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

 

가소성’,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원래는 탄성한계를 넘는 외부의 힘이 작용하여 형태가 변한 물체가 외부의 힘이 없어져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물질의 성질을 말하는 물리학용어이지만, 뇌과학에서는 외부 자극과 환경의 변화로 초래되는 뇌의 기능과 구조의 변화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 변화의 결과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뇌는 변화하는가? 자극이나 상황에 의해 뇌기능은 물론 쉽게 변화된다. 그러면 뇌기능의 변화는 뇌의 구조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초기 성인기가 되어 뇌성장이 멈춘 다음에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뇌가 변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뇌의 구조가 변화되려면 뇌졸중이나 뇌손상, 중독, 치매 등의 병적 상황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970년대 개발된 PET(양전자방사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촬영)로 뇌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특히 1992년 개발된 fMRI(기능적자기공명영상촬영)로 뇌의 변화를 실시간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뇌는 기능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소성을 설명할 때 흔히 드는 대표적인 예는 영국 런던에서 블랙캡(Black Cab)이라 부리는 고급택시 운전기사와 관련된 것이다.


블랙캡의 운전기사는 우리나라 택시기사와는 다른 모양이다. 블랙캡의 기사가 되려면 런던 중심가에서 반경 10Km 안쪽의 무수히 많은 작은 거리에 대해서 다 외우고 있어야 할뿐더러, 두 지점 간에 가장 빠른 지름길까지 다 꿰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데 약 3년간의 혹독한 수업이 필요하고, 그 기간 동안 지원자의 3/4은 중도에 포기한다고 한다. 시험에 통과하여 합격하면 보통 택시기사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거리에 대한 학습(시공간적 학습)을 많이 한 택시기사의 뇌를 MRI 촬영을 해보니 일반인에 비해 기억중추 중 하나인 해마(hippocampus)가 더 컸고,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더 컸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인 학습과 학습된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뇌를 자라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측두엽 내측에 위치한 ‘해마’라는 부위는 단기기억과 공간기억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억중추이다. 그런데 이 해마에 있는 신경세포는 스트레스 호르몬에 취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 호르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해마의 신경세포는 죽어 없어져 크기가 줄어든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해마는 일반인에 비해 20% 정도 작았고, 어려서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해마의 크기가 10%정도 작다고 한다. 해마가 작을수록 기억장애가 심하게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매 맞는 아내’나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들이 특히 건망증이 심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해마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뇌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정보들을 처리해야 하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아야한다. 현실에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동의 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내적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공황장애를 앓았다가 증상이 좋아져 약을 끊고 잘 지내던 환자가 다시 내원했다. 전망이 창창한 소기업에 다니는 환자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얼마 전 회사의 재무를 담당하는 자리까지 승진했다.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수금을 위해 거래처를 닦달해야 했다. 그러면서 불안이 악화되었다. 환자는 푸념하다.

“예전에는 사장님이 하시던 일인데 이젠 다 내가 해야 돼요. 사장님은 회사 일을 다 나에게 맡기고,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매일 골프나 치고 놀러 다녀요. 전처럼 회사에 신경을 안 써요”라고.

환자가 승진하면서 많은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 책임만큼 스트레스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중용하고 있는 사장에 대한 원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스트레스이다.

“사장님한테 화가 나 있군요. 사장님이 골프치고 놀러 다닌다고 회사에 소홀한 것은 아닐 거예요.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사장님이 당신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겨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당신의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해 훈련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설득했었다.

승진에 따른 책임, 과도한 업무 같은 외적인 스트레스는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학습의 기회로 삼고, 스스로 만들어 낸 스트레스는 ‘사장’이라는 역할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함으로써 긴장을 줄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이후 환자의 불안은 다시 나아져갔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 방송에서는 실물경기의 위축이 이제 시작이라고 하는데 벌써 여기저기서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병원에 오시는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하시는 분들 중의 상당수가 이미 경제적으로 곤란해졌고, 앞으로도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걱정한다. 전 사회적으로 불안과 긴장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도 경제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두가 힘든 시기인 만큼 잘 견뎌야 한다. 잘 견디려면 ‘위기’를 ‘실패’로 보지 않고, ‘위기 그 자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아 적당히 긴장하여 위기를 통해 자신을 더 강한 체질로 변화시켜야 한다. <Crisis>는 '분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Krinei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향후 몇 년이 지나 위기가 걷힐 때쯤이면 위기를 통해 성장한 자와 위기에 빠져 좌절한 자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분리될 것이다.


다윈은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종은 강한 종도,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이다”라고. 삶에는 항상 위기가 존재한다.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려면 변화해야 한다. 위기는 변화를 위한 좋은 기회인 것이다. 우리가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두뇌를 성장하게 할 수도 있고, 우리 뇌세포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08.11.17.

정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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