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리더는 없다. 윈스턴 처칠, 헨리 포드, 아이아코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영웅적 리더들도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뿐만 아니라 많은 인간적 결함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다만 세인들과 역사가 그들의 어떤 면에 보다 많은 초점을 맞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나라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영웅이 배출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도 영웅 만들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2002년 12월 22일 주요 신문에는 ‘삼성그룹 사상 초유의 실적, 이건희 회장, 치하와 덕담’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이병철 창업회장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 취임 15년 만에 매출액이 1백37조 원으로 10배, 세전 이익은 1천9백억 원에서 15조1천억 원으로 79배, 시가 총액은 75조 원으로 75배 늘어났으며, 삼성 전 계열사 중 적자를 낸 곳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거행된 신라호텔 만찬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삼성이 국내 정상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섰으며, 이 회장 승계 이후 질적·양적으로 그룹을 완전히 바꿔놓은 결실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사상 최대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이 “나는 10년 후에 삼성이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져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저려서 잠을 잘 수 없다”며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는 좋은 실적을 들을수록 겁이 난다고 했다. 아직 세계 초일류 기업까지 가야 할 길이 많은데 긴장이 풀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모두 승리에 도취돼 있을 때 “잘나갈수록 위기를 생각하라”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화두를 던진 것이다.

별칭 ‘수도자적 제왕’ 등 대외적 인정
이건희 회장은 한국 기업사의 신기록을 연달아 바꿔왔다. 취임 6년 만인 1994년 최초로 조 단위 이익을 실현했으며, 2000년에는 전 계열사 흑자에 힘입어 순이익 10조 원, 2002년에는 순이익 15조 원의 벽을 넘어섰다. 불가항력으로 여겨지던 소니의 시가 총액을 크게 넘어섰으며 브랜드 가치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일본 주간지 <도요게이자이>는 삼성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에 기인한다는 특집 기사를 실었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건희 회장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경영자가 없는 것이 일본 기업의 최대 약점이라고까지 평했다.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파이낸셜뉴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올해의 인물 100인’으로 꼽히는 등 해외에서 더 크게 조명받고 있다. <뉴스위크>지는 이 회장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수도자적 제왕(The Hermit King)’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소소한 일은 관여하지 않고 큰 줄기만 챙기면서도 실제로는 삼성그룹 전체를 움직였다. 무엇이든 삼성그룹에서 내려지는 중요 결단은 그의 몫이다. 하지만 결단을 내린 후 구체적인 시행에 따른 권한은 책임자에게 위임했다.
위대한 리더는 스토리텔링에 강하다. 이건희 회장 역시, 화려하지는 않고 밋밋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러 리더 중 한 명이다. 이건희 회장 리더십의 핵심은 바로 화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시의적절한 화두로 사람과 회사를 바꾸고, 그 화두를 통해 이제는 다른 기업과 사회, 국가까지도 바꿔가고 있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
1990년대 초반까지 삼성은 세계시장에서 ‘그저 그런 수준의 값싼 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인식됐다.
이 회장은 이를 탈피하기 위해 ‘양 중심’에서 ‘질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면서 회사 경영의 기본 틀을 바꿔나갔다. 이 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시작으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슬로건을 통해 관리의 삼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을 주창했다.
이 회장은 이를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제트기가 초음속 제트기로 넘어가려면 일반 비행기 부품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진 기업을 앞서려면 마하 1이 아닌 마하 2~3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서,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해도 좋다고 강조했다.
또한 R&D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R&D는 보험이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농부가 배가 고프다고 뿌릴 종자를 먹는 행위와 같다”라고 농부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자신의 책상 위에 삼성전자 제품을 일렬로 진열한 뒤 망치로 이를 하나하나 부수면서 “모든 것을 다시 만들라”고 경영진에게 호통치기도 했다.
기업에서 같은 물건을 만들더라도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일류 회사와 그저 평범한 수준의 물건밖에 만들지 못하는 이류 회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1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포츠 선수 사례를 들었다. 0.01초의 미세한 차이가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든다. 이처럼 1등과 2등의 차이는 엄청나다. 스포츠에서나 경영에서나 이는 마찬가지다.
이건희 회장은 미래의 삼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신수종사업을 고민하다 급격히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영원한 경쟁력은 폼 나는 신사업이나 탁월한 기술이 아니라 미래를 책임질 천재급 인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하에 “앞으로는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 사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는 화두를 꺼내 들었다. 그는 천재급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업무의 절반을 쓰겠다고 선언하면서 사장단 평가 기준에도 이를 40% 이상 반영하겠다고 강조했다. 핵심 인재를 발굴, 육성하는 것을 경영자의 최고 책무로 만든 것이다.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감 있어야
그렇다면 정곡을 찌르는 이건희 회장의 화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는 매년 수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과학기술 잡지를 숙독하며 첨단 기기를 분해하는 등 상상력을 마음껏 키우는 스타일이다. 무엇이든 일단 관심이 생기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웬만한 첨단 제품이 출시되면 곧바로 구입해 자택에서 직접 분해하고 재조립해보면서 기능을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평소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도 한 분야에 관한 책을 1천 권 읽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 관심분야에 대한 편집광에 가까운 몰입을 통해, 사물과 업(業)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을 취미처럼 즐긴다. 이와 같이 밤낮없이 파고드는 호기심과 집중력, 상상력이 탁월한 화두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장단과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한다. 이 회장은 선친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붓글씨로 쓴 “경청(傾聽)”이란 휘호를 받아 이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연구하고 고민하고, 경청하면서 화두를 정리하고 그 화두가 결정되면 끝없이 말을 쏟아 부으면서 모두가 공감하고 실천할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리더다.
이건희 회장의 최근 화두는 창조경영이었다. 삼성이 이미 세계 선두권에 진입해 있는 만큼 다른 기업을 벤치마킹하거나 모방할 수 있는 쉬운 길에서 벗어나 삼성만의 고유한 독자성과 차별성을 구현할 수 있는 험난한 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20세기와 21세기의 경영은 다르다.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지금은 품질에서 별 차이가 없다. 21세기에는 여기에 디자인·마케팅·R&D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창조적 경영으로 세계 일류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이제 창조경영이라는 화두는 삼성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 기업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초라 할 수 있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에 걸맞게 책임도 커지게 된다. 얼마 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건희 회장과 오늘도 초일류 기업 건설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삼성인들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화두이다.
(글로벌 CEO리더십의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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