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네 가지 진리를 말씀드리자면 괴로움의 진리.’ 해서 고성제(苦聖諦).’ 그 다음에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苦集聖諦).’ 해서 집성제.그 다음에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聖諦).’ 해서 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苦道聖諦).’ 해서 도성제가 되겠습니다.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에 해당합니다. 붓다는 바로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시(施論)에 대한 가르침, 그 다음에 계율(戒論)에 대한 가르침, 그 다음에 천상세계(生天論)에 대한 가르침 따위의 예비적인 가르침을 먼저 설파를 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내면의 번뇌가 어느 정도 정화된 사람에 한해서 초기불교의 본래적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쳤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초기불교의 경전어인 빨리어로 표현하자면 짜따리 아리야삿짜(cattāri ariyasaccāni)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짜따리는 네 가지를 의미하고 그 다음에 아리야삿짜.’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아리야하는 그 말은 성스럽다혹은 고귀하다라는 의미가 되겠고 그 다음에 삿짜진리.’라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현상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관념을 투사해서 사변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이것은 육체적 괴로움에 대해서건 정신적 괴로움에 대해서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어떠어떠한 괴로움에 빠져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나는 괴롭다.’ 혹은 나는 이 괴로움이 싫다.’ 라는 따위의 생각을 지니곤 합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가 괴롭다.’고 하는 것과 괴로움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붓다는 나는 괴롭다.’ 라는 생각 대신에 여기 이러저러한 괴로움이 있다.’ 라고 하는 방식으로 괴로움 자체만을 직시할 것을 권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첫 번째 항목으로 제시되는 고성제, 즉 괴로움의 진리에 우리가 접근해 나가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깊이를 지닙니다. 우리는 나라든가 너 혹은 우리 따위의 관념에 메인 상태에서 괴로움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괴로움을 짊어진 나 혹은 나의 자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붓다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괴로움은 나라고 하는 관념이 투사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증폭이 된다고 진단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괴로움은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의 이 지긋지긋한 괴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한단 말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는 괴로움을 괴로움 자체로 보지 않고 나라는 관념과 얽힌 상태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의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붓다는 말합니다. 당연히 괴로움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괴로움의 원인도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또한 괴로움의 소멸 상태에 대한 바른 전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게 고성제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부분입니다.

 

섣부르게 우리가 괴로움을 맞선다거나 혹은 괴로움을 제거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 자체를 더 증폭시킬 수가 있습니다. 또한 괴로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새로운 괴로움의 악순환으로 초래되기 쉽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괴로움들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증폭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괴로움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나라든가 너라든가 우리 따위의 관념을 내려놓고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 자체만을 냉정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수용적인 태도는 괴로움이 야기 시킨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들로부터 얼마간 벗어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괴로움과 연결된 혹은 괴로움에 수반된 여러 가지 정서적, 심리적 요인들로부터 우리가 거리를 둘 때 괴로움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고 그 다음에 그러한 괴로움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 이었는가하는 부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붓다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괴로움을 바라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괴로움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기 이전에 괴로움 자체로서 보는 것.’ 바로 여기에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실전적 접근의 실마리가 담겨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언어적 유희의 차원에 머무는 사변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실제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한 치유책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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