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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大王(통일대왕) 문무왕 추억
  
   저는 경주와 가까운 부산의 국제신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주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발굴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1973년 여름에는 155호 고분의 발굴이 있었는데 천마도가 그려진 말의 배가리개와 금관장식들이 나왔습니다.
  
   이 고분은 그 뒤 천마총으로 이름지어졌고 그 내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경주를 여행한 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불국사나 석굴암을 구경한 적도 엄청 많습니다만 이번에는 신라통일이란 하나의 話頭(화두)를 갖고서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맨처음 가본 데는 金庾信(김유신) 장군의 묘였습니다. 김유신 묘로 가는 길은 西川(서천)이라 불리는 하천을 따라난 길인데 興武路(흥무로)라고 불립니다. 김유신은 죽은 다음 흥무대왕이라고 추존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딴 거리는 봄에는 양쪽에 진달래가 피어 있고 가로수가 정열하여 아주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김유신 묘는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 위에 있는데 뒤 동산에 있던 소나무숲이 불에 타버려 경관을 다소 해친 적이 있었습니다. 김유신 묘의 둘레에는 護石(호석)과 돌난간이 놓여 있습니다. 이 護石이 유명한데 12지신상, 즉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 동물이 사람처럼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는데 우스꽝스럽고 평화롭게 보입니다.
  
   신라통일의 3傑(걸)이라고 하면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대왕을 꼽습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부인, 즉 문무왕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이 됩니다. 한편 김유신은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의 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김유신쪽에서 보면 태종무열왕은 처남이자 장인이고 태종무열왕쪽에서 보면 김유신은 손위 처남이자 사위가 됩니다. 이런 이중의 혈연관계로 해서 삼국통일의 이 세 주인공 사이에는 강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역사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권력을 놓고 벌이는 피도, 눈물도, 혈연도, 인정도 없는 암투와 음모와 살육극에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것은 원래 저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삼국통일의 세 주인공,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대왕, 이 세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음모, 암투, 시기, 질투, 살육극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삼국통일의 사령탑에서 있었던 이런 신뢰와 人和(인화)가 바로 3국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에 성공한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김유신의 무덤을 구경한 뒤 한 2km를 달려서 선도산 아래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으로 갔습니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는 누구의 능인지 모르는 것이 거의 다입니다. 1970년대에 발굴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도 금관이 나와 왕릉임이 분명해졌지만 글자가 한 자도 나오지 않아 누구 무덤인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匿名(익명)의 정열을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태종무열왕릉은 그러나 능 앞에 비석이 있어 주인공이 확실하게 밝혀진 희귀한 왕릉중 하나입니다. 승용차만한 돌거북이 머리를 딱 치켜들고 昇天(승천)할 듯이 용을 쓰고 있고 그 위에 비석이 얹혀 있는 이 태종무열왕릉비는 국보25호입니다.
  
   거북이가 힘을 쓸 때는 목이 붉어진답니다. 그래서 이 돌거북상에는 붉은 돌을 사용하여 그 붉어지는 목부분을 표현했습니다. 삼국통일의 勇躍(용약)하는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은 이 돌거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듭니다. 예술품은 항상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그 시대정신을 표현합니다.
  
   통일신라기에 만들어진 부처상이나 사찰, 무기류와 장신구가 한결같이 강건하고 기백높게 보이는 것도 그런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종무열왕릉 뒤로는 네 기의 왕릉급 고분들이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 고분군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양쪽 능선의 한가운데 언덕을 따라 앉아 있는 고분군이 좌우 대칭형을 이루면서 기가 막힌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최고 명당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고 구도가 완벽하다는 감탄을 자아내는 곳입니다. 저는 공원화되어 있는 이곳을 한 바퀴 걸었습니다. 먼데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이 보이고 고분의 비탈면을 따라서는 노란 꽃들이 살랑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무덤들이 태종무열왕능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金씨 성을 가진 왕 또는 왕족으로서 태종무열왕의 조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후에 이 서라벌을 주름잡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 지하의 金씨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든지 통일조국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후손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빌고싶었습니다.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은 외교에 능했던 이였습니다. 생김새가 아주 귀하게 보여 敵國(적국)에 가서도 인간적 호감을 사는 이였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힘만으로는 삼국을 통일할 수 없고 외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힘을 빌기 위하여 김춘추는 일본, 고구려, 당나라를 두루 방문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퇴짜를 맞았고 고구려에서는 일시 포로가 되었으며 唐(당)나라에서 비로소 당태종으로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치자는 승락을 받았습니다.
  
   외교는 김춘추, 군대는 김유신,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19세기의 프러시아였습니다. 鐵血(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외교를 맡고, 몰트케 장군이 군대를 맡아서 독일통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몰트케보다도 비스마르크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兵權(병권)을 쥔 2인자로써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을 모셨고 일흔아홉에 죽을 때까지 통일大業(대업)에 매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스마르크처럼 늙어서 황제에게 버림받는 수모를 겪지 않았습니다. 김유신은 죽을 때 유언으로써 태종무열왕이 자신을 믿고 하자고 하는 일을 다 맡겨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는 말을 남겼습니다. 밑고 맡기는 인간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김유신을 평하면서 신라가 김유신이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김유신도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가, 또 임금이 아래 재상이 하자는 대로 다 맡겨놓고 그 재상은 분골쇄신하여 맡겨준 임무를 완성했다는 것, 바로 여기에 신라통일의 인간관계학적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김유신이 죽을 때 찾아온 문무왕에게 한 유언은 통일三傑(삼걸) 사이의 인간관계를 짐작하게 합니다.
  
   태종무열왕릉 건너 편에는 비교적 작은 무덤이 하나 있는데 金仁問(김인문)의 묘입니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당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했습니다. 신라에서보다는 당나라에서 더 오래 살았습니다.
  
   당나라 황실과 친했고 명필이기도 하여 태종무열왕릉비의 비문을 썼습니다. 김인문은 마음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좋았다면 별 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를 도와서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백제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까지도 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서 백제, 고구려를 친 것은 당태종이나 고종이 워낙 마음씨 좋은 아저씨라서 불쌍한 신라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일단 한반도에 들이민 다음에는 신라까지도 먹어치우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음모는 비난할 것도 없습니다.
  
   이 지구가 생긴 이래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생명을 바쳐서 남의 나라를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나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제, 고구려를 함께 칠 때까지는 당과 신라의 관계는 우방국으로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당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평양에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신라까지 복속시켜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을 때 김유신과 문무왕은 당과 결전을 결심하게 되고 唐에 있던 김인문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唐은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멋대로 지명하여 형인 문무왕과 싸움을 붙이려고도 했습니다만 김인문은 이를 거부하고 문무왕도 동생의 처지를 이해하여 당나라가 희망했던 대로의 내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인문은 唐에서 죽었는데 당에서 그 시체를 호송하여 주어 고향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신라왕실의 이런 단합에 비교해서 백제와 고구려는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백제 의자왕은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했으며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갈아치우는가 하면 그가 죽자 아들끼리 권력투쟁이 일어나 자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삼국통일을 하든지 남북통일을 하든지 통일주체세력은 먼저 자신의 가정, 사회, 국가부터 단합시키고 통합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태종무열왕릉과 김인문의 묘를 둘러보고는 감포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택시를 대절하였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아주 친절하고 운전도 얌전하게 하여 안심을 하고 관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감포로 가는 길은 토함산의 북쪽 능선을 넘어서 동해안쪽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경주시민 27만명이 마시는 수원지 덕동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는 호젓한 산길은 아주 정취가 있습니다.
  
   감포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축대를 쌓은 것 같은 건물터가 있고 여기에 감은사지와 두 석탑이 있습니다. 건물 한 채 없는 허허로운 공간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석탑은 아주 멋진 대칭을 보여줍니다. 왼쪽으로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는 이 절은 문무왕이 착공했지만 생전에는 준공을 보지 못했습니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완공하여 절 이름을 感恩寺(감은사), 즉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이 감은사지의 두 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해체했다가 복원하는 과정에서 탑신안에서 청동제 사리함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감은사지 앞에는 바다로 흘러드는 大鐘川(대종천)이란 냇물이 있습니다. 大宗川, 즉 큰 종이 지나간 내란 뜻의 이름이 붙은 사연이 있습니다. 서기 1238년 몽골기마군단은 경주에까지 쳐들어왔습니다. 황룡사의 구층탑을 불태운 그들은 황룡사에 있던 큰 종을 배로 실어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이 종은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네 배나 컸다고 합니다. 이 종을 운반하기 위하여 大宗川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종을 실은 배가 뜨자 풍랑이 일어나 침몰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면 지금도 海底(해저)의 大鐘(대종)이 운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최신탐사기술을 동원하여 이 鐘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大鐘川이 바다로 들어가는 해변에서 한 200m쯤 떨어진 곳에 대왕암이 있습니다. 이곳은 옛날부터 문무왕이 죽은 뒤 화장을 하고 그 뼛가루를 뿌린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언론사에서 이곳을 탐사하고는 문무왕의 유골을 안치한 水中陵(수중릉)이란 주장을 제기하였습니다.
  
   화장한 뼈를 안치한 곳이냐 재를 뿌린 곳이냐 하는 것이 쟁점이 되어 있는데 어느 쪽이든 문무왕의 유언과 관계가 있는 바위섬인 것은 확실합니다. 문무왕은 죽을 때 이런 유언을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뉘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통합되어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치르는 절차는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문무왕의 이 유언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엄숙함이 있습니다. 왕이 죽으면 그 왕이 지하에서 생활한다고 하여 산더미 같은 무덤을 만들던 시대에 문무왕은 「그런 분묘 만들기는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고 못을 박아버립니다.
  
   요사이 갑자기 우리나라는 풍수니 명당이니 하면서 묘를 쓰는 것과 자손들의 흥망성쇠가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듯이 이상한 주장을 하고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1317년 전 이미 문무왕은 그런 짓의 허망함을 갈파하고 있으니 그는 비록 통일신라시대에 살았으나 20세기에도 빛날 근대적 정신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였습니다.
  
   저는 문무왕이 요즈음 참 좋아집니다. 王名(왕명) 그대로 문무를 겸전한 교양인이란 생각이 들고 깔끔한 분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삼국통일은 태종무열왕 때 시작되었지만 문무왕 때 마무리가 되어 문무왕이야말로 진정한 통일대왕입니다. 感恩寺와 大王巖(대왕암)을 잇는 이 유적지에 利見臺(이견대)란 곳이 있어 가보았습니다. 언덕에 있는 정자인데 대왕암을 내려다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견대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파식적은 이 풍진세상의 온갖 파란을 없애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는 뜻입니다.
   감은사, 대왕암, 만파식적,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과 그 후손들이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유적이고 전설이란 점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사라졌겠습니까. 문무왕은 피로 피를 씻는 통일전쟁을 해낸 신라 백성들에게 미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덤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불태운 유골을 바다에 뿌려 죽어서 신라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맹세하였을 것입니다.
  
   문무왕이 자신의 유골을 불태워 바다에 뿌리게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무왕은 바다의 중요성을 안 왕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삭스라는 교수가 세계은행이 주최한 경제개발에 관한 학술회에서 발표한 논문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발전과 지리적 조건은 분명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몽골 같은 내륙국가와 열대지방에 있는 국가는 발전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습니다.
  
   30大 부자 나라 가운데 열대지방에 속한 경제단위는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아프리카의 모리셔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내륙국가의 최대 약점은 운송수단의 제약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수출을 하려면 철도, 차량 등 육상운송수단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선박을 이용한 운송보다도 돈이 엄청 많이 들기 때문에 경제성이 매우 약하다는 것입니다.
  
   선박운송이 얼마나 싸게 먹히는가 하는 것은 미국에서 이삿짐을 배로 부칠 때 태평양을 건너 인천까지 오는 경비가 인천에서 서울 자택까지 운반되는 경비보다 싸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三面(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몽골고원에 살던 우리 선조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이런 한반도에 정착한 그 안목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문무왕은 우리의 이 地政學的(지정학적) 조건을 잘 이해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왕자로 있을 때인 서기 660년에 당나라 원정군이 백제를 치러 올 때 신라水軍(수군)을 이끌고 서해로 나아가서 唐軍을 안내하였습니다.
  
   서기 663년에는 동양사의 흐름을 바꾼 白村江(백촌강)의 해전이 일어났는데 문무왕은 이 해전을 교훈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백촌강의 해전은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하여 왜의 조정이 400척의 대함대와 2만7000명의 원정군을 보내 지금의 백마강 하구에서 당나라 수군과 결전한 것을 이릅니다.
  
   이 결전에서 왜의 수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서기 676년 이번에는 신라해군이 당나라의 해군을 기벌포란 곳에서 섬멸합니다. 기벌포는 지금의 금강하구 장항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이해 겨울에 신라해군장수 시득은 당의 장수 설인귀가 지휘하는 해군을 기벌포에서 맞아 싸워 적의 머리 4000여급을 베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이 싸움은 당나라와의 통일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해군은 서해의 제해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서해의 제해권을 잃게 되면 당나라는 한반도로 원정온 唐軍에 대한 식량보급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육로로 서울 부근까지 식량을 운반할 수는 없으니까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신라가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보급로를 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당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신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이 완성된 서기 676년, 그 다음해 船部(선부)를 만들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해운항만청이나 해군사령부 같은 것을 독립시킨 셈입니다. 문무왕의 이런 해양정책에 힘입어 신라인들은 중국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중국 여러 도시에는 신라방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는 해외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일종의 租界(조계)였습니다. 장보고의 출현도 오랜 신라의 해양개척정신을 따른 것입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실에 가면 서기 5세기 후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와 배를 본떠 만든 토기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기마인물형토기의 인물은 높은 모자를 쓰고 있고 코가 서 있으며 정장을 하고 허리에 칼을 차고 말 안장에 앉아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신라의 지배층인 북방기마민족을 묘사한 조각일 것입니다.
  
   한편 배모양의 토기에는 뱃사공이 한 사람 앉아 있는데 코는 둥글고 작은 얼굴이며 옷을 벗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연안에 사는 토착어부로 보입니다. 이 두 토기는 신라의 문화를 형성한 두 가지 요소를 보여줍니다. 북방기마민족과 남방해양민족의 융합이 신라라는 매력적인 나라의 기본요소였을 것입니다.
  
   북방초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야성과 군사력, 그리고 남해와 서해를 주름잡던 해양민족의 개방성과 활달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경제력, 이런 것들이 한덩어리로 뭉친 곳에 통일신라가 존재했고 그것을 구현한 사람이 문무왕이었다는 것을 저는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利見臺(이견대)에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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