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은 마음의 소통을 없애고 지옥의 길로 들어서는 것”
근래 들어 ‘몸’은 남들에게 과시하는 어떤 스펙 같은 것이 돼 버렸다. ‘건강은 병원이나 헬스클럽에서 서비스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식틀 안에서는 ‘몸’이 자기 삶의 ‘현장’이라는 실감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실감이 사라질수록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간다. 실상 몸에 대한 우리의 이런 인식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가 않다. 몸과 정신(마음)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서양이론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서양도 몸과 정신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 동양철학에서는 이미 존재했던 인식틀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공동체 ‘감이당’(gamidang.com)을 이끌고 있는 고전평론가 고미숙(53)씨가 최근 펴낸 책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북드라망)은 ‘몸’에 대한 무관심과 터부가 갖가지 삶의 문제와 마음의 병을 낳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성형수술이 졸업이나 입학 선물이 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성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용인되는 사회 풍토에 대해 그는 “성형이 결국 마음의 소통을 없애고 고립의 길로, 지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유는 뭘까. 고씨를 서울 남산자락 필동에 위치한 감이당에서 만났다. 그의 관심사는 요즘 ‘동의보감’의 가장 큰 키워드인 ‘통즉불통(通則不痛·통하면 아프지 않다)’에 꽂혀 있다.
고미숙씨가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에서 한가로이 사유에 잠겨 있다. 그는 “인문학은 존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이라며 “운명을 바꾸려면 자신의 잉여물을 버리라는 사주명리학의 가르침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
사실 자신감은 조건없이 긍정하는 것이자 나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이와 달리 우월감은 남과 비교함의 산물이다. 그가 허준의 ‘동의보감’뿐 아니라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명희의 ‘임꺽정’ 등 고전을 통해 한결같이 탐구한 것은 우리의 삶이다. ‘자유’와 ‘행복’이라는, 어찌 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고, 또 누려야 하는 삶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동의보감’적 양생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삶의 비전’을 본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단지 병에 걸리지 않고 각종 수치가 정상이면 건강한 것인가? 어떤 삶을 살든간에?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그리고 이 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다. 존재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삶의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요컨대 건강이란 근원적으로 몸과 외부 사이의 활발한 소통을 의미한다.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그래서 몸의 탐구는 당연히 이웃과 사회, 혹은 자연과 우주의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여, 의학과 역학은 하나다. 그래서 의역학이다. 의역학이 21세기적 비전과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한의학 자체가 역학이라고 말한다. 한의학의 원리가 몸안에 역학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몸을 통해 우주를 보고, 우주의 흐름을 알아야 몸을 알 수 있다. 몸은 우주 기운에 감응하고 별자리 흐름과도 연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은 별개가 아니다. 몸의 병에 집중한 것이 ‘동의보감’이라면 몸의 리듬 같은 운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사주명리학이다.
“‘동의보감’ 잡병편을 공부하다가 사주명리학과 만나게 됐다. 잡병편은 ‘오운육기(五運六氣·하늘은 다섯 가지 기운으로, 땅은 여섯 가지 기운으로 돌아간다)’로 시작한다. 그걸 따라가려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육십갑자를 사람의 인생에 적용하면 사주명리학이 된다. 물론 육십갑자의 이치를 통달하려면 아주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다 깨달은 후 ‘삶의 기술’로 쓰는 건 아니다. 한글의 원리를 다 터득한 다음 한글을 쓰는 게 아니고, 디지털의 오묘한 이치를 깨친 다음에야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앎의 향유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이다. 음양오행론 혹은 사주명리학은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습속이 있다.”
그는 ‘동의보감’과 ‘열하일기’를 연계시키기도 한다. “연암의 이용후생은 정덕(正德)으로 귀환한다. 정덕이란 말 그대로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용후생이 문명적 진보를 뜻한다면, 정덕은 존재의 자기구현과 우주적 소통을 의미한다. 삶이란 어떤 경로를 거치든 반드시 이 무형의 가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유와 행복이 없다면 문명과 제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물질적 풍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의 트리아드! 이것이 곧 ‘삶의 비전’이다. ‘동의보감’ 식으로 말하면 양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생은 생명의 정·기·신(精氣神)을 자양하는 수련법이다. 다름아닌 유불도(儒佛道)의 수련법이다. 사회적 윤리를 닦는 수양과 원초적 불안(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수행, 그리고 몸을 수련하는 것이다. 양생을 위해선 수양·수행·수련이라는 ‘세 바퀴’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좋은 삶’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다.”
그는 심지어 소설 ‘임꺽정’에서도 ‘몸’ 코드로 산 등장인물들에게서 유불도의 사상사 지도를 읽어내고 있다. 대표적 인물로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를 꼽는다.
“지식인공동체 내에서도 외모·학벌·나이·교양·스펙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루 일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성(컨디션)이다. 몸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에게 인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알고 세계를 알면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지고 그 자유의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존재의 충만감을 느낀다. 그것이 행복의 실제 내용이다. 인문학은 바로 이 자유와 행복을 위한 앎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20세기 이래 인문학은 늘 위기였다. 사람들의 욕망은 언제나 기술과 자본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그 결과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빈곤이라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 계속 부와 기술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씨는 10여 년 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를 이끌었다. 3년 전부터 시선의 축을 동양적 사상으로 옮겨가면서 수유너머를 떠나 지금은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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