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의 <동의보감>, 미래가 숨어 있었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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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시 읽고 쓴 책 <동의보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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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몸. 지난 10여 년의 공부와 활동이 내게 던져 준 새로운 키워드다. 이 키워드들은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앎의 배치로 인도해 주었다. 인간은 앎을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 그러니 앎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병을 탐색하는 것도, 몸을 바꾸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병에 대한 탐구가 몸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는 그 즈음, 운명적으로 <동의보감>을 만났다.(책머리에, 9쪽)

스스로를 고전평론가로 칭하면서 독특하면서도 거침없는 독법으로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고미숙은 앎의 구조를 바꾸는 길목에서 <동의보감>을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술회한다.

고미숙이 다시 읽고 우리에게 펼쳐준 <동의보감>은 단순히 한의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었다. <동의보감>은 그동안 질병과 약재, 처방전이 담긴 방대한 의학서적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에는 몸과 생명, 그리고 자연과 우주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또한  의학과 철학, 문학과 서사와 글쓰기가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보여주는, 생명력이 아주 넘치면서, 재미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고전이었다.

<동의보감>을 통해 고미숙은 몇 가지 독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먼저 생명은 아파야 산다는 것이다. '질병이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라는 거다.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 질병이라니! 말하자면 불완전, 불균형, 불확실한 조건들이 도리어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하는 이 역설이 생명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물리학적으로도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고, 태양이 도는 길인 황도 역시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런데 지구가 기울어지지도 않고, 황도 역시 온전한 원형이라면 생명체 자체가 존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데, 그 이유는 불균형은 차이와 균열을 가져오고, 차이와 균열은 생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와 열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언사들은 우리가 질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근원적으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비록 천지가 우주적 결함 속에 돌아가지만, 이 위대한 결함이 없었다면 이 땅에 인간을 비록한 모든 생명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형 상태란 곧 정적과 죽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어긋남이, 기울어짐이, 울퉁불퉁함이 생명을 만들어낸다.(3장, 133쪽)

두 번째는 <동의보감>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제시하는 양생이란 무병장수의 '은밀한 비결'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배려의 기술'로 보는 것이다. 즉, 양생술이란 외부적으로 주입되는 의술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삶의 기술'이고 소통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성욕도 도덕적 금기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으며 조절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조절을 하려면 수련, 수양,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유불도(儒彿道)의 삼교회통의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양생이 무슨 고원한 방식을 추구하거나 특별한 사람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땅에 침을 뱉지 않는 것, 술을 취하게 마시지 않는 것, 이를 딱딱 맞부딪치는 고치법, 맨손체조, 식후 100보 걷기, 생각은 적게 몸은 많이 움직일 것 등 평범하기 그지없는 양생법도 있는데, 사실 일상을 떠난 도란 도리어 혹세무민이며, 일상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의 활용이 아니던가.

또한 중요한 것은 <동의보감> 내경편의 하이라이트인 인간의 오장육부를 자연의 순행과 연동 짓는다는 것이다. 천지는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고, 이 기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처음 음양이 분화되며, 음양이 다시 다섯 가지 스텝으로 변주하는 것이 오행이다. 이름하여 목화토금수. 이 리듬에 따라 간심폐비신을 배열하며, 이런 자연과 인간 장부의 관계에 따라  몸과 질병을 살핀다는 것이다. 병을 이러한 상생상극이란 관계의 파노라마 속에서 찾으며 그 계열들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치유의 원칙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의 끊임없는 관계성은 암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암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인 세포인데(<내 몸 사용설명서> 327쪽) 이웃세포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자신만을 증식하는 세포가 곧 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소통능력이 중요하다는 것. 곧 내가 늘 소통하고 있는지 불통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이고, 소통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것이 암의 불통, 집착, 욕망과 결별할 수 있다고 했다.

<동의보감> 마지막 장에서 고미숙은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부분의 전개가 '보감(보배로운 거울)'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우선 고미숙은 임신에서 출산까지 모든 과정에서 의사가 개입하는 상황에 대해서, 성차별에 그토록 민감한 여성들이 왜 그토록 무관심하냐고 일갈한다. 이런 의학적 배치 속에 여성의 몸은 대상화되고, 내 몸을 나에게서 소외시키고, 평생 동안 자기 몸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포태와 출생 그리고 성장의 과정에 대한 고미숙의 견해는 경이롭고 아름답다. 출생 과정에서 아기 또한 탄생의 주역이며, 무엇이든 부모와 아기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전한다. 성장에 있어서도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원리를 제시하는데 정말 이 시대 아이 교육의 약방문이라 할 만하다.

<동의보감>에서는 무엇이나 빨리 터득하면 성품이나 기질, 수명 등에서 매우 불리하다고 보았다. 사람이 동물처럼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은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며, 많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이루어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동의보감>에서도 이런 이치를 극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결국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한다는 <동의보감>은 이렇게 다시 고미숙의 필력과 독법으로 되살아났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배움의 한 갈래로 <동의보감>을 만나는 것은 부제에서 보듯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소중한 과정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동의보감>도 만났으며, 고미숙도 만났다. <동의보감>은 오래된 우리의 미래임을, 고미숙 또한 곧 내 존재를 비추는 거울(보감)임을 알았다.

대통령 선거로 사회 전체가 출렁이는 광장에서, 몸의 문제로 천착해 들어가는 게 어찌 보면 개인적 차원의 국소적 회귀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몸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있으며, 몸의 현존을 벗어난 어떠한 이론과 이념도 모두 공허한 것임을 우리는 지난시기의 경험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사회든, 국가든, 공동체든, 모두가 '습관의 거처'인 몸의 부딪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만 통찰해도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해지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이냐 서양의학이냐 혹은 대체의학이냐 이런 문제는 사실 부차적이다. 이미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이전에 '앎의 의지'를 작동시키는 것이 더 우선이다. <동의보감>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비전은 바로 여기에 있다. 허준은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자기 병을 알아 스스로 치유해 가라고, 또 양생술을 통해 요절할 자는 장수하고, 장수할 자는 신선이 되라고.(에필로그, 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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