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연평도 기습국지전으로 가슴 아품을 달래기 위해 존경하는 장군을 업적을 되세기고 싶다.

군인 본분을 교훈으로 삼을 상징인물이며 김정일의 눈치외 진보들의 표심으로 다음 대권 도전하려는 몰상식한 정치인들 장군의 노심초사와 수루에 혼자앉아 깊은 시름하며 나라걱정하는 모습을 상기시키고 싶다.아마도 임진왜란때 그 분이 없었다면 그때 일본놈들에게 100년을 지배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지난 10년동안 순수한 젊은 정년들의 군복무 단축을 미끼로 표를 얻고 타당성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주적개념을 삭제하드니 이제와서 당하는 결과,  되져뻐린 상감 밑에서 똘마니 노릇하든 00들, 정신 못차리고 대북사업을 정부를 배제하고 단독으로 하느니, 우리 군의 훈련이 자극하여 저들이 저질른 일이라고 지깔이고, 시민이 헌금한 돈으로 연평어린이에게  선물로 생생내다가 망신당하고도 뻐뻣이  헛소리하는  시쟁넘이 있는가 하면, 의무복인 군대 안갔던 넘들은 왜 현장에 가서 보온병을 포탄컵질라고 이렇쿵 저렇쿵하다가 개망신 당하는 작자 아가 있는등 한심한 정치님들

 가습이 답답하여 쓰다보니 무당이 굿할때 댓나무 흔들면서 씨부리듯이 한없이 나온네요. 이맑은 새벽정신에 쓸데없이 두들리고 있네요. 이만줄이고 존경하는 선배님의 업적이나 되 새깁시다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등나무 등, ㉠등나무')" on-mouseout=tooltip_off()>]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순신의 생애 및 성장과정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청소년기의 삶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중년기의 삶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 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이순신에 관한 일화

❶ 이순신 장군의 출생에 대해 이런 일화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변씨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꾼다.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의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 우리 가문에 또 손이 날텐데 이 손자는 앞으로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니라. 손자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순신이라고 짓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점을 쳐보니《길몽이다. 나이 오십이 되면 칼을 짚고 명장이 되리라》란 점괘가 나왔다 한다.
점괘대로 명장이 되려고 그랬는지 이순신 장군은 어릴적부터 전쟁 놀이를 즐겼고 놀 때마다 동내 아이들을 통솔하는 대장으로 나섰다고 한다.

❷ 1592년 5월 7일 옥포만에서 처음 왜적선과 마주쳐 첫 해전을 벌려 적함 27척을 격침시킨 이순신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적선 59척을 수장하여 버렸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 이라고 한다. 이 해전은 육지에서 왜적과 크게 싸워 이긴 행주산성 싸움, 진주싸움과 더불어 임진 왜란중의 3대첩으로 된다. 한산대첩이 있은 후 왜적은 바다로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북으로 진군하던 왜적의 육군도 그 기세가 움츠러들었다고 한다.

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피가 튀는 전란속에서도 노모의 수연상을 차려 드리는 효도를 잊지 않았다. 《효란 온갖 행위의 근본이다》란 격언이 있듯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이순신 장군의 위인됨을 어렵잖게 보아낼수 있다.
12척의 전선으로 왜적선 133척을 격파한 명랑 해전의 대승리는 7년에 걸친 임진 왜란을 종말짓는데 있어서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세계 해전 사상 11대 1이란 약세로 대 승전을 거둔 기록은 아직까지 없다고 한다. 여기에 관하여 이런 기재가 있다.
《 명랑 해협은 길목이 좁은데다 조수의 흐름이 빨라 대함대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바위돌에 거적을 씌워 군량으로 알도록 하고 또 왜적선을 걸어 넘어뜨리기 위해 물속에 쇠사슬을 늘여 놓았다.
조류를 타고 돌입해 온 왜적선은 아군의 12척 전함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함대는 조수의 힘을 이용할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왜적선은 반대로 조수를 안고 싸워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숱한 왜적선들이 바다물밑에 늘여 놓은 쇠사슬에 걸려 급한 조수의 흐름과 함께 전복되고 수장되어 버렸다. 》
명랑 해전의 승리는 이순신 장군의 호국 충정과 뛰어난 전략, 전술에 의한것이며 그의 휘솔하에 군사들이 용감하게 싸워 이루어진 대승이었다

 

이순신을 알려면 전투를 보아라!

 

- 30전 30승, 불패의 신화

 

 

1. 옥포해전     - 왜선  26척 분멸

2. 합포해전     - 왜선    5척 분멸

3. 적진포해전 - 왜선  11척 분멸

4. 사천해전     - 왜선   13척 분멸

5. 당포해전     - 왜선   21척 분멸

6. 당항포해전 - 왜선  26척 분멸

7. 율포해전     - 왜선  10척 분멸

8. 한산대첩     - 왜선  59척 분멸 , 왜군 8,980명 전사

9. 안골포해전 - 왜선  42척 분멸

10. 장림포해전-- 왜선  6척 분멸

11. 화준구미해전- 왜선  5척 분멸

12. 다대포해전 - 왜선  8척 분멸

13. 서평포해전 - 왜선  9척 분멸

14. 절영도해전 - 왜선  2척 분멸

15. 초량목해전 - 왜선  4척 분멸

16. 부산포해전 - 왜선  128척 분멸

17. 웅포해전     - 왜군 100명 사살

 

18. 2차 당항포해전

19. 오리량해전

20. 저도해전

21. 진해해전   =  31척 분멸

 

22. 장문포해전 - 조선수군의 일방적 공격

23. 영등포해전  - 조선수군의 일방적 공격

24. 2차 장문포해전 - 왜선  2척 분멸

25. 어란진해전 - 왜선  8척 도주

26. 벽파진해전 - 왜선  13척 도주

27.명량해전  - 왜선  31척 분멸,  90척 반파 도주

28. 절이도해전 - 왜선 50척 분멸, 50척 반파

29.장도해전 - 왜선  30척 분멸, 11척 나포

30.노량해전 - 왜선 450척 분멸   왜군 40,000명

이순신장군 어록

 

1.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8.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 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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