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잡는 말씀보다 마음 찌르는 한마디 ‘○○○어록’이 뜬다
어록 전성시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 제252호 | 20120108 입력
“항상 갈망하라, 항상 무모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출간 두 달여 만에 50만 부라는 기록적 판매고를 올린 스티브 잡스. 이 책을 번역·출간한 민음사 장은수 대표편집인은 “잡스가 생전 남긴 이 한마디의 파괴력 덕분에 50만 부가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잡스가 사망한 후 각종 매체와 인터넷 등에서 이 말이 수없이 되풀이됐다.대단한 홍보 문구를 내세울 필요 없이 사람들 뇌리 속엔 이 한 문장과 더불어 잡스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IT 풍운아’ 잡스의 삶을 명징하게 압축한 한 문장이었다.
명언집은 서점가에서도 인기다. 대표적인 게 ‘잡스 어록’이다. 잡스 타계 직후 '스티브 잡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말들''I Steve''스티브 잡스 어록' 등이 잇따라 출간됐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정말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기회는 고작 두세 번에 불과하다” “종착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여행 도중에 얼마나 즐거운 일을 이루어냈느냐다” “내가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등 그가 남긴 명언이 실려 있다. 사망 덕도 봤지만, 잡스 어록이 특수(特需)를 누린 데는 ‘어록 열풍’이 한몫한 건 분명하다. '이케다 다이사쿠의 명언 100선'을 비롯해 '365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어록은 주로 20~30대가 소비하고 전파한다. 이들에겐 기성세대가 읽었던 공자나 톨스토이 같은 위인보다는 지금 현실 사회 인물들의 ‘말말말’이 어록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어록의 유통망은 트위터 같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다. 이런 식이다. 지난해 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안철수연구소 지분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히며 “성공을 100% 개인화하는 건 문제가 있다. 기부와 나눔은 사회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후 박경철 안동 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은 “25.7%가 사실상 승리면 파리도 사실상 새다”고 말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투표율 25.7%에 대해 “사실상 승리했다”고 한 걸 비꼰 것이다. 이들의 발언은 언론 보도 직후 트위터에 올라 ‘안철수 어록’ ‘박경철 어록’으로 불리며 며칠 동안 수백 회 넘게 RT(리트윗·재전송)됐다.
소설 문장이 ‘어록’으로 인용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흥미로운 현상도 빚어졌다. 20만 부 넘게 팔린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독자들이 책에서 밑줄 친 문장을 트위터에 올리고, 이 내용이 돌고 돌아 책 판매고를 올리고 영화 판권까지 팔렸다. “미안해하지마,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야.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뻐”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등 이 작품은 “어록으로 가득하다”는 평을 들었다. 출판계에 “이러다 작가에게 ‘한 단락을 140자 이내로 써달라’고 주문하는 출판사도 나오겠다”는 농담이 돌 정도다.
‘○○○ 어록’은 대개 구어체에 짧고 감성적이고 강렬하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150만 부 베스트셀러 제목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롯해 “단 하루도 어제와 똑같은 날은 없었다. 다만, 내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살았을 뿐”(이외수), “대리운전으로 집에는 갈 수 있어도, 대리만족으로 꿈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조정민), “로마에 가면 돌멩이만 보인다. 모르면 그냥 돌멩이다. 그 역사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단순한 돌멩이가 아닌 것이다”(공병호) 등이다. 현대판 아포리즘(aphorism·지식이나 지혜를 포함한 격언이나 경구)이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먼저 멍하게 흘려버리는 조각들을 모아보자. 그다음 그렇게 모은 시간들을 절대 상투적인 일에 쓰지 말고 다른 데 써보자. 시간은 레고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트윗이다. 이것과 아포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록의 유행은 ‘위인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군주·가부장·지식인 등이 가졌던 권위가 해체되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얘기다. 위인전을 사서 보는 대신 자신들이 ‘명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어록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본다. 이런 점에서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행위다. 이화여대 함인희(사회학) 교수는 이를 ‘지위 권위(positional authority)’와 ‘개인 권위(personal authority)’로 설명한다. “예전엔 전통이나 지위가 자연적으로 부여해주는 권위가 있었다. 이젠 탈(脫)권위사회가 되면서 그런 지위나 자격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발언이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지금 내 처지를 대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내 마음에 강렬히 와 닿으면 권위를 인정해준다.”
두드러진 게 가수와 개그맨, 종교인 등이 현실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하고 젊은 층의 ‘멘토’로 불리는 최근의 현상이다. 지난해 말 520만 관객을 끌어들인 ‘완득이’의 교사 동주(김윤석)가 완득이의 멘토가 됐던 이유도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회의 ‘경량화(輕量化)’ 추세도 더해졌다. 이념과 지식, 의미 부여를 중시 여기는 386세대가 퇴장하고, 소위 ‘검색세대’라 불리는 20대가 부상했다. 장은수 민음사 대표편집인은 “어록의 유행에서도 긴 호흡보단 속도감, 진지함보다 위트와 감성을 중요시하는 세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대하서사가 아니라 지금 내 맘에 파고드는 ‘한 줄’을 소비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쓴 IT 미래학자 니컬러스 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인터넷이 흐트러뜨린 뇌에서 나온 파편화된 글쓰기’의 영향인 것이다.
이러다 보니 기성 지식인들의 ‘뜬구름 잡는 얘기’는 젊은 세대와 점점 더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 등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편안하고 쉬운 구어체로 피부에 와 닿는 주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닥치고 ○○’식으로 패러디되면서 또 하나의 어록이 됐다. 지식사회도 소위 ‘담론의 예능화’라 할 만한 이런 신호를 눈치챈 듯하다. 철학자 강신주는 지난해에 철학을 자기계발서 스타일로 풀어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내 호응을 얻었다. 출판 칼럼니스트 한미화씨는 “현실이 고단한 젊은이들은 더 이상 현실과 괴리된 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스스로 어록을 선택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멘토를 선택한다. 인문학자들도 젊은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형식으로 다가가야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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