려 53세였다. 앞으로 갈 길은 멀었지만, 일단 첫 걸음은 뗀 셈이었다.
하지만 크록의 새로운 사업이 시작부터 일사천리 성공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권리료가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본사의 수입이 몇몇 지점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적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는 각 지역 매장을 본사에서 소유하고 점주에게 장기 임대하는 방식을 취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게 아니라, 햄버거 파는 가게를 임대하는 부동산 사업자”였던 것이다. 청결 관리를 철두철미 강조한 크록은 매일 아침 제1호 매장에 나가 직접 청소를 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에 완벽을 바랐다.” 그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QSC & V)라는 기준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 |
|
맥도날드 간판 앞에서 햄버거를 먹는 레이 크록 | |
햄버거 대학 만들어 점주들 교육한 크록,'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선정
레이 크록이 설립한 햄버거 대학. 레스토랑 경영 프로그램등 매장 매니저 및 예비 점주들에게 햄버거 체인점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가르친다. | |
|
1960년에 맥도날드의 지점 수는 200개를 돌파한다. 1961년에는 본사에 일명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을 만들어서 전국 각지의 점주들을 모아 서비스 교육을 하고, 그 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햄버거 전공, 프렌치프라이 부전공’으로 학위도 수여했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어릿광대 ‘로날드 맥도날드’가 탄생함으로써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서 ‘아동 고객’을 공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낯설지만, 로날드 맥도날드는 한때 산타클로스에 버금갈 정도로 미국 어린이에게는 큰 인기를 누렸다. 1966년에 맥도날드는 주식을 상장했고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주가는 두 배로 뛰어오른다. 기존의 드라이브인 방식을 탈피하여 오늘날과 같은 ‘좌석’을 갖춘 매장을 최초로 개점한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 |
크록이 자서전을 발표한 1976년에 맥도날드는 창립 20여 년 만에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22개국에 4,177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다. 2008년을 기준으로 맥도날드의 총수입은 200억 달러 이상이며, 119개국에 3만 1,000개 이상의 매장이 있다. 레이 크록은 <타임> 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 1월 14일, 크록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행보는 이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 |
미국 어린이에게 큰 인기를 누린 맥도날드의 마스코트 로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