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500년 역사 [ 中 ]
1910년 영국 최고의 골퍼 헤리바든은 레슨을 받아 본적도 없는 무명인에서
독학으로 최고의 골퍼가 되었습니다.
브리티시 오픈 6번의 우승과 메이져 대회 14번의 우승 헤리바든의 경기
출전은 당시 영국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던 슈퍼 스타급 골퍼였습니다.
현재도 이름 없는 대회에 슈퍼 스타를 초정하여 대대적인 광고를 하듯이
유명 스타의 참가는 상금을 떠나 주최측은 참가비만 수억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잡고있는 오버랩핑그립의 창시자로 영국에서는 아직도
바든그립이라 합니다.
1900년대 초 골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은 틀림이 없습니다.
1913년 헤리바든이 미국의 초청으로 진정한 골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
미국 대회에 참가합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프로 골퍼를 초정하는데 많은 돈을 지불합니다.
미국은 1913년 까지는 영국의 높은 벽을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국의 슈퍼 스타를 초청해 그냥 한 수 배울 요량으로 헤리 바든을 초청
합니다.
사진은 당시 미국 신문에 난 기사 입니다 바든 더 골프 히어로란 글자가
타이틀로 써 있네요..ㅎㅎ
1913년 헤리 바든의 미국 원정 경기의 사진입니다.
뒤편에 겔러리들이 바든의 퍼팅을 보려고 수만은 인파가 안전선 밖에서
지켜 보는 군요.
바든의 미국 원정은 미국 골프 마니아들의 최대 축제가 되었습니다.
헤리바든의 충격~~!!!!!
헤리바든은 당시 골프의 신으로 명성을 얻은 골퍼인데 원정 경기에서
20살 신참 아마추어에게 비참히 무너 졌습니다.
1913년 9월 20일 미국의 노동자 캐디 출신 [프랜시스위멧 ] 당시 20살의
풋내기 아마추어 골퍼에 2타차로 지고 말았습니다.
위멧은 캐디로 일하면서 밤에 몰래 일하는 골프장에 숨어 들어가 혼자 독학으로 프로가 되었습니다.
프랜시스위멧의 그날 경기는 미국이 영국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은 날이기도 합니다.
위멧의 경기후 1913년부터 2010년 오늘날까지 미국이 골프의 주도권을 잡게 된 미국 골프의 독립일 이기도 합니다.
구지 비유를 한다면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10 대 0
으로 이긴 상황과 같은 기적같은 상황이라 생각 됩니다.
이 한 경기로 헤리바든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영국 골프 역사에 충격적인 날로 기록이 됩니다.
위멧의 기적같은 승리 후 미국의 골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 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28대 미국 대통령인 윌슨도 골프광으로 백악관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든 골프광이 였습니다.
아침 마다 골프를 치며 운동을 하였지만 엄청난 슬라이스와 함께 핸디캡(43) 아쉽게도 윌슨은 총 타수 115타 아래로 내려가지 못 했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칼라볼의 시초로 골프 역사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윌슨의 샷은 슬라이스가 엄청나 공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눈이와도 공을 쳤으니까요 수행원들은 윌슨의 공을 빨리 찾기위해 골프볼에 빨간색 페인트 칠을 하게 되었습니다.
컬러볼의 시초가 이렇게 생겨 났군요 ㅎㅎ
1918년 월터 헤이근이 등장하면서 프로골퍼의 위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
니다..
헤이근은 보통 실력의 드라이버 스윙과 아이언 스윙을 구사 했습니다.
다시말해 프로의 샷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의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많이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퍼터는 당대 최고였습니다.
(장타 드라이버도 한타고 퍼터도 한타란걸 공 좀 치는 사람은 아실겁니다.
가끔 필드에서 봅니다 엉망의 스윙이라 내기 한번 할까요 하면 좋다고 하죠 만만해서 이기겠다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결과는 참담 합니다. 그렇다 할 스윙도 아닌데 퍼터가 일 품인 아마추어 이기 때문이죠 ㅠㅠ)
헤이근의 일화로 나는 말이야~ "파4에서 3번에만 그린에 올리면 무조건 원 퍼팅이면 끝이야 그럼 파 잖아!~~(맞는 말이네요)"
일화에서도 나오듯 월터 헤이근은 퍼터의 황제 였습니다. 30야드 퍼팅도
원퍼팅 40야드 퍼팅도 대부분 한번에 홀에 빨려 들어갔으니까요.
이때 까지만도 프로 골퍼는 클럽 하우스에 못 들어 갔습니다. 프로 골퍼는
식사도 잔디 여기 저기서 노동자 처럼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영국에 간 헤이근은 그런 룰을 깨기위해 클럽 하우스 앞에서 대형 식탁보를 펴 놓고 턱시도를 입고 은 쟁만에 음식을 담아 놓고 밥을 먹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영국 신문에 헤이근의 사진과 함께 대서 특필이 되었고
헤이근은 이날 브리티쉬 오픈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헤이근의 은쟁반 퍼포먼스와 우승을 기념해 이때부터 프로골퍼가 클럽 하우스에 입장하게 되었습니다.
헤이근은 영국 메이져 대회인 브리티쉬 오픈에 최초의 미국인 우승자로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의 인기는 은퇴후 골프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하며 영화 배우로도 인기를
누립니다.
월터 헤이근같은 프로 골퍼가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아마추어 골퍼로 이름
을 날린 위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비존스라는 전설적 골퍼입니다.
바비존스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진정한 아마추어의 모범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당시 많은 골퍼들은 " 골프는 명예로운 스포츠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 되서는안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였으니까요"
1923년 아마추어 자격으로 US아마추어오픈에 참가해 우승을 합니다.
전문 골퍼가 아닌 취미로 골프를 연습한 바비존스의 우승은 많은 아마추어
골퍼들의 환호를 받으며 스타로 급 부상하게 됩니다.
1930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바비존스는 당시 4대 메이져 경기 [ 브리티시 아마추어오픈 / 브리티시오픈 / US아마추어오픈 / US오픈 ]을 한 해에 차례 차례 참가하며 모두 석권하였습니다.
지금의 4대 메이져 경기와는 좀 다르지만 당시는 [ 브리티시아마추어오픈
/ 브리티시오픈 / US아마추어오픈 / US오픈 ]이 4대 메이져 대회 였습니다.
그랜드 슬램이란 말이 이때 부터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US오픈 마지막 18홀에서 40야드 퍼팅을 성공 하면서 그랜드 슬램을 완성합니다.
당시 미국의 신문은 스포츠 역사상 한 경기에 사상 최대의 판돈이 몰렸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1932년 바비 존스의 그랜드 슬램 달성으로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카
퍼레이드를 하게 됩니다.
엄청난 군중의 환호속에 바비 존스는 카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 1934년 존스는 친구들과 함께 작은 아마추어 골프 대회를
개최 합니다.
그 대회가 지금의 4대 메이져 경기 중 하나인 [ 마스터즈오픈 ] 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비 존스는 마스터즈대회의 창시자 이기도 합니다.
1935년 마스터즈 2회 대회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 사건이 벌어 졌습니다.
마스터즈 대회가 전설적인 골퍼 바비 존스의 역활도 있었지만 더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진 사라센] 입니다
2회 대회는 바비 존스의 유명세와 더 블어 간판급 슈퍼 스타들이 총 출돌
하게 되는데, 이날 진 사라센이 파5 마지막 홀에서 세컨샷으로 우드4번을
들고 나와 친 공이 훨훨 날아 220야드 떨어진 홀컵에 마술 처럼 들어 갔습니다.
골프 역사에 알바트로스가 첨 탄생한 날이기도합니다.
알바트로스는 당시에는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가상의 점수 였습니다.
확률로 보면 일반 아마추어 기준 홀인원은 12,000분의 1 이고 알바트로스는 그 보다 487배다 어려운 5,850,000분의 1이라니 엄청 난 확률이죠...!
(알바트로스는 고사하고 홀인원도 하게되면 수건 만들고 식사 대접하고
골프장에 나무심고 ㅎㅎ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데..알바트로스라니..)
사라센은 그 명성을 등에 엎고 최초의 근대적 4대 메이져 대회 [ 브리티시
오픈 / US오픈 / PGA오픈 / 마스터즈 오픈]를 모두 석권한 최초의 골퍼로
기록이 됩니다.
현재까지 4대 메이져 대회를 모두 우승한 그랜드 슬램 골퍼는 5명 [ 1935년 진 사라센 / 1953년 벤호건 / 1965년 게리 플레이어 / 1966년 잭 니클로스 / 2000년 타이거 우즈 ] 뿐이니 500년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기록이죠.
암튼 그런 전설의 알바트로스가 마스터즈 2회 대회에서 진 사라센이란
골퍼가 기적을 일으키면서 더욱 유명해 졌습니다.
사진은 당시 4번 우드로 세컨샷을 칠때의 사진이며 얼굴에 꽃이 피었네요
좋아서..^^
(잘 맞을 때는 임펙트 순간 쫙~ 하며 경괘한 느낌이 이미 오지 않나요?~~ㅎ)
1940년에 접어 들면서 골프는 잠시 정체 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 나면서 전세게 모든 스포츠는 잠시 암흑기에 들어가죠.
1943년 1944년 1945년 3년 동안 4대 메이져 골프 대회는 모두 취소가 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골프는 다시 황금기를 맞이 합니다.
바이런 넬슨 - 벤 호건(2대 그랜드슬램) - 샘 스니드 이렇게 1912년 생 동갑내기 프로 골퍼 3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이런 넬스과 벤 호건은 캐디 출신으로 골프를 접하게 되었고 샘 스니드
는 시골 동네에서 나무를 깍아 돌맹이를 쳐 가며 혼자 독학으로 골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1945년 바이런 넬슨은 역대 최저타 기록으로 11회 대회 연속 우승을 합니다.
11 연속 우승의 대 기록은 현재까지 바이런 넬슨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넬슨이 골프사에 남긴 영향은 근대적 골프 자세였습니다.
우리가 첨에 배우는 골프 스윙의 기본을 완성한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교과서 적인 골프 자세가 없었습니다.( 어드레스 / 백스윙 / 톱스윙 / 다운스윙 / 임펙트 / 팔로우 스로우 / 피니쉬) 타이거 우즈도 골프 전설 바이런 넬슨의 파워 스윙을 기본으로 한다 하니까요.
그러나 넬슨은 뛰어난 실력을 접고 목장주가 꿈이라 얼마간의 돈을 번 후
목장주로 은퇴를 합니다.
벤-호건은 3인방 중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골프를 시작하게 됩니다.
12살때 아버지의 자살로 12살부터 골프장 캐디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호건은 단신의 키에 몸도 외소해 파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습 벌레였습니다.
신체적 핸디캡을 연습으로 보안을 하였죠..호건의 일화중에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는 손을 주위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해 물어보니 "뼈가 보일
쯤 되면 물집 같은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 호건의 일화로 알 수 있듯이 호건은 지독한 연습 벌레였습니다.
1950년 호건은 가족과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짖은 안개 속 버스와 정면 충돌하는 교통 사고가 났습니다.
부상은 등뼈 두군데 갈비뼈와 발목 늑골뼈 모두 부러졌습니다. 골프 선수로 가장 중요한 등 발목 등 다시 골프를 치지 못 할 대형 사고는 분명 했습니다.
모두들 호건은 다시 골프를 못 할 것이고 죽지 않고 살면 기적이다라고 할
만큼 생사를 오가는 사고였습니다.
우울한 가정 환경과 대형 교통 사고를 이기고 호건은 불굴의 투지로 드디어 1953년 골퍼의 최고의 전당인 2대 그랜드 슬램을 이룩 합니다.
지독한 연습과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벤- 호건의
업적은 많은 프로 골퍼들의 귀감과 전설의 인물로 평가 됩니다.
샘 스니드는 독학으로 공을 쳤지만 부드러운 스윙의 대가 였습니다.
1946년 브리티시 오픈을 시작으로 연속 5경기에서 우승을 합니다.
요즘의 많은 프로들도 스니드의 부드러운 스윙과 아놀드파머의 파워 스윙을 합친다면 최고의 샷을 구현 할 수 있다 하니까요.
스니드가 가지고 있는 대 기록은 60년 동안 프로 골퍼로 대회에 참가하였고,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82승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샘 스니드에게도 한 가지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랜드 슬램을 못 이룬 것이죠.
4대 메지져 경기 중 하나인 US 오픈 때문 이였습니다.
82승 최다 우승기록을 보유한 스니드도 US 오픈만 참가하면 항상 미끄러지니 보는 팬들도 팬들이자만 샘 스니드 자신도 평생의 한이 되었을 듯 합니다.
샘스니드의 82승 기록은 현재까지 최다 우승 기록이며 ( 2위 젝니클로스 74승 ) 타이거 우즈가 3위로 진행되고 있으니 최대 기록을 깰 가능성은 높지만 아직 현역 선수니 시간이 더 흘러야 알 수 있겠습니다.
사진은 1997년 85세의 샘 스니드 사진 입니다. 평생 골프를 한 명장의 인터뷰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 골프는 리듬이다 힘빼고 서서히 스윙을 하면 공은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 ㅋㅋ 결코 도망치지 않느다는 말이 귓가에 맴맴 도는군요...)
아무튼 1940년대 골프 3인방은 동갑이면서 서로 경쟁하며 근대 골프 발전에 많은 업적을 세웠습니다.
( 자료를 적다보니 참 대단한 3인방 인듯 생각 됩니다...)
1953년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미국 대통령 중 최고의 골프광으로
기록 됩니다.
두번의 임기 동안 800번의 라운딩을 했으면 백악관에서 직무를 볼때도 골프화를 신고 직무를 했다니 대단한 골프광 이었습니다.
(얼마나 공에 대한 집념이 강했으면 평소에도 골프화를 신고 다녔을까요ㅎㅎ)
골프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아이젠하워는 거센 비난을 수 차례 받았지만 정치 생명에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골프는 계속 쳤다니 그의 골프 욕심은 대단 했던 모양입니다.
1950년에 접어 들며 골프사에 전설의 여성 골퍼가 등장 합니다.
텍사스 출신 [베비브 자하라스] 1930년 미국 육상 선수였던 그녀는 육상 세계 신기록을 3회나 수립한 미국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였습니다.
1940년 그녀는 육상에서 골프로 스포츠 종목을 바꾸면서 당대 최고의 프로 코치 토니암에게 골프레슨을 받기 시작합니다.
골프 대회 첫 출전부터 베이브는 이미 당시 기자들의 관심 대상 1호였습니다.
1946년 1947년 17연승 기록으로 2년간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합니다.
한 기자는 베이브에게 안해 본 놀이 중에 무엇이 있냐는 질문에 베이브는
인형놀이~~라 했다 더 군요ㅎㅎ
베이브는 여성 프로 골퍼로도 유명했지만 그녀의 업적 중에 최고는 1950년에 LPGA협회 창단입니다.
LPGA협회의 창시자이며 1호 LPGA 프로 골퍼로 기록 되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 프로 선수는 없었으니까요.
베이브가 없었다면 우리 여성 프로골퍼가 전세계에 이름을 날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옥희로 출발한 우리 여성 골퍼의 위상은 현재의 신지애까지 수 많은 여성 프로 골퍼는 베이브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베이브는 언론 플레이도 굉장히 잘 했습니다.
대외적인 성격의 베이브는 어느날 한 스포츠 기자의 질문에 어떻게하면 그런 장타 비거리를 낼 수 있냐는 질문에 " 속옷을 벗고 치면 좀더 거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치만 전 그런 여자는 아니예요"
( 충분히 기사 거리가 되는 깜직한 답변이네요..ㅎㅎ )
1950년 초대 LPGA 골퍼들의 사진 입니다. ( 롱스커트에 티셔츠 원피스를 입고 공을 치는 여성도 보이는 군요ㅎㅎ )
초대 LPGA는 후원사가 별로 없어 남자 상금에 비하면 매우 작았습니다.
그러나 베이브 자하라스는 광고 영화등에 출연하며 스포츠 마케팅에 딱 맞는 유명 인사로 당시 미국 스포츠 스타 중 년수익 3위에 올랐습니다.
( 많은 이슈를 만들어 돈을 버는 미셀위의 벤치 마킹 모델이 베이브 자하라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