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가 없을까 

정영재 선임기자·김원 기자

왜 한국에는 나이키(미국)·아디다스(독일)·아식스·데상트(이상 일본) 같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가 없을까. 스포츠&비즈는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많은 전문가들과 업계 사람들을 만났다. 전망은 ‘잔뜩 흐리지만 갤 수도 있음’ 으로 나왔다.

▎르까프는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국내의 대표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성장했다. 사진은 르까프 모델 탤런트 이서진.
지난 6월 국산 스포츠 브랜드 ‘EXR’이 시장에서 철수했다. 젊은 층을 겨냥해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던 브랜드였기에 시장의 충격은 컸다.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다른 스포츠 브랜드들의 매출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인 아디다스코리아는 2014년(8101억원)보다 2015년 매출(8974억원)이 늘었다. 이탈리아 브랜드였다가 한국에 팔린 휠라도 매출이 소폭 증가했다. 왜 어떤 브랜드는 되고 어떤 브랜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보다 왜 한국에는 나이키·아디다스같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가 없을까?

매출이 하락세니 마케팅도 위축돼


▎휠라는 전세계 70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지난해 로열티로만 500억원 이상을 벌었다.
부산의 향토기업 화승이 만든 토종 브랜드 ‘르까프’가 30주년을 맞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탄생한 르까프는 국가대표 선수를 후원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국내의 대표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성장했다. 올해 르까프는 지난 30년간 출시된 제품과 역사를 담은 ‘히스토리 마케팅’을 전개하고, 여성 스포츠 전문 ‘팜므(FEMME)’ 라인을 출시해 더욱 감각적인 브랜드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기준에 따르면 지난해 화승의 매출액은 2363억원이었다. 데상트코리아(6490억원)의 절반도 안 된다. 더구나 올해 2월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고, 국내 생산공장이 베트남으로 이전해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도 만들 수 없다.

화승의 제품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강석권 이사는 “미즈노·아식스·데상트 같은 브랜드에는 일본인의 DNA인 장인정신과 오타쿠 기질이 녹아 있다. 일본 소비자들도 이를 알고 기다려 준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이 절대적으로 협소하고, 소비자들의 기호도 자주 바뀐다. 외형이 축소되니 마케팅과 제품 개발도 위축되는 악순환 구조에 빠져버렸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아디다스는 국내에서 9000억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렸다. 휠라는 8157억원이다. 나이키코리아는 2012년 유한회사로 바뀐 뒤 공시를 하지 않아 정확한 매출액은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2013년을 기점으로 아디다스가 국내 시장에서만큼은 나이키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고 본다. 휠라는 윤윤수 회장이 인수한 뒤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다. 2014년 7975억원이었던 매출이 2015년에는 8157억원으로 늘었다. 반면 토종 브랜드의 자존심이었던 프로스펙스는 하향세다. 프로스펙스와 스케쳐스 등을 생산하는 LS네트웍스의 매출은 2014년 8457억원에서 2015년 6912억원으로 떨어졌다.

김도균 경희대 교수는 현장 실무 경험을 갖춘 스포츠 마케팅 학자다. 그는 1992∼98년 나이키코리아 마케팅 팀장을 맡아 ‘나이키 3대3 길거리농구’를 빅히트시켰다. 그는 한국에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명쾌하게 짚었다.

첫째가 ‘스토리 부재’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남다른 창립 스토리를 갖고 있다. 나이키 창립자인 빌 바우어만과 필 나이트는 미국 오리건 대학 육상팀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었다. 둘은 선수들에게 고품질의 육상화를 공급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1964년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를 설립했다.

독일의 루디 다슬러와 아디 다슬러 형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신발을 만들기 시작해 각각 푸마와 아디다스라는 브랜드의 창립자가 됐다. 최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언더 아머도 메릴랜드 대학 미식축구 선수였던 케빈 플랭크가 ‘몸에 달라붙지 않는 스포츠 언더웨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언더 셔츠를 개발한 게 시초였다.

글로벌 브랜드엔 절박함·스토리 있어

이처럼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단순히 돈을 벌려고, 혹은 남이 하니까 따라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오랜 경험상 ‘이런 게 꼭 필요하다’는 절박함과 사명감에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절박함 속에서 남들이 안 가는 틈새시장을 발견했고, 그것이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져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우리 브랜드에는 그런 절박함과 스토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남윤주 블랙야크 홍보팀장의 말도 김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웃도어는 DNA가 중요하다. 창립자로부터 시작해 오랜 세월 다져온 지지 기반이 DNA다. 블랙야크는 수십 년 동안 산악회와 산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동지 의식’을 형성해 왔다. 아웃도어 시장이 커지고 돈이 된다 싶으니까 대기업에서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빠져나간다. 장수 브랜드에는 오너나 설립자의 기질과 고집이 녹아 있다.”

김 교수가 두 번째로 지적한 건 토종 업체가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자국에서 열린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미즈노와 아식스가 도약의 발판을 놓았고, 72년 뮌헨 올림픽 때는 아디다스가, 84년 LA와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을 통해서는 나이키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중국 당국이 리닝(LiNing) 브랜드를 키우려고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체조 스타인 리닝은 올림픽 개회식 때 스타디움에서 줄을 타고 날아와 성화에 점화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이는 전 세계에 방영됐다.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공식 스폰서 나이키를 제쳐두고 방송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게 리닝 유니폼을 입혔다.

이에 반해 우리는 세계 4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치렀다고 자랑하면서도 그 이벤트를 통해 스포츠 브랜드를 키우지 못했다. 프로스펙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스폰서였다.

이후 국내에서 나이키를 누르고 운동화 매출 1위로 올라서기도 했지만 곧 나이키에 따라잡혔고, 해외 진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로 국내 기업들은 손발이 묶였고, 반면 한국 축구대표팀 스폰서가 된 나이키는 2002 한·일 월드컵 광풍을 타고 시장을 평정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공식 유니폼 스폰서는 중국의 361°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도 우리 선수단은 미국 브랜드인 노스페이스 단복을 입게 된다. 김도균 교수는 “스포츠는 퍼포먼스가 중요하다. 보다 빨리, 멀리 뛰고 기록을 내는데 필요한 기능이 있다. 아웃도어는 ‘서바이벌’이 콘셉트다. 고산에서 얼어죽지 않기 위해 특수 원단을 사용하고 방수·방풍 등 각종 기능을 넣는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아웃도어 제품인 노스페이스를 입는다는 건 뭔가 맞지 않다”고 일갈했다.

남들이 좋다 하면 우루루 따라가


세 번째는 마케팅 전략의 부재다. 김도균 교수는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적합성·차별성·일관성이라는 마케팅의 3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브랜드는 세 가지 모두에서 세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브랜드도 자신들이 모든 종목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 나간다. 나이키가 육상과 농구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디다스가 축구를 파고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 브랜드들은 좀 된다, 소비자들이 몰린다 싶으면 우루루 따라가는 경향이 짙다. ‘우리가 왜 이 종목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지, 왜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화승의 강석권 이사도 이를 인정했다. “언더 아머가 성공한 건 아이템을 단순화하고, 정밀한 타겟층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아식스가 러닝 쪽에 집중하듯이 우리도 한 카테고리에 집중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소비자 기호를 쫒아가면서 너무 많은 걸 벌려놓았다.”

김 교수는 “양식이 한식을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이태리·프랑스의 고급 음식이 들어와도 우리 입맛을 바꾸지는 못한다. 스포츠도 그렇다. 스포츠 자체가 이미 우리 것이 아니다. 국산 브랜드의 적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권도복은 우리 제품을 입는 게 자연스럽고, 양궁은 ‘윈앤윈’이라는 국산 활이 세계를 석권했다. 태권도는 우리가 종주국이고, 양궁도 우리가 가장 잘 하기 때문에 적합성이 충족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브랜드가 급성장한 데는 세계 최고 스타를 활용한 인도스먼트(endorsement·후원계약을 통한 선수보증 광고) 전략도 큰 몫을 했다. 나이키는 지구상에서 가장 농구를 잘 하고, 화려하게 하는 조던에게 나이키 농구화를 신겼다. 조던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면서 소비자들은 ‘저 농구화를 신으면 나도 조던처럼 멋진 플레이를 할 수 있겠지’ 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아디다스가 리오넬 메시(축구)를, 푸마가 우사인 볼트(육상)를 활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더 아머는 나이키가 버렸던 스테판 커리(농구)를 비롯해 클레이턴 커쇼(야구), 조던 스피스(골프)라는 ‘3대 빅 샷’을 한꺼번에 후원하고 광고에 활용함으로써 나이키를 위협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국내 브랜드들은 성공적인 인도스먼트를 내놓은 적이 별로 없다. 프로스펙스가 2012년에 ‘김연아 워킹화’를 출시해 그 해 100만 족 이상을 팔았다. 그런데 이는 김연아의 지명도를 활용한 스타 마케팅이라고 봐야지 엄밀한 의미에서 인도스먼트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요즘은 스포츠 제품 광고에서도 스포츠 스타가 잘 보이지 않는다. 프로스펙스 모델은 탤런트 김희애, 르까프 모델도 탤런트 이서진이다. 휠라 홍보전략팀 김민정 차장은 “김연아·박지성 같은 특급 스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 매출 5000억원 이상의 브랜드를 끌고 가려면 ‘얼굴 마담’이 있어야 하는데 스포츠 쪽에서 찾기 어려우니까 연예인으로 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배드민턴·자전거 같은 틈새시장 노려야


▎장수 브랜드에는 오너나 설립자의 기질과 고집이 녹아 있다. 블랙야크는 수십 년 동안 산악회와 산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동지 의식’을 형성해 왔다. 지난 5월 1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에 성공한 김미곤 대장.
문제점은 어느 정도 짚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남들이 잘 한 걸 배우면 되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걸 키우면 된다. 이진영 아디다스코리아 부장은 “아디다스의 선전은 소비자의 트렌드 변화를 읽고 기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에슬레저(스포츠와 레저의 결합) 바람이 불면서 스포츠 웨어와 일상복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아디다스는 이 트렌드를 잘 파고들었다. 또한 걷기·마라톤·축구·농구 대회 등 소비자 참여 이벤트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아디다스 제품뿐만 아니라 스포츠 활동의 즐거움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프로스펙스의 손호용 홍보팀장도 같은 맥락의 얘기를 했다. “후발업체로서 급성장하고 있는 뉴발란스나 데상트에서 보듯 고객의 니즈를 빨리 읽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강한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프로스펙스는 워킹화를 업그레이드 할 예정이다. 또 운동역학 같은 R&D 영역에 중장기적으로 집중 투자해야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다.”

우리 것을 키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남의 것을 사오는 방법도 있다. 휠라는 전세계 70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지난해 로열티로만 500억원 이상을 벌었다. 휠라 김민정 차장은 “휠라를 인수한 뒤 R&D에 역량을 집중해 기술력을 강화했다. 또 국가별 체형이나 취향에 맞게 디자인이나 아이템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현지화 전략이 먹혀들었다”고 말했다.

아웃도어 브랜드인 블랙야크의 약진도 지켜볼 만하다. 블랙야크는 지난 2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세계 최대 스포츠 박람회인 이스포(ISPO 2016)에서 글로벌 부문의 황금상을 비롯해 총 11관왕을 차지했다. 블랙야크의 11개 부문 수상은 46년째를 맞은 이스포 역사상 단일 기업 최다 수상 기록이다. 국내 매출도 이미 5000억원을 넘어섰다.

남윤주 블랙야크 홍보팀장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시장은 한국 브랜드를 대놓고 무시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그런 시선이 바뀌었다. 꾸준한 기술 개발과 현지화 전략의 승리”라며 “친환경 소재, 스마트 제품이라는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 달려나갈 것이다. 유럽에 불고 있는 K 컬처 바람과 맞물려 마케팅을 강화한다면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도균 교수는 “나이키ㆍ아디다스가 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려야 한다. 동호인이 두텁게 형성된 배드민턴, 절대강자가 없는 자전거 등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이너 웨어 시장을 선점한 언더 아머처럼 스포츠 양말·헤어밴드·헬멧 등 구체적인 아이템을 정해서 지혜롭게 파고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도 스포츠 용품 시장의 잠재력에 눈을 떴다. 김용섭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산업과장은 “스포츠산업과 신설 3년 만에 예산을 1000억원 이상 확보했다. 스포츠 동호회 활성화가 용품 산업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 최근 체육계 큰 변화의 흐름이다. 스포츠 선진국이 되려면 ‘삼성 스마트폰’처럼 이름만 대면 전 세계 사람들이 ‘엄지척’ 할 수 있는 스포츠 브랜드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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