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될 경술국치 102년

독립군의 목숨으로 회수한 대한민국




일장기가 걸린 경복궁 근정전 을사조약의 어두운 그림자

조선시대 왕들이 나랏일을 보던 경복궁 근정전에 일본 국기인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0년 8월 대한 제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후 근정전은 일본군이 장악했다.


앞서 일본은 1875년 ‘운요호’라는 일본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략하여 1876년 강화도에서 불평등한 내용이 담긴 조약을 맺은 이후 미국,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에서도 평등과는 거리가 멀어 한반도는 너도나도 넘보는 연못속의 물고기 형국이 되고 말았다.


1894년에 안으로는 나라를 바르게 세우고 백성을 위해,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을 몰아내고자 하는 동학농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일본은 이를 핑계로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1894년 청일전쟁을 벌였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모든 백성은 분노하였고,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6년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갔다가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하여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1897년 황제로 즉위하지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리던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하였다.


일본은 조선 침략 계획대로 군대를 조선에 마음대로 파견할 수 있는 협약을 강제로 맺고(1904년 한일 의정서), 미국과 비밀협정(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는 동맹(1905년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은 결과 한국에서 일본의 힘은 커져만 갔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경운궁을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몇 겹으로 둘러싸게 한 후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제2차 한일협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을사늑약에 의해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 왕이 임명한 통감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약을 맺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이 다섯 명을 을사5적이라고 부르며 매국노로 낙인찍혔다.

당시 대한 제국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대표단을 파견하였지만 일본은 고종 황제를 내몰고 그의 아들 순종을 황제에 올린 후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1907년 일본인을 정부의 관리로 앉히는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


대한 제국의 외교권, 사법권을 차례로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킨 일본은 1910년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한국에 총독부를 세우고 데라우치를 총독으로 보냈다


데라우치는 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대한 제국 병합에관한 조약’이라는 문서를 통해‘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주며 준다.’순종 황제의 옥새를 찍어 오라고 했고 순종 황제가 이를 끝내 거부하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황제를 대신한다는 위임장을 강제로 받아 ‘한일 병합’ 조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1910년 8월 22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순간이자 2천만 동포들에게 처참한 식민지의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합병의 형식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8월 29일일본의 데라우치가 ‘한일 병합’ 조약을 발표한 날 한국은 사라져 버렸고 102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제의 잔재는 곳곳에서 그힘을 과시하고 있다.

아래는 을사조약의 전문이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하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하여 일본국 황제 폐하는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 자작을,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그러므로 위 전권위원은 합동 협의하고 아래의 제조를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가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과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에도 각기 상응하는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부여한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동지에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을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하는한국인으로써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한 한국에서의 일본제국 관리로 등용한다.


제8조 본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사람들

최익현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뭉쳐 의병을 일으켰다. 또 태백산 호랑이로 유명한 신돌석은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이끌었다.


1907년 8월 1일 통감부의 지시로 약 2만여 명의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박승환 참령은 이에 항의하고자 권총으로 자결하였고, 우리 군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전국의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이라는 이름 아래 서울로 진격하였지만 이를 눈치 챈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1908년 11월 신돌석 의병장마저 믿었던 옛 부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총으로 쏘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을 기르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사람의 힘을 모으기 위해 애국 단체를 만들었다. 또 일본에 진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온 국민이 품삯을 모으고, 반지와 비녀를 모았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일본의 식민지시절 그 참상은 불과 100년전 현실

가난한 시대에 매춘은 매우 이익이 나는 장사(?)

일본은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관여했고, 위안부 모집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최근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연행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데 이어 24일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시모토 시장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오사카 시청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 철회와 사죄를 요구하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하자 “군이 위안소를 공적으로 관리했다는 것과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며 “고노 담화는 애매한 표현으로 일·한 관계를 악화시킨 최대의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우익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이 강제로 매춘시켰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며 “(고노 담화가)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강제성을)인정해 일·한 관계를 망쳤다.”고 비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太?) 일본 도쿄도 지사가 24일 일본군의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인이 강제로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가난한 시대에 매춘은 매우 이익이 나는 장사였고 (위안부는)이를 피하지 않고 그 장사를 선택한 것"이라는 망언을 또다시 되풀이했다.


일본 지지 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시하라 지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한 지난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당시)의 담화에 대해 "영문도 모른 채 (한국의 주장을)인정한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지적했다.

조상이 저지른 죄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해야할 후손들이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태연히 보여주고있다.


곳곳에 살육의 현장이 ...


고성- 학살 후 장바닥에 효수,학살한 시체를 공개리에 가마솥에 끓여 골육을 보라고 강요

원주-나무에 묶어 할복각피(割腹刻皮), 그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웃도록 강요

평산-남녀 수 십명을 잡아 겨울에 얼음을 깨고 밀어 넣어 얼어 죽게 했다

어떤 곳-주민들을 반신만 땅에 묻고, 풀 베듯 칼로 목을 쳤다


연길현 와룡동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 심문, 얼굴 가죽을 다 벗겨내고,눈알을 도려냄 2~3세 되는 유아를 창 끝에 꿰어 들고 다니기도 함


한국통사(韓國痛史1920.10~1921.5(8개월간) 봉오동,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37,000명 학살) 및 가옥,학교,교회 방화용정 장암동 주민을 교회에 집결시키고, 40대 이상 남자 33명 포박, 교회에 가두고 방화


음악까지 일본 가락을?


한국의 대표 근대 음악가인 홍난파 선생이 1938년 작곡한 '희망의 아침''봉선화', '고향의 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도 작곡했지만 이처럼 반민족적 내용의 친일음악도 많이 썼습니다.


홍난파와 조두남, 현제명 등 친일작곡가들의 음악과 일본색이 짙은 가요 우리 노래로 알고 있는 '퐁당퐁당'이나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동요도 일본식 5음계와 2박자 장단 등 일본음악의 특징이 강한 음악일본풍의 동요나 가요다.


애국자의 말말말...


윤봉길 의사 유서 중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쟁취하는 것이다역사(歷史)라는 것은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동포에게 보내는 글


-백범 일지 중에서-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인가를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 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단재 신채호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그 눈에 나라(國)라는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손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봉사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혈혈누누(血血淚淚)가 나라를 위해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응칠아(안중근 의사의 이름)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를 세계 만방에 보여준 것이다.이 분노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억울하더라도 상고를 하지 말고 우리민족의 대의를 위해 거룩한 죽음을 택해야 될 줄로 안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이 그른 사람들에게 재판을 다시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이등박문을 죽인 너를 일본 놈들이 살려 줄 리가 있느냐?


혹시 자식으로서 늙은 에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상고하겠다면 그건 결코 효도가 아니다. 기왕에 큰 뜻을 품고 죽으려면 구차히 상고를 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남기지 않기 바란다.

안중근 유언

나의 시체를 조국에 갖고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 감옥 묘지에 매장 인도될 것이니 하얼빈 공원 인근에 가매장 하라. 그리고 국권이 회복되는 날 고향 땅에 이장 토록 하여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국권 회복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너희도 나의 뜻을 동포들에게 전하여 동심일력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쳐 천국까지 들리게 해주면 나도 용약하여 천상을 쏘다닐 것이다.

끝나지 않은 한민족의 비극

38선의 시작은 ?

한민족이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외세에 휘둘리게 된 38선의 유래를 보면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11일 새벽 2시 딘 러스크와 미 국방성 작전국 정책과장 본스틸 대령이 국무, 국방, 해군 3성 조정 위원회(SWNCC)의 독촉을 받아 야간작업을 진행하여 미.소 점령구역 경계선으로 38도선을 30분 만에 획정했던 1945년판 National Geograpic이다.


이후 5년뒤 조선땅은 피로 물든 6.25동란이 이어졌고 3년동안 밀고 당기는 동안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겪고서야 67년이 지난 현재까지 처음 그선을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분단속에 누군가는 이득이 전제한 한민족의 수난시기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 없는 후한무치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억지주장의 극치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23일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를 요구한 데 이어 24일에는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영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에도 시대부터 1905년 각의 결정으로 독도를 일본땅에 편입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또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근거 문헌이 애매하고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그는 "한국도 할 말이 있겠지만, 자국이 생각하는 정의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결론을 내는 것이 왕도"라고 말했다.

일본의 독도넘보기 위험한 수준

정부는 24일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히 우리의 고유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일본 총리가)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이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의 독도 영유권 관련 기자회견 내용을 비판하는 논평을 통해 이같이 촉구했다.조 대변인은 "일본은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와 힘을 합쳐 한일간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노다 총리는 이날 독도·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와 관련한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면서 "국가의 영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단호한 태도로 냉정 침착하게 불퇴전의 각오로 임하겠다"고 밝힌 바있다.


우겨대는 독도 영유권 현주소는

독도로 본적을 옮긴 일본인이 88명에 이른다고 요미우리신문이 25일 보도했다.지난 1월 79명에서 9명이 늘었다. 일본 정부가 지난 2005년 5월에 국회 답변에서 밝힌 숫자는 26명이었다.


일본의 본적지는 지번이 있으면 현 거주지와 상관없이 일본이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 어디로든 옮길 수 있다.쿠릴열도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이나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심지어 산호초에 솟은 바위에 인공구조물을 쌓은 오키노토리(沖ノ鳥)에도 본적지를 옮긴 이들이 있다.


본적 이전은 실제로는 호적을 관리하는 관청이 바뀐다는 의미다.한국에서는 독도로 본적을 옮긴 이가 2천700여명이고 독도에 거주하는 주민도 있다.

독도의 `한일 공유론'논란빚은 김태우 통일연구원장

양국 간 감정대립이 겹치면서 한-일 간 외교갈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가운데 김황식 국무총리는 24일 독도 주변 자원에 대한 `한일 공유론'으로 논란을 일으킨 김태우 통일연구원장에 대해 "엄정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정책질의에 출석해 "통일연구원장이 아닌 친일 연구원장과 같은데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느냐"는 민주통합당 최재성 의원의 질문을 받고 이같이 답했다.


김 원장은 23일 연구원 홈페이지에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해결방안으로 "일본이 독도 육지와 인접 영해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주변 해양 및 해저자원은 양국이 공유하는 방식을 협상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곧바로 삭제했다.


김 원장은 "(홈페이지에 게재된) 온라인 시리즈는 학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통일연구원의 공식적인 정책을 발표하는 장치가 아니다"면서 공직자로서의 주장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김 원장은 23일 연구원 홈페이지에 게재한 '한일 외교전쟁 조속히 매듭지어야'라는 기고문에서 "일본이 독도 육지와 인접 영해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주변 해양 및 해저자원은 양국이 공유하는 방식을 협상할 수 있다. 그런 원칙에 따라 배타적 경제수역(EEZ) 확정을 위한 협상도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독립기념관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확히 증명하는 일본 근대교과서 자료공개를 실시한다고 24일 전했다.이번에 공개되는 일본 교과서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라고 한다.


또한 정부기구(교육을 주관하는 문부성)에서 제작 및 검증한 자료에서 독도가 일본과 무관한 영토임을 확인하는 최초의 일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극도로 흥분한 일본외무부상 송일국에게 "일본 오지마?"

일본의 외무 부상(차관)이 독도 수영 횡단으로 화제를 모은 탤런트 송일국의 일본 방문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야마구치 쓰요시 외무 부상은 이날 한 민영방송에 출연해 독도 수영 행사에 참석한 송일국에 대해 “미안하지만 앞으로 일본에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면서 “그것이 일본의 국민감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보란 듯 일본의 위성TV인 BS닛폰과 BS재팬은 지난 21일 첫 방영하려던 송일국 주연의 한국 드라마 ‘신이라 불린 사나이’의 방송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에 대해 배우 송일국은 지난 24일 오후 9시20분께 자신의 트위터(?@songilkook)를 통해 "일본 외무차관 '송일국, 미안하지만 일본 못온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냥 내 세 아들 이름이나 불러봅니다. 대한, 민국, 만세!" 라고 밝혔다.


이는 이날 일본의 외무 차관 야마구치 쓰요시가 광복절 기념 독도 수영으로 화제를 모은 송일국을 향해 "앞으로 일본 방문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올린 글이다.


지난 3월 세 쌍둥이를 품에 안은 송일국은 아들들의 이름을 대한, 민국, 만세로 지어 화제를 모았다.


송일국은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가수 김장훈, 밴드 피아, 한국체육대 수영부 학생 40여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 죽변-독도 간 직선거리 220㎞를 릴레이로 수영했다.


늦었지만 잊지말자 국치일,

민주통합당 백재현 의원(광명갑)은 지난 6일 경술국치일과 남북화해 기념일 등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국가기념일 등에 관한 법률안’과 ‘지방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다고 밝혔다.


국가기념일에 관한 법률안은 ‘경술국치일’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우리 국민이 근현대사를 바로 인식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올바로 가늠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또 남북간의 민족 분단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정성으로 이뤄진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북화해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해 마련했다. 국민의식 속에서도 지워지고 말았다.


왜 국권이 상실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고, 단순한 뉘우침에서 나아가 국력신장과 독립정신, 그리고 세계열강에 진입하려는 구름판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인 일본과는 이미 수교가 이뤄져 우호관계에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국치일은 꼭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시민단체나 언론에서 국민적 관심으로 다시 기억하는 행사를 벌여 후세대에 이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건물에 조기 또는 반기를게양하고 검정색 넥타이를 착용하여 순국선열의 거룩함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한일전 축구보다 독도전 초읽기

군당국이 9월 7일부터 독도방어훈련을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최종 실시 여부는 내주 관련부처 협의에서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의 한 소식통은 25일 "해군이 9월7일부터 3박4일간의 일정으로 독도방어훈련을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면서 "이 훈련의 최종 실시 여부는 내주 열리는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도방어훈련은 연 2회 실시하는 통상적인 훈련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30~100여명 규모로 훈련에 참가했던 해병대는 헬기로 독도에 상륙하는 훈련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1함대사령관이 모든 과정을 주관, 통제한다.훈련에 참가하는 전력은 해군의 3200t급 한국형 구축함과 1800t급 호위함, 1200t급 잠수함, 해상초계기(P-3C), 3000t급 해경 경비함 등이 참가한다. 공군에서는 F-15K 전투기 등이 참가할 예정이다.


이 전력들은 가상 적성 선박이 독도 영해를 침범하는 것을 상정해 정보 입수 단계부터, 상황 전파, 식별을 거쳐 해군과 해경, 공군이 합동작전을 펼쳐 퇴각시키는 시나리오로 진행한다.


군 관계자는 "최근에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군당국이 독도-이어도 함대 창설을 계획중이며 앞으로 한반도 주변 해역을 둘러싼 관련국들 간 '파워 게임'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은 올해 방위백서에서 독도의 관할부대까지 명기했다. 평화헌법에 근거해 국가간의 교전권(交戰權)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근거를 교묘히 없애고 독도에서 한일간 민간인들간에 충돌이 벌어지는 경우에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방위백서에 명기한 독도관할부대는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舞鶴)항에 주둔한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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