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스토리텔링을 찾는 이

 

 소설가  신경숙의 작품'엄마를 부탁해' 영어판이 모든 엄마들을 위로하러 나간다.그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엄마가 들려준 감동의 한글의 경계를 벗어나 전세계 24개국으로 속속 퍼저나가고 있다.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신경숙씨는 어리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서울에 공부하는 오빠의 편지가 오면 엄마에게 읽어드리고 ,답장을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써서 보내곤 했다고 한다.내용은 늘 같은 내용 이었으나 신씨에게는 많은 영향을 주는 교훈적인 말씀었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도 마찬가지다.카뮈 어머니 역시 아들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는 문맹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남편을 잃고 막일을 하면서 아들을 세계적인 작가로 키워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나의 엄마도  신경숙씨나 카뮈의 어머니와 같은 문맹의 어머니였다.막내인 내가 10살때 아버님이 돌아 가셨는데, 당시 3남2녀 모두 결혼도 안한 상태였다.어머님은 홀로  키우시면서 자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농촌일 도우려 해도 절대 일을 시키지 않고 "너희들은 서울로 가서 공부 해야한다" "아비 없는 호로 자식소리를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고 늘상 말씀 하셨고.막연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만 하셨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10리길 통학이 어려우니 하숙을 시켜 주셨고,나의 생일이 음력4월인지나 아산만에서 나오는 숭어를 양푼이에 가득채워 가져오셔서 직접 만드신 초장과 함께 하숙집 주인,옆방의 교사부부,친구2명등과 함께 숭어회 생일 파티를 해 주셨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객지 생활로 어머님의 생일 잔치를  받을수가 없었다.전국각지로 다니며 30년 직장 생활을 하였고,퇴직후 00대학교 겸임교수로 첫 출근 하는 날 돌아가셨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나에게는 멀리 강원도에 가있는 작은 아들과 같이 생활하는 큰 아들이 있다. 농담으로 아들이 둘이면 목메달 감아라고 놀림을 받을 때도 있다. 결혼후 바로 큰 아들리 태어 났고 2년뒤에 태어난 자식 역시  아들이었다.어늘 날 두 아이들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는 순간에 부모님 생각이 떠 올랐다. 국민학교 시절 부모님 학력조사를 하면 '무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창피했던 것이 생각났다. 물론 그당시는 대부분 부모들이 무학자였다.나는 우리 아들에게는 상처를 주지 말아야지 ,최고의 학력을 가진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겠다고 마음 다짐을 했었다.

 어버이 날에도  멀리서 편지를 쓸수가 없었다.문맹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저녁에 전화 연결이 되면 하시는 말씀 '건강을 돌봐라". "책을 많이 보라"항상 같은 말씀이셨다.세월이 흘러 돌아가시기 3개월전에 박사학위 받든날 큰절을 올리면서 논문과 직접 쓴 책을 드렸다. 막내아들이 장하다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셨다. 물론 어머님은 논문과 책의 제목조차 읽을 수가 없다.나는 그후로  어린시절 어머님이 문맹이어서 창피한 마음을 가진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어린 시절 어머님의 희망과 꿈을 주시면서 돌봐주심이 없엇다면, 요즘 말로 교육적 스토리 텔링이 없었다면 이 순간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늦은 감은 있으나 아들들에게 어머님 같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줄까 고만해 보는 시간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씨는 문학의 근원이 엄마의 구수한 이야기 솜씨가 퍼저 나가  세상의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를 통해 나온 세상의모든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여! 누구나 엄마의 교훈적 스토리텔링을 있게 마련입니다.지금 당장 찾으시는 시간을 갖으시는 분, 바로 이것이 엄마의 바램이고,나의 효(孝)가 아닐까요?


골프 : 개나 걸이나 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아내가 6개월 만에 골프를 접었다.

  그물망이 설치된 골프 연습장에 1년 치를 선불로 지불하고 예약하였으나 3개월 레슨 받고 3개월 연습하다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필드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연습장에서 연습하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거나 국가적 위기의식이 고조될 때마다 공직자들의 골프는 어김없이 도마에 오른다. 이번에도 미국 발 경제위기로 인한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침체로 주눅들은 사회분위기를 개선하고자 공직자들의 골프 자제령이 시달된 것이다. 사실상 ‘자제령’은 ‘금지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청렴한 사회를 만들고 서민들에게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주지 않도록 자제하자는 것이 주요 취지인 것 같다.

 

  예전에야 골프는 돈 좀 있다는 부유층의 전유물로써 비싼 옷을 입고 비싼 골프채로 온갖 폼을 잡는 스포츠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은 술 안마시면 그 술값으로 일주일에 한 번 골프를 칠 수 있다고 하니 이젠 골프도 대중스포츠일 따름이다. 필드에 나가는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그물망 골프 연습장의 1년 치 연습료가 볼링, 스키 등 다른 스포츠의 비용보다 저렴하다. 그런데 아직도 골프는 가진 자들의 귀족적 취미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깔려있고, 특히 환경단체에서는 환경파괴의 대표적 사례라는 사회적 비난 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주 오래 전에도 지금과 같이 골프 금지령이 있었다고 한다. 13~4세기 네덜란드에서 얼음 위에서 즐기던 것이 스코틀랜드에 건너가 골프가 되었고 너무 재미있어 온 국민이 생업을 등한시하며 즐기자 1941년 제임스 4세가 골프 금지령을 내린 바 있었지만 왕 스스로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허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요즘 골프라는 운동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왜, 어째서 이토록 열광하고 미쳐 있는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골프에 미친 민족은 없다고 한다. 골프라는 것이 우리들이 어릴 적에 하던 자치기나 다름없기 때문에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런 것인가. 사실 작대기를 휘둘러서 계란만한 공을 멀리 있는 구멍에 넣기 위해 한여름의 땡볕, 한겨울의 칼바람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니는 것이 무슨 운동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북한에서도 골프를 친다고 한다. 골프를 북한말로는 ‘시팔(18) 구멍(홀)에 흰 공알 넣기’라고 하며 일부 당 고위급 간부들이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골프가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부유층의 전유물임을 북한에서도 알고 있을 것인데 그것을 즐긴다고 하니 아이러니(irony)한 일이다.

 

문화심리학자 겸 여가생활학자인 김정운 교수는 골프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기 때문에 많이 즐긴다고 한다.(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中에서) 즉 골프는 운동이 아니고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외국어학원의 광고지 홍보문구에나 나오는 것인데 골프에 있다고.

 

  이 골프의 스토리텔링에 관한 이야기를 김정운 교수에게 계속 들어보면 이렇다. 한국 남자들이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네 시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골프밖에 없으며,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이렇게 길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매번 비슷한 골프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내 이야기가 있고, 살면서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이토록 많이, 흥미진진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묻고 있다.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상실한 중년들에게 골프만큼 공통의 화제를 만들어주는 일은 없다고 한다.

 

  또한 주말 골퍼의 스토리텔링과 낚시꾼의 스토리텔링은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고 한다. 낚시꾼들이 잡은 고기를 들여다보면 다 손바닥만 한 크기다. 놓친 고기인들 그 크기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않을 듯한데, 낚시꾼들은 모두 그 고기가 팔뚝만 하다며 양손을 벌려 그려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낚싯줄이 터져나갈 때의 그 아쉬움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낚시꾼들이 즐기는 것은 고기가 물었을 때의 그 손맛만이 아니다. 놓친 고기에 관한 아쉬움을 남에게 과장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낚시꾼들의 즐거움이라고 김정운 교수는 이야기한다.

 

  주말 골퍼들의 이야기도 비슷하다고 한다. 드라이버 비거리에 관한 ‘뻥’은 주말 골퍼들 사이에서는 공인된 허풍이다. 좀 친다 하면 다 300야드 나간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새로 나온 GPS 측정기를 가지고 쫓아다니며 재보니, 길어야 260야드가 대부분이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쳐도 실력이 늘지 않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장비 탓만 하며, 그러다 보니 장비가 자주 바뀐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한국 남자들만큼 골프에 미친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전날 손바닥이 물집이 잡히도록 연습하고 새벽 네 시면 벌떡벌떡 일어난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그토록 골프를 좋아하는 것일까? 앞서 설명한 스토리텔링의 힘도 있지만 또 한 가지, 골프장에 가면 ‘감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프장에서는 감탄을 받는다. 그것도 네 시간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골프에 그토록 미치는 것이라 한다. 허나 그 다양한 삶과 문화의 영역을 제쳐두고 오직 산비탈 한구석에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감탄을 주고받는 것처럼 소외된 삶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음악회도 열심히 가야하고, 미술관도 아내와 팔짱 끼고 가야하고, 축구장과 야구장에 아이들 손잡고 가야 하는 것이라 한다.

 

  여담이지만 만약 드라이버 거리가 멀리 나가지 않으면, 골프공에다가 마누라 이름을 새겨보라고 권한다. 그럼 평균 40야드 이상 더 날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공을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다. 헤져드에 공이 빠져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운 교수의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스토리텔링을 한 번 느껴보기 위하여 골프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그물망 골프연습장에서는 혼자 연습하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은 둘째 치고 고독만 느낄 것 같다. 스토리텔링을 느끼기 위해서는 필드에 나가야 하는데, 수도권지역 골프장의 비회원 주말 그린피가 1인당 20만원이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치는데 20만원 이라니 너무 비싸다. 나는 아직 부유층이 아니다.

 

  따라서 골프 대신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더치 페이(Dutch pay)하는 술자리나 마련하여 스토리텔링을 즐겨야겠다.

 

  여보게들! 오늘 저녁 시간 있냐?

  술이나 한 잔 하면서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밤 새워 우리 이야기꽃이나 피워보세!

 

                                     2009년 6월 말

                                                  까칠한 무늬는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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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경기에서 장애물은 장애가 아니다.
승마경기에서 장애물은 장애물이 아니라
승마라는 경기를 있게 해주는 결정적 요소다.
장애물을 넘었기 때문에 승마경기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도 마찬가지다. 장애물은 옵션이 아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승마경기가 성립되는 것이고,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꿈을 이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채인영, ‘꿈 PD 채인영입니다’에서
촌철활인: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꿈을 제대로 찾아간다면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꾸준하게 걸어간다면 하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줍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우주가, 신이 우리 자신을 돕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Mahone Bay

*

 

CANADA

 

 

 
 
 

 
헬리팩스에서 가까운 곳에 마혼베이’(Mahone Bay)라는 마을이 있다.
 
 
 
 

 

1754년 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주민들은 주로 독일계와 스위스계 이민자들이었다.

 

 

 

 

 

LA에는 1,000,000명이 넘는 교민에 400여개 교회가 있다고 놀라지만..

*마혼베이에는 주민 900명에 교회는 4개나 있다.

 

 

 

 

 

 

그 중, ‘성공회교회’(Anglican), ‘루터교회’(Lutheran), ‘유나이트드교회’(United)는 서로 붙어 있다.

 

 

 

 

 

 

3군데의 아름다운 교회로 인해 마혼베이는 더욱 더 유명해졌다.

 

 

 

 

 

 

*여름에는 클래식 보트 페스티벌도 개최되는 곳이다.

 

올해는 7 29일부터 81일까지 4일간 페스티벌이 마을에서 열렸다.

 

http://www.mahonebayclassicboatfestival.org/ (마혼베이 클래식 보트 페스티벌 정보)

 

 

 

 

 

*우리 한국이민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건축하 듯이..

 

캐나다 이민자들도 정착하는 곳마다 그들의 교회를 건축했다.

 

 

 

 

 

 

 
 

*‘오타와’(Ottawa)에 있는 St. Elias Antiochian Orthodox Cathedral’도 마찬가지.

 

1929, 레바논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다.

 

 

*바로, ‘폴 앵카’(Paul Anka)가..

 

교회합창단에서 노래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

*폴 앵카는 교회합창단에서 노래하며 ‘Frederick Karam'에게 음악이론을 공부했으며,

*피아노는 위니프레드 리스’(Winnifred Rees)에 사사했다.

 

16세에 가수로 데뷔했으니 폴 앵카가 가수 활동한 지는 벌써 53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의 데뷔곡은 본인이 16세에 작사 작곡한다이아나'(Diana).

*전세계적으로 2천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웠던 대힛트곡이다.
*이 후에도 그는 마이 데스티니’, ‘ 유어 헤드 마이 숄더’,

*파피 러브 수많은 곡들을 작사, 작곡했다.

 

 

 


 

 

*미국 에이저들의 최초 우상으로 불리던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여..

*50년대와 60년대 초에는 그의 인기를 뛰어 넘는 가수는 없었다.

*그러다 1964, ‘비틀즈(The Beatles) 미국에 입성하자,

그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바닥을 치고 말았다.
*

그는 눈물을 머금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유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비틀즈는 사라지고..

 


폴 앵카는 아직도 세계 각지를 돌며 1년에 35 정도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가 부르는 파파’(Papa)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추억의 팝 명곡이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그리며 열창할 때면.. 나는 나의 아버지 생각이 난다.

 

 
간경화로 인해 아픈 몸을 이끌고 필라델피아 토마스 제퍼슨 대학병원을 찿으시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나는 불효를 깨닫고 정신을 차리지만..

효도할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나는 지금도 폴 앵카의 파파를 들으면 인자하셨던 나의 아버지 생각이 난다.

 

 

, 사진: 서정

 

 

 

 

 Paul Anka
 
 
   
  
폴 앵카’(Paul Anka)  
 

출생지: ‘오타와’(Ottawa)

 

생년월일: 1941 7 30(69)

 

http://www.paulanka.com/ (폴 앵카 웹사이트)
 
 
 
 
Papa
 
 

 
 
Papa
 

Everyday my papa would work
To try to make ends meet
To see that we would eat
Keep those shoes upon my feet
Every night my papa would take me
And tuck me in my bed
Kiss me on my head
After all my prayers were said
And there were years
Of sadness and of tears
Through it all
Together we were strong
We were strong
Times were rough
But Papa he was tough
Mama stood beside him all along

Growing up with them was easy
The time had flew on by
The years began to fly
They aged and so did I
And I could tell
That mama she wasn't well
Papa knew and deep down so did she
So did she
When she died
Papa broke down and he cried
And all he could say was, "God, why her? Take me!"
Everyday he sat there sleeping in a rocking chair
He never went upstais
Because she wasn't there

Then one day my Papa said,
"Son, I'm proud of how you've grown"
He said, "Go out and make it on your own.
Don't worry. I'm O.K. alone."
He said, "There are things that you must do"
He said, "There's places you must see"
And his eyes were sad as he
As he said goodbye to me

Every time I kess my children
Papa's words ring true
He said, "Children live through you.
Let them grow! They'll leave you, too"
I remember every word Papa used to say
I kiss my kids and pray
That they'll think of me
Oh how I pray
They will think of me
That way
Someday

 

 

 
 
 

*표시의 이미지는 구글에서,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가져왔습니다.

 
출처 : 부에니따의 행복한 세상
글쓴이 : 부에니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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