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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를 일깨운 ‘등에’…소크라테스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가 성공을 부른다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아버지는 석공 일을 하는 노동자,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아기를 받아주는 산파 일을 했습니다. 귀족·평민 따지는 시대에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태도로 살아갔죠. 얼굴도 정말 못생긴 주제에 말입니다. 또 아테네 전쟁에 2번이나 지원해 참가한 참전 용사였습니다.

자식을 셋이나 낳았지만 젊은 부인만 고생합니다. 부인은 악처의 대명사로 소문난 크산티페입니다.

평생을 집안에 돈 한 푼 가져다주지 않는 경제적 무능력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속을 끓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죠. 그야말로 간 큰 남자가 바로 인류의 영원한 스승 소크라테스입니다.

 

 

평생 확실한 진리를 찾아 헤맨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는 절대 진리를 발견했다.

 

 

리더는 질문을 하는 사람

그렇다면 그는 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써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배우려고 하죠. 배우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거나 묻지 않는 것은 죄가 성립됩니다. 왜냐고요?

‘아는 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일일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섭니다. 무슨 일일 목표를 가졌던 간에 내일부터 한 가지 추가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 일일 목표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을 해보세요.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존재감이 별로 없던 동창이 어느 날 동창회에 나타났는데, 완전히 변한 모습을 보고 놀란 경험이 있습니까?

“야, 저 친구 고등학교 때 몇 반 했는지 아냐?”

“난 모르겠는데, 누구 아는 사람 있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친구는 얼굴에 넘치는 자신감, 매너 있는 행동, 입고 있는 옷과 모든 것을 갖춘 듯합니다. 졸업 후에도 사람은 계속 발전해 나갑니다. 오직 배우려는 일일 목표를 가진 사람만이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르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선뜻 질문을 던지나요.

도대체 사람들은 왜 모르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일까요.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싫은 겁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리더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는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당대의 최고 소피스트, 즉 궤변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당시 소피스트들은 정치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돈을 받고 웅변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현혹해 자신에게 설득당하도록 하는 수사학의 달인들이었죠.
 
요즘 말로 ‘아니면 말고’ 식으로 지식을 파는 사람들의 위선을 소크라테스는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그러자 소피스트는 “정의는 자신이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칼의 주인이 미친 상태에서 돌려 달라고 한다면 정의를 위해 돌려줘야 하는가?” 상대방은 당연히 “아니다”고 답합니다. 자기가 주장한 말을 뱉자마자 반박하는 것입니다.

사실 궤변가들에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는 곧 그들에게 “너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이런 식의 대화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 하나에 바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상황들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불쌍한 잠자리처럼 파닥거리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라는 거대한 쇠등에 침을 쏘는 ‘등에’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소가 잠들지 못하도록 깨우는 그런 등에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귀족들의 천박한 생각을 마구잡이로 몰아붙이고 도전적으로 논쟁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가신 존재였을까요.

특히 집권자들에게는 사사건건 따지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성가신 존재였을까요. 얼마나 건방지게 보였을까요. 결국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경영을 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처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죠. 사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소크라테스니까요.

소크라테스는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러우면 그냥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죠. 또 친구가 하는 말이더라도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에서 “모른다”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또 따졌습니다.

만약 이런 자세로 소크라테스가 경영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새로운 길을 갈 때, 예를 들어 신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모순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사람은 적어도 위태로운 상황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죠.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은 발붙일 곳이 없는 조직을 만들어야 승산이 있습니다. 물론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학습의 기회를 듬뿍 주는 리더가 필요하겠죠.

요즘 거의 모든 최고경영자(CEO)들이 인재를 중시한다고 말합니다. 인재를 정말로 중시하는지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는 교육 훈련비가 얼마나 책정돼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나마 불황이 닥치면 직원 교육비부터 제일 먼저 삭감합니다. 이것은 말로만 인재 중심 경영을 하는 겁니다. 리더 중 최고의 리더는 리더를 키워주는 리더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편견과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답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리더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인식을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살았던 한 철학자는 평생 찾아 헤매던 확실한 진리를 결국은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모른다’는 절대 진리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것들을 알고만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반드시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신입니다.

 


 

 

 

소통과 융합의 선각자 칸트, 진실만이 충성과 프라이드를 가져온다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일본의 한 우유 회사 제품을 복용한 고객들에게 식중독이 발생했습니다. 그 회사는 “자사 제품에는 문제가 없다. 아직 구체적 연관 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피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오사카 시 보건 당국은 강제 리콜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우유 회사의 사장은 마지못해 기자회견을 통해 진실을 밝힙니다.
 
“공장에 있는 기계 중 하나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하지만 그 기계는 가동 중단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사 제품을 계속 애용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소비자 보호 시민단체와 동행한 TV 방송국 기자가 문제의 그 기계가 그 후에도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소비자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전국적인 불매 운동이 전개됐고 다음해 그 사장은 사퇴했으며 일본 최대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던 회사는 결국 부도 처리되고 말죠. 여러분도 잘 아는 스노우유 이야기입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칸트

왜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할까요.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보복이 두려워서, 기분이 상할까봐, 변화가 무서워서, 왕따 될까봐, 지지를 상실할까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체면이 손상 될까봐”라고 말입니다. 이 변명들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손해 보기 싫다는 이기심 그리고 손해 보는 것이 겁난다는 비겁함입니다. 이처럼 진실을 소통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불편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실과 마주하고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이 최대의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칸트입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루터교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평생 절제하고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태어난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평생 살았죠.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반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가르친 토픽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주제였지만 강의실은 항상 학생들로 넘쳤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하죠. 무척 유머러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칸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았습니다.

또 전 세계 지리·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시간 강사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나름 도가 텄던 것이죠. 또 요즘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동료 학자들이 아니라 사회 각층의 다른 분야 사람들과 꼭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결코 외톨이 샌님 학자가 아니었죠.

여러분은 요즘 동종 업계와 거래처를 빼고 어떤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셨는지요. 보통 전문가라고 하면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전문가와 전문가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인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소통, 소통하고 융합, 통섭까지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칸트는 융합의 선각자였습니다.

칸트가 주창한 것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도덕법칙은 문화나 사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고 자신은 예외로 돌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죠.

이것을 서양에서 찾자면 ‘성경’의 예수의 말씀, ‘남이 네게 하기를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남에게 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것을 한 단계 더욱 격상시키려고 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의 결과가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은 가급적 안 하는 것이 좋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수많은 질문들이 꿈틀할 것입니다. 뭐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인지상정이죠.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집주인에게 호소합니다.

“지금 무지막지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는데, 좀 숨겨 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여기 곧 올 텐데, 그때 이 집에 없다고 좀 말해주세요.”

그러곤 집 안에 황급히 뛰어들어가 숨습니다. 과연 조금 있으니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타납니다. 자, 그럼 당신이 그 집 주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자신의 집에 숨어 있다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증명은 이렇습니다. 만약 집에 있다고 진실을 말해 그 살인마가 그 사람을 발견해 죽인다면 그 살인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집 주인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집에 없다고 한 말을 듣고 그 살인마가 집 뒤로 돌아갔는데 집주인을 믿지 못한 사람이 집을 나와 도망치다가 길에서 붙들려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집주인의 책임입니다. 이처럼 거짓말은 우리 삶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상대의 인격 존중을 의미해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상대에게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객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 기업은 소비자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객이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고객이 일단 그것을 느꼈다면 수습할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절대적인 최선의 방법은 사전에 미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소통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느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결정을 자기 스스로 내린 것이라고 느낄 때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을 때 주인 의식을 느끼죠. 그래서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된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말은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짓말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고, 또 장기적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고 협조를 구하는 리더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진실’만이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조직에 충성하고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인의 전형 마키아벨리, 군주는 똑똑한 부하의 쓴소리를 즐긴다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미국의 특수부대 델타포스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사막에서의 훈련입니다. 며칠간 열사의 땅에서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생존 본능만이 남아있을 때 그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타는 듯한 갈증 속에 이성의 힘도 마비된 가운데, 책을 펼쳐 마키아벨리가 들려주는 ‘리더에 대한 성찰’을 학습해 내는 사람만이 델타포스가 될 수 있지요.

과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이 위대한 로마도 결국 시간이 지나자 멸망의 수순을 밟고 말지요. 이후 로마는 바티칸교황령·나폴리왕국·밀라노공국·베네치아공화국·피렌체공화국으로 분할되더니 프랑스·스페인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게 되죠. 이때 이러한 조국 이탈리아의 비굴한 운명을 개탄하던 애국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입니다.

그는 강력한 군주의 출현만을 열망하며 ‘군주론’을 집필하기에 이르죠.


 


 

현실 정치 파헤친 최초의 사회과학자

‘군주론’을 펼치면 가장 먼저 그가 당시 정치가들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내는 헌정사가 나옵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한 지식으로 위대한 군주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을 배웠고 높은 산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하듯이, 군주에 대해 자신과 같은 평민이 말하는 것은 결코 주제넘은 일이 아니라고 써 놓았지요.

마키아벨리는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전·라틴어·역사·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천재로서 당대의 사상가라고 평가됩니다. 그는 자신의 인문학 교육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의 어두운 면을 철저하게 파헤친 최초의 사회과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의 이론은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 ‘이기적’이라는 전제하에서 펼쳐 나갔죠.

마키아벨리가 바라는 로마를 구원해 줄 강력한 군주는 신민과 소통하는 방식이 남다릅니다.

먼저 군주는 아첨꾼에 둘려싸여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 순간에 아첨해야 한다는 것은 조직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주가 아첨꾼에 둘러싸이면 진실의 반쪽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국가의 나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사고가 발생하면 그것을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하지요. 결국 대외적으로 리더가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위기가 수습되기는커녕 더욱 커지고 말죠. 사실 외양간을 고칠 최고의 적기는 소를 잃고 난 직후입니다. 더 많은 소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그런데 왜 군주는 아첨꾼에 둘러싸일까요. 간단합니다. 군주가 화를 버럭 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다들 눈치만 살핍니다. “자네더러 누가 이런 거 하라고 그랬어!” 이 한마디를 던진 순간 부하의 창의성은 뿌리부터 말라버립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해 당황했을 때, 우선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을 화나게 만든 그 사람에게 화를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자병법’엔 화를 잘 내는 장수 밑에 있는 병사들은 게으르다고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회의는 어떤 회의일까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회의입니다.

리더가 회의 벽두에 자신의 방침을 밝히면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순간 그 회의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더는 가장 나중에, 그것도 꼭 필요할 때 발언해야 합니다. 리더의 말은 곧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릇이 큰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리더, 즉 군주의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똑똑한 부하를 몇 명 데리고 있는지를 보면 안다고 말이죠. 똑똑한 부하들의 쓴소리를 즐길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 길거리에 서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쓴소리가 어떻습니까. 이걸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똑똑한 부하들이 회의 석상에서 쏟아내는 얘기들을 참고 듣고 있는 것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되기 전에는 불가능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또 다른 솔루션을 말하고 있습니다. 쓴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하지만, 아무나 자신들이 편한 시간에 할 말 안할 말 다 하고 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판단력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돋보이는 심복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심복들을 키워서 이들과 24시간 핫라인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심복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사랑받기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라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라고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웬 공포냐고요. 이 말의 요지는 부하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포퓰리즘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랑 받으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는 어렵고 하나를 선택하려면 공포의 대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 식으로 증명해 드릴까요.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도 여러분에게 반드시 사랑으로 보답하던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짝사랑이란 게 있겠습니까. 물론 사랑으로 보답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을 바치고 나면 이제 당신은 그 사람의 자비에 맡겨진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겁니다.

이번에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처벌을 가해 보세요. 얼굴을 빤하게 쳐다보면서 눈동자를 감히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따끔하게 혼을 내보세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부하는 이제 여러분을 공포의 대상으로 대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제 그 부하는 당신에게 꼼짝 못하게 될 것입니다.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기만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자, 마키아벨리의 이 인간관계 맺기가 다소 경직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키아벨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분류되는 인물입니다. 인간 본성에 이제 다시 눈을 뜨게 된 시기에 마키아벨리가 이런 소통에 대한 통찰을 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고전에서 배우는 ]

동굴을 박차고 나가는 자만이 태양을 본다

 

영원불멸의 진리를 추구한 플라톤

 

플라톤은 귀족 출신입니다. 정치의 세계로 뛰어들어도 충분히 성공하고 호화롭게 잘살 수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나 진리 탐구 세계에 온몸을 던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학문의 전당의 대명사 ‘아카데미’는 플라톤이 연 최초의 대학입니다. 그는 수학과 기하학의 엄밀함을 진리의 표상으로 내세웁니다. 시인과 같이 허구를 추구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영원불멸의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다운 구상입니다.

플라톤은 28세에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목격합니다. 진리를 평생 추구해 왔고 정의를 사랑했던 스승이 말입니다. 이에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무지가 다수결이라는 미명 하에 판을 치는, 어리석은 정치판이라고 비판합니다.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24편의 대화 형식의 작품을 씁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죠.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톤의 ‘대화편’입니다.


 


 

태양을 본 죄수가 동굴로 돌아온 까닭

(대화편에서) 플라톤의 ‘국가’는 3가지 계급으로 구성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철인 왕(philosopher king), 다음은 전사, 그리고 노동자입니다.

회사로 보면 사장과 직원으로 비춰볼 수 있겠죠.

우선 왕·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알아서 조직의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전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외적을 방어하고 내부 질서를 유지하죠. 플라톤 시기에 전사 계급은 다부다처제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식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기업도 일류 조직에 가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직원들의 주인의식입니다. ‘공통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하나 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전사의 용기는 진가를 발휘합니다. 다음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근면 절제입니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철인왕·전사·노동자로 구성된 국가는 비로소 ‘정의’라는 덕목을 실현합니다.

그러면 철인왕은 용기 있는 전사, 근면한 노동자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요. 플라톤의 솔루션을 들어보겠습니다. 동굴 속에 죄수들이 갇혀 있습니다. 한 번도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등 뒤에 횃불이 있고 앞에는 동굴 벽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림자만 현실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때 어느 한 죄수가 말합니다.
 
“동굴 밖에 나가면 혹시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 몰라.”

어렵게 나간 죄수는 눈부신 태양을 바라본 순간 눈이 멀 것 같습니다. 동료들에게 태양의 존재를 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눈이 적응되지 않아 자꾸만 비틀거립니다.

“뭐 태양이 있다고?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비틀거리는 주제에…. 너나 잘하세요.”

자 여러분이 태양을 본 그 죄수라면 동료 죄수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우화’입니다. 플라톤은 지상에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그림자,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데아야말로 영원한 존재라고 봤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동료 죄수를 설득해야 하는 그 불쌍한 죄수는 누구일까요. 바로 리더입니다. 자신도 감각적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그 태양의 존재.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하는 그 죄수가 처한 상황.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죠.

여러분 잘 한번 생각해 보시죠. 어떻게 태양으로 비유되는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이성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진리란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천부적으로 진리를 이미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이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양심과 이성의 능력을 일깨워 주는 겁니다.

비전을 명확하게 가지는 일은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겁니다.

왜 그 죄수, 아니 리더는 자기 혼자 태양을 발견하곤 외부 세계로 탈출하지 않고 다시 동굴로 돌아왔을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큰일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바로 비즈니스는 사람을 매니지(manage)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혼자 동굴을 탈출해 방랑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리더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신의 동료·부하들과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리더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태양과 같은 비전은 어떤 걸까요. 이 세상에 가치 있는 것 중에 물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필자는 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절대 포기할 수 없는 10가지를 써라. 그리고 하나 둘 지우라고 한 다음 맨 마지막 남는 1개는 무엇일까요. 크게 3가지로 압축됩니다.

절대자·가족·사랑.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만약에 우리 조직의 비전을 세우는 데 사랑이 빠지면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지는 겁니다. 모든 조직의 비전이 이기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태양과 같은 비전이 될 수 없습니다. 태양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골고루 비춰주니까요. 지속 가능한 비전을 수립하는 리더가 되세요.


두려워도 자신의 비전을 실천하는 리더

한 선장이 아무도 가지 않은 서쪽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가도 가도 원하는 육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데요. 결국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선장을 돛대에 묶고 배를 당장 돌릴 것을 요구합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항해에 나선 선장은 말합니다.

“이틀만 시간을 다오. 그래도 인도가 안 나오면 돌아간다.”

겨우 풀려난 선장은 선실에 앉아 독백합니다. “사실 나도 처음 가보는 데….”

이틀 뒤 그들은 아메리카를 발견합니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기입니다. 리더는 이처럼 자신도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다른 조직원에게 설득하는 소통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워도 자신의 비전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죠.

여러분은 어떤 동굴에 살고 있나요? 누구나 동굴에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 그저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갇힐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죄수처럼 여러분도 자신의 동굴을 박차고 나가 태양을 발견해야 합니다.

비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립하고 구성원들에게 소통해야 합니다. 동굴의 우화에서 핵심은 혼자 태양을 발견하고 떠나버리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리더들은 높은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을 직시합니다. 동굴을 버리지 않고 안주하지도 않는 사람이 바로 리더입니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 한경

 

 

 

 

 

 

 

플라톤대화편

 

♣《국가론(國家論; Politeia)》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저서일 뿐 아니라 《법률》과 함께 가장 방대한 저서이기도 하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1권은 초기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설명하는데 머물러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중기 후반부의 저작들로 그 자신의 사상이 충분히 전개되어 있다. 이 저서는 저술 양이 워낙 많은 만큼 형이상학, 인식론, 정치사상, 심리학, 교육학, 예술론 등 철학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정의(正義)의 문제, 국가 구성에 필요한 지혜자/ 용사(勇士)/ 절제자 등을 구분하고 통치자의 공동생활과 재산과 가족의 공유를 논하며(5권), 철학자의 삶과 선의 이데아, 앎의 단계에 따르는 동굴의 비유, 귀족정치를 최상의 정치 체제로 보고 귀족 정치제의 변질 정도에 따라 금권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 참주정치 등의 정치 체제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8권).
마지막 권인 10권에서는 용감한 전사(戰士)였던 에르가 전사(戰死)한 뒤 그 시신을 화장하려는 순간 다시 살아나 그의 영혼이 저승에서 본 일을 이야기하는 에르(Er) 신화(神話)가 쓰여있다. 정의의 응보에 있어서의 영혼의 불사, 이승에서의 응보와 저승에서의 응보에 관한 이야기이다(직접 기술).


♣《법률((Nomoi)》
법률 뿐만 아니라 인간성 전체에 관한 날카로운 고찰이 시도되고 있으며 교육론이 비중있게 전개된다. 또 플라톤의 무신론에 관한 논난은 그의 신관을 보여준다.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그의 모든 대화편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주창한 이상국가가 최선의 국가 형태라면 법률에서는 토지와 재산, 처자의 사유(私有)가 허용되는 차선책의 국가론을 피력하고 있다(직접 기술).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 묘사.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神)들을 믿지 않고,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발되었으나, 그는 이에 대하여 당당한 변론을 시도하였다. 이 변론은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의 세 부분으로 되었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眞髓)로서, 또한 소크라테스의 고발·판결·사형의 관련을 밝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한 소크라테스 문학은 때로 작자의 창작이 섞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저작의 주요 부분은 역사적으로도 충실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문체로서는 플라톤의 작품 중 백미(白眉)에 속하고, 예로부터 그리스 문학사상 산문문학의 주옥편으로 중히 여겨왔다[두산동아].

♣《크리톤》 공동체의 법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문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지우(知友)의 이름이다. 이 대화편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논리문제를, 개체와 국가 또는 법률과 결부시켜 다루고 있다. 그것은 단지 머리로 생각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사를 언급하며 얘기한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는 날 새벽에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외국으로 탈출할 것을 권고하는 크리톤의 권고를 거절한다. 당시의 재판 과정과 관행 등을 볼 수 있다.


♣《테아이테토스(Theaetetvs)》 지식의 본질과 범위, 절대적 지식의 성립가능성에 관한 논의

지식에 대한 정의로서 선결문제해결을 요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설과 프로타고라스의 인간만물 척도설 등의 주관적 학설을 비판한다. 이어 테아이테토스가 "지각이 앎과 동의어가 아니라 진위(眞僞) 가운데 진(참됨)만이 앎"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람을 논파하고 꿈 이야기를 통한 앎과 형상(形相)과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논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플라톤 자신의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대답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엘레아학파의 존재론과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의 초기 이데아론을 발전시켰다. 플라톤의 초기 이데아론을 통해 여럿의 개별자만 있고 보편적 일자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반대로 보편적 일자만 있고 여럿은 없다는 파르메니데스 사이에서 개별자들은 이데아를 분유하여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되고 이데아는 경험적 영역을 밖에서 개별적 사물의 원형인 보편적 존재로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와 같은 초기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에 의해 보다 발전된 문제를 안게 된다. 과연 개별자의 수만큼 이데아의 수가 존재하는가?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개별적 사물과 그것의 이데아가 ‘닮음’의 관계에 있을 때 이 ‘닮음’을 말하기 위해 또 다른 ‘닮음’을 설정해야 하는 무한 소급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의 기초는 하나와 여럿이 양립할 수 없다는 엘레아학파의 존재론에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대화편에서는 ‘가설적 방법’이 사용된다. 이것은 엘레아학파의 존재론에 따라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여 그 가설을 긍정할 때의 결론과 부정할 때의 결론을 서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플라톤은 이 과정을 통해 명시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복잡한 논증을 통해 엘레아학파의 논리를 무력하게 만들어 하나와 여럿의 양립 가능성을 치밀하게 모색하고 있다. 이 대화편은 이데아론의 발전 과정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두산동아).


♣《파이돈(Phaidon)》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

아테네의 감옥에서 죽음에 직면하여 소일하던 소크라테스의 나날을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영혼불사(靈魂不死)의 증명을 주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본래의 목적은 필로소피아란 죽음의 훈련이며, 무덤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초극이라는 입장에서 항상 영원한 실재(實在)를 생각하면서 사(死)와 생(生)에 관한 사색을 깊이 해갈 것을 권장하는 데 있다[두산동아].


♣《향연(饗宴; Symposion)》미의 신 에로스에 대한 대화로, 플라톤 대화편의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

비극시인 아가톤의 집에서 열린 축연(祝宴)에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연설을 아리스티데스로부터 전해 들은 아폴로도로스가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즉 축연에 모인 손님들은 차례로 연애신(戀愛神) 에로스에 대한 찬사를 하게 되었는데, 파이도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에 이어 소크라테스가, 옛날에 무녀(巫女) 디오티마에게서 들은 연애관을 피력한다. 육체의 미에 대한 추구에서 영혼의 미에 대한 추구로 승화되고, 마침내 미 자체의 관조(觀照)에 도달하는 것이 연애의 올바른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때 소크라테스의 신봉자 아르키비아데스가 취해서 들어와, 에로스 예찬을 갑자기 소크라테스 찬미로 바꾸어 버린다[두산동아].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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