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감각이란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느끼는 것.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필요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된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는 말일까?결코 그렇치 않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차원에서 살펴보면 타인이 '무엇을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며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나약함' 에서 비롯된 공동체 감각…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공동체 감각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굴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 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지적했네."공동체 감각은 언제나 신체의 약함을 반영한 것이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인간은 그 신체적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를 만들고 협력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인간은 늘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간절히 원한다.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말한다. 자신의 공동체 감각을 발굴해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추구하라고.


인간관계의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공동체 감각은 아둘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의견이 분분한 이론이기도 하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 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 이다.


아둘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즉,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의 범위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 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것이다.

공동체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둘러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공동체 감각이란 행복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공동체 감각을 영어로는 ‘social interest’ 라고 한다. 즉 ‘사회적 관심’ 이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의 최소 단위가 뭐인 줄 아나? ‘나와 너’ 일세.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하네.

공동체 감각을 이해하려면 우선은 ‘나와 너’ 를 기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아.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 으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는 공동체감각에 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감각을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다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 지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만 과제를 분리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변화할수 있는 것'주목하는 것이 자기 수용이다.그래서 자기수용에는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는 커트 보크너트 작가의 말이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그저 '용기'(勇氣)가 부족할 뿐이다


타인신뢰는 타인을 친구라 여기고 타인을 신뢰하는 것이며, 여기서 배신을 할지 안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타자의 과제다.  그저 내가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만약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할 때,다시 말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일의 본질은 타자공헌'이다.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집안일 하는 것, 노동이란 돈의 수단만이 아닌 타인에게 공헌하고,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드린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행동목표>
1.자립할 것
2.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 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사람들을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위의 1항의 '자립할 것'과 '내게능력이 있다는 의식'은 자기 수용에 관한 것이고,2항의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과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은 타자 신뢰와 타자 공헌이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아들러는 간단하게 말한다.'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자신이 가치있음을 실감한다고....따라서 인간을 지금, 이 순간 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공헌감이라고 정의 한다.인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단 그때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 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고매한 목표를 잡고 마치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으로 생각한다.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은 인생을 등산으로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규정하는 프로이드의 원인론에 입각하고 인생의 대부분 길위에서 보낸다는 발상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고 찰라의 연속이다"라고 의견을 제시한다.지금 여기에 충실히 춤을 추듯이 찰라를 즐기는 마음으로 삶을 살다보면 문득 "여기까지 왔네"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등산의 목적을  정상으로 정하고 키네시스적 행위(이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운동)를 할 것이 아니고 ,정상이 아니고 등산하는 그 자체에 목적으로 정하고  에네르게니아 행위(실현해 가는데 초점)로 실행하는 동시에 존재,가치를 갖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여기서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피력한다.에네르게이아적 인생으로 지금 여기에 찰라의 연속을 진지하게 춤을 추면서 의미를 부여 하라는 것이다.


- 미움받을 용기-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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