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환경에서 기업과 개인이 Win-Win 할 수 있는 '몰입의 경영' 급변하는 환경에서 기업과 개인이 Win-Win 할 수 있는 '몰입

책소개

몰입 개념을 통해 일상의 행복을 제시하는 인문교양서

'몰입' 개념을 전파하는 행복 이론서 <몰입의 즐거움>. 교육학과 심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칙센트미하이 박사의 저서 <몰입의 즐거움>을 개정 출간하였다. 1997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 책은 지금까지 20만 부가 판매된 인문교양 분야의 베스트셀러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새로운 행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자기계발서로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 삶이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몰입'이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일컫는다. 저자는 체계적인 설명과 다년간의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일과 놀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 다음, 자기만족을 즐기기 위해서는 집중력, 즉 몰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몰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직설화법으로 풀어낸 매뉴얼식 처세서나 자기계발서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서적ㆍ심리적인 안정감을 선사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인문교양서이이다. [양장본]

저자소개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저서 (총 8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과 활발한 저술활동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40년 동안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교육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9년 현재 클레어몬트대학교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 심리학 교수이자 삶의 질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긍정의 심리학(Positive Psychology)' 분야의 선구적 학자라는 평가와 더불어 심리학과 경영학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심리학자로도 꼽힌다. 수개 국어에 능통해 소설과 시 등의 번역 작업과 함께 『뉴요커(New Yorker)』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일찍이 창조성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그는 창조적인 사람의 3가지 요건으로 전문지식과 창의적 사고, 몰입을 제시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창조적 발견 저변에는 그의 물리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창조 또한 '지식'이 기반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며, 떨어지는 사과로 중력 개념을 이끌어낸 뉴턴처럼 같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창의적' 사고를 강조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에 대한 ‘몰입’이 창조를 완성시킨다고 역설한다. 그의 이런 확신은 창조가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에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신이 창조적이라고 믿으면 창조성이 발휘되고,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창조성은 위축된다. 이와 관련한 그의 연구업적은 많은 저서로 출간되었으며, 학계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연구는 『사이콜로지투데이(Psychology Today)』『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시카고트리뷴(Chicago Tribune)』『뉴스위크(Newsweek)』 등의 언론 매체에 실리고 있고, 영국 BBC, 이탈리아 RAI 등의 TV 매체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6년 가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칙센트미하이 교수를 가장 좋아하는 저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1999년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된 이후, 《몰입(Flow)》《몰입의 경영(Good Business)》《몰입의 기술(Beyond Boredom and Anxiety)》《창의성의 즐거움(Creativity)》《어른이 된다는 것은(Becoming Adult)》 등이 잇따라 소개되었다.
의 경영'
Leonardo da Vinci
 

 

Leonardo da Vinci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공증인인 아버지와 하녀 사이에 태어났으나

출생 직후 아버지는 귀족 처녀와,

어머니는 도기장이와 결혼을 해버려

사생아가 된 소년은 시골 할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며

자연을 유일한 벗 삼아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래도 가끔식 들러

 아들을 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아들의 낙서를 보고 놀란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판을 내어 주며

방패를 만들어 보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만든 방패를 본 소년의 아버지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맙니다.

소름이 끼칠만큼 끔찍한 악룡의 형상이

살아 움직이듯,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수기 노트에

그때의 회상을 이렇게 합니다.

"푸른 도마뱀을 잡아 악룡의 철갑을,

박쥐를 관찰하여 날개를,

자라에서는 등 껍질과 발톱을,

풍뎅이에서 뿔을,

물뱀에서 비늘과 혀를 묘사해 냈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 화가란, 제 뜻에 따라 아름답거나, 끔찍하거나, 우스운 형상을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존재다."

바로 이 소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로 여김받는,

우리에겐  그림  `모나리자` 로 더 친근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였어요.

 

 Leonardo da Vinci/1452~1519년

 

지방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로 자라야 했던 상처 때문이었는지

(불우한 출생은 그에게 평생 걸림돌이 됩니다)

그는, 일생 가정을 이루지 않고 방랑생활을 했는데

죽을 때까지 옆에다 두고 간직했다는 `모나리자`는 어쩌면 그의 채워지지 않은 모성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에 대한 표현 이었는지 모릅니다.

 

Mona Lisa

이탈리아가 가장 자랑하는 인물,

(그래서 로마공항의 명칭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공항`이예요)

그가 태어난지 558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신비로운 인물로 남아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런데

'레오나르도'  뒤에 있는 ' 빈치(Vinci)'는

성(姓)이 아니고 그가 출생한 마을 이름이라는 거 아시죠?

그래요!

우리가 천안댁, 마산댁 하고 부르는 것 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는 이름은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라는

사생아였기에 성도 없이 지어진 서러운 이름인 거지요.

하지만  위대한 이름의 일부가 된 탓에

그의 이름이 회자될 적마다 함께 불리워지는 빈치마을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위대한 사람을 품어 내었을까요!

그 빈치(Vinci) 마을을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지난번 이탈리아 여행 때 생각지도 않게 주어졌답니다.

 

- Montecatini 온천 박물관(spa museum)-

 

고대 로마적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몬테카티니의

호텔 로비에서 발견한 빈치 & 와인 투어 팜플렛에서

 

세상에~!

그 `빈치 마을`이 현존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놀라웠는데

호텔에서 겨우 1시간 거리에 있는 게 아니겠는지요?

게다가 이탈리아의 와인, 키안티(Chianti)로 유명한

토스카나 지방에 오면  꼭 해 보아야 한다는`와인 테스팅`을 ~~~~~~

빈치 마을의 와이너리에서 해 볼 수 있는 투어였습니다.

계획하지 않은 여행에서의 횡재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거예요.

그 자리서 예약을 하고  다음날  혼자서

` 빈치& 와인` 투어 버스에 올랐습니다.

 

빈치 마을을 향해 가는 동안 투어가이더는

버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토스카나 지방에 대해 들려 줍니다.

토스카나 (Toscana,영어로는 투스카니) 는

르네상스가 발원된 곳으로

이탈리아의 20개 州 중 농업과 산업이 고루 발전한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州예요.

Tuscany_Italy.jpg picture by youngsphoto

                                                             - 투스카니 지방 사진-                               

 

산악과 평원, 알맞은 구릉과 너른 초원,

잘 가꾸어진 올리브숲, 포도 밭 , 밀밭 비탈사이로  

꿈꾸듯 앉아 있는 파스텔 톤의 예쁜 집과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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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스카니 지방 사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사열하고 서 있는 검은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프러스로 둘러쌓인 작은 城 과  중세 마을 등...

 

Country_Road_Tuscany_Italy.jpg picture by youngsphoto

                                                                    - 투스카니 지방 사진-                                   

 

이탈리아 전원 풍경의 사진이라면

대부분이 이곳의 풍경일만큼 자연 경관이 빼어난데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비롯 수 많은 영화가 촬영된 곳이 예요)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Firenze/ 영어명 Florence),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Pisa) ,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된 시에나, 루카등의

역사적인 도시가 있고,

 

포도주는 이탈리아가 원조라고 그들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포도주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키안티`와 `키안티 클라시코`가 나오는 곳.

바로 이곳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고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갖는다는 천혜의 땅,

 토스카나 지방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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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역사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토스카나 지방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

16세기 정치가 마키아벨리, 최고의 고딕 조각가 조반니 파사노

작곡가 푸치니, 보케리니 등 많은 인물들을 내었는데 

 안드레아 보첼리의 고향도 이곳 토스카나구요.

입담 좋은 가이더의 재미난 설명을  들으며  1시간쯤 달려

투어버스가 도착한 빈치마을은

포도밭과 올리브 밭으로 둘러쌓인

언덕 위의 아주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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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nci 마을 전경 -                      

 

바로 이곳이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곳으로

방패 그림에 놀란 아버지에 의해 피렌체의 유명한 화공이던

베키오 (Andrea del Verrocchio, )의 공방 견습생으로

도제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난 14살 때까지

 

이곳의 자연과 벗하며

바람의 움직임, 강물의 흐름,

곤충과 식물 등 생물들을 관찰, 수집, 스케치하거나

점토로 조각을 하며 유년을 보낸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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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가 살던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다는 빈치 마을 입구에서 내려

레오나르도가 작은 발로 올랐을 언덕길을 따라

150m정도 오르면 작고 아담한 성당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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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지어졌다는 고딕 스타일의 성당,Chiesa Di Santa Croce.

 

소년 레오나르도의 그림 재능을 아낀 신부는

그에게 당시 귀했던 종이를 구해다 주곤 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그려 보여주면

신부님은 그의 그림을 성당 벽에 붙여놓곤 했대요.

 

 

 소박한 내부의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5각형의 세례실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5살 생일을 맞아 세례를 받은 곳으로

성수대  뚜껑 안쪽엔 이를 기념하기 위한

 

 15, APRIIL, 1452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년월일과 세례명이 새겨 있습니다.

성수대 앞에 서 있자니 550여년 전

세례를 받기 위해 할아버지 옆에 서서

총명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을

준수한 소년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 옆, 마을의 중심지인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다빈치의 노트에 기록되어 있던 수 많은 아이디어들이

후세의 과학과 공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과 모형으로 증명해 놓은 다빈치 박물관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참고서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다빈치 도서관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고안한 자전거는 앞으로만 갈 수 있고

 

체인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고 해요.

 

1126-1.jpg picture by youngsphoto

박물관 앞에는 그의 유명한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도` 조형물이 서 있고

 (원본은 비공개로 베니스에 있어요.)

마을의 기념품 가게 또한

여행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념품 대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안한 발명품들의 모형이나

그의 복사판 그림 등으로만 채워져 있어

어딜 가나 다빈치를 느낄 수 있는 빈치 마을은

마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빈치 박물관 같았습니다.

해부학자, 건축가,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의상·무대디자이너,

요리사, 사상가, 엔지니어, 발명가, 지리학자, 지질학자, 수학자,

군사과학자, 음악가, 화가, 철학자, 물리학자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뛰어났던 만능인,

 

" 그가 손을 들면 神이 손을 빌려 주었다 "

는 말이 있을만큼 다재다능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보다는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어린 아이와 같은 호기심,

자연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하여 새로운 세계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도전정신,

치밀한 장인정신일 거예요.

 

그러니 레오나르도가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탐구정신을 키워 주고

어린 레오나르도의 실험실이 되어 준 작지만 평화롭고 전원적인  빈치 마을은

그의 이름과 함께 불리워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여기까지만이라면 전 한숨  푹~  내쉬며

 

`하늘에서 낸 천재니까~~~ㅠㅠ`

 

천재의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돌아섰을 거예요.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해 놀라고 그를  더 존경하게 된 건

그런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의 작업 노트에,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시는

神 께 감사하다는 기록을 했을만큼 겸손하고

천재임을 부인한 지독한 노력가였다는 점이었어요.

 

어떤 조건에서든 겸손과 감사는

천재가 아니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1088-1-1.jpg picture by youngsphoto

 

언덕을 내려와

200년간 키안티 와인을 제조하고 있다는

빈치마을의 지역 와이너리인 소마빌라(Sommabilla) 에 도착하니

올리브 나무로 병풍 둘러진 정원의 그늘에는

키안티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1094cut-1.jpg picture by youngsphoto

" 친친~!"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의 역사에서부터

와인잔을 잡는 방법, 와인을 마시는(느끼는) 방법 등등..

와인에 대한 기초 상식 등을 배우고

 

(키안티 와인에 대해서는 생략합니다)

 

토스카나 지방의 특산물인 프로슈토(Prosciutto) 햄과

최상급 버진올리브유를 바른 Tomato Crostini를 곁들여

입앗에 맛는 와인을 고르기도 하고

여행객들끼리 즐거운 담소를 나눕니다.

 

--- 내마음의 풍경소리 ---

     
     
     
     
     
    조미미 메들리
     
     
    감사하며 진성두손모음
     

 

 

 

 

출처 : 진성의 블로그
글쓴이 : 진성 원글보기
메모 :

새무얼 스마일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새무얼 스마일즈

새무얼 스마일즈(Samuel Smiles, 1812년 12월 23일1904년 4월 16일)는 스코틀랜드 작가이다.

해딩턴에서 11명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살때 학교를 중퇴하고, 의사 밑에서 보조일을 하다가, 에딩버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했다.

그의 작품으로 self-help가 성공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흔히 그의 4가지 작품들을 스마일즈의 4대복음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다.

  • Self-Help, London, 1859
  • Character, London, 1871
  • Thrift, London, 1875
  • Duty, London, 1880
  • Life and Labour, London 1887

자조론, 새해에 무엇인가 해야 겠다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책이다.

배경이나 힘없는 사람들에게도 세상과 맞서 용기있게 헤쳐나갈수 있는

자신감을 주는 책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량을 계발하는 것이 곧 성공의 지름길임을 알려준다.


제1장 자조정신

한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계발하기 위하여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행복을 추구할 때 그것이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되어 한나라의 국력이 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늘은 스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제2장 산업을 주도하는 힘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방적기를 발명한 리처드 아크라이트 등 근대 문명을 일으킨

위대한 발명가들의 사례를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다.


제3장 위대한 도공들

획기적인 도자기기법을 만들어낸 팔리시, 뵈트거, 웨지우드의 삶을 통해 불굴의 인내라는 교훈과

실패 앞에서도 포기 하지 않고 끈기로 결심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는 교훈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발휘된 그들의 끈질긴 자립심, 목표를 추구하는 용기와 인내력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제4장 몰입과 인내

스마일즈는 행복의 길은 “근면”이라는 오래된 도로를 따라 뻗어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힘든 길을 가는 중이라도 노력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룰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발견한다. 성실하고 끈기 있게 일하는 사람들은 늘 최고의 성공을 거둔다.


제5장 도움과 기회

위대한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기 어렵고,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은

우연한 행운보다도 과감성과 끈기이다.

나약하고 게으르며 목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행운 또한 그들 곁을 지나가 버린다.


제6장 예술가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예술계는 고생스런 노력이 있어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명화를 그리는 일이나 멋진 조각상을 만드는 일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천재성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제7장 산업과 귀족계급

부와 권력은 바를수록 더 강한 법이다.

부와 권력의 원천으로서 노동을 강조한다.


제8장 활동력과 용기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그 결심 자체가 곧 성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심은 모든 행동의 추진력이며 모든 노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해낼수 있다는 생각 자체로 대개는 그렇게 되어 버린다.



제9장 비즈니스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는 근면, 현명한 지혜, 주의력,

시간관리능력, 위기관리능력, 추진력을 강조한다.

 

제10장 돈과 인생

돈을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되고 하찮게 여겨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돈은 육체적인 안락과 사회적인 복리를 얻는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직하게 돈을 벌고 알뜰하게 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제대로 사용된 돈은 고결한 인격의 진정한 기반인 검약, 신중, 극기를 나타낸다.

또한 돈은 음식, 의복, 가정에서의 만족, 개인적인 자존심, 자립심을 상징한다.


제11장 자기수양

자기수양을 통해 참된 지식을 얻는 데 있어 끈기와  활동력을 습관화 하는 것이 중요함을

설명하고 있다. 열등생이 끈기와 집중력을 갖고 있다면 자신보다 똑똑하지만 그런 자질이 없는

학생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경주에서 승리 할 것이다.


제12장 인생의 모범

본보기를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범을 보이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삶을 통해 전해지는 무언의 지속적인 모범이야말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제13장 인격

스마일즈는 인격을 안생의 왕관이자 영광이라고 설명한다.

인격은 최상의 인간성이며 개인 안에 구체화된 도덕적 질서이기도 하다.

인격자들은 사회의 양심이며 통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원동력이 된다.



일시적인 실패가 불굴의 영웅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새롭게 도전하게 만들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용기 있게 맞서 싸우고,

검약, 예절, 건강, 정직한 삶과 어울릴 수 없는 악습인 과도한 음주에 대한 충고를 듣게 되고,

그날 벌어 그날  써버리는 사람들은 늘 열등한 계급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한다.



등장인물의 예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실패 없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혜가 필요할 때, 용기가 필요할 때, 의욕이 필요할 때, 지친심신을

재충전하는 여유를 갖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으면 좋을 듯 하다.


596페이지에 두꺼운 책이긴 하지만,

다 읽어갈 무렵 앞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자신에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실히 일을 할 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며 행운도 그런 자에게는 비켜가지 않음을 알수 있다.

“마치 스티브 잡스 보는 듯”…12세 IT 천재에 ‘열광’
"기술 면에서는 어쩌면 아이들이 선생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지도 모르죠."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하는 12세 소년의 당찬 프레젠테이션 영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해 12살인 토마스 수아레즈(Thomas Suarez)가 지난 달 22일(현지시간) '테드엑스(TEDx)' 강연 무대에 올랐다. '테드엑스'는 매년 미국에서 각 분야 명사들이 18분씩 릴레이 강연을 펼치는 지식 콘퍼런스 '테드(TED)'의 지역별 행사.

한 손에 아이패드를 들고 강연을 시작한 토마스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조리있는 말솜씨와 여유로운 태도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그는 약 4분30초 간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하게 된 과정과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앱을 소개했다.

토마스는 "스티브 잡스, 그리고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며 "결정적으로 애플이 SDK(소프트웨어 개발 키트)를 내놓으면서 앱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스스로 자바, C언어 등 개발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물론 토마스에게 앱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만들고 싶어하기도 한다"며 "축구를 배우고 싶으면 축구팀에 들어가면 되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으면 레슨을 들으면 된다. 하지만 앱을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토마스가 테스트 용으로 만들어 처음 선보인 앱은 '어스 포춘'(Earth Fortune). 지구의 색상 변화로 자신의 운세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앱이다. 토마스는 이 앱을 부모님으로부터 99달러를 지원받아 앱 스토어에 등록할 수 있었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다른 앱은 '버스틴 지버(Bustin Jieber)'로, 이름부터 10대 소녀들의 우상인 '저스틴 비버'를 비꼰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저스틴 비버의 얼굴을 때리면 멍이 드는 게임으로, 토마스는 학교에서 저스틴 비버를 좋아하지 않는 일부 친구들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최근 토마스는 '캐롯코프(CarrotCorp)'라는 앱 개발사를 직접 차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토마스는 "앞으로 더 많은 앱과 게임을 만들고 싶고, 안드로이드 프로그래밍과 개발 공부도 하고 싶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해 학교에서 앱 클럽(App Club)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토마스의 강연 영상은 지난 7일 유튜브에 공개된 후, 무려 13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토마스의 발표를 본 누리꾼들은 "매우 영특한 아이다" "고작 12살인 아이가 저렇게 프로페셔널하게 강의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열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다"라고 치켜 세웠다.

한편, 일부 누리꾼은 "그 나이에 큰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끔찍한 앱을 만들었다." "자신감 있는 태도는 놀라웠지만 그리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이혜미 기자 @blue_knights >
ham@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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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헬렌 켈러
1904년의 헬렌 켈러
출생 1880년 6월 27일(1880-06-27)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
사망 1968년 6월 1일 (87)
미국 코네티컷 주 이스턴 아칸릿지
국적 미국 미국
종교 개신교[1]
서명
Helen keller signature.svg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는 미국작가, 정치 활동가 및 교육자이다.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이다.[2][3] 헬렌 켈러의 장애로 인해 가지고 있던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많은 집필 활동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여행을 자주 다녔고 또한 전쟁에 대해 미국이 전쟁가담의 구실로 내세운 민주주의 옹호론을 "인종차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인가?"라고 논박함으로써 반대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여성의 선거권참정권,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인권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목차

[편집] 어린 시절과 질병

1888년 7월, 앤 설리번과 함께 케이프 코드에서 휴가를 보내는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1880년 7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의 아이비 그린[4]이라는 이름의 한 농장의 저택에서 남부 동맹의 전직 사무관인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와 로버트 리 남부 동맹 총 사령관의 사촌이자 전직 남부 동맹 장군이었던 찰스 W. 애덤스의 딸인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녀의 가족은 스위스에서 왔다.[6]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생후 19개월 후에 의사로부터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생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 때는 가정 요리사의 6살 난 딸이자 그녀의 수화를 이해하는 아이인 마르타 워싱턴과 대화가 가능했었다.[7] 헬렌 켈러는 7살 때부터 집안에서 60개가 넘는 수화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다. 소련의 시청각 장애 심리학자인 A. 메스체리코프에 의하면, 마르타과의 교제와 그녀의 가르침은 헬렌이 나중에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한다.

1886년, 헬렌의 어머니 케이트 켈러는 찰스 딕슨의 《American Notes》라는 시청각 장애인인 로라 브릿맨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 관해 쓰여진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그녀는 공문을 헬렌과 그의 아버지를 동행하게하여 눈, 귀, 코, 목에 관련한 전문가인 J. 줄리안 치솜을 찾아 조언을 얻기위해 볼티모어로 보냈다.[8] 그는 이어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그녀의 가족을 연결시켜줬다. 벨은 보스턴 남쪽에 위치해있고 브릿맨이 교육을 받은 학교인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연락해보라고 조언하였다. 그 학교의 교장 선생인 마이클 아나가노스는 시력 감퇴가 있는 20살의 학교 졸업생 앤 설리번에게 헬렌의 가정 교사가 되는 것을 물어보았다. 이 일은 49년간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이다. 곧 그녀는 헬렌의 가정교사가 되고 나중에는 그녀의 동반자로써 함께하게 된다.

앤 설리번1887년 3월에 헬렌의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헬렌이 단어의 스펠링을 그녀의 손에 적어주는 식으로, 그녀가 헬렌에게 선물로 가져온 'd-o-l-l'(doll, 인형)의 스펠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헬렌이 의사소통 방식에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그녀가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고 '(water)'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쓰면서 연상시켜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헬렌은 설리번과 세상의 다른 흔한 사물들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왼쪽 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헬렌은 사물의 윤곽을 형상화시키며 배웠다. 그녀의 양쪽 눈은 의학적인 이유와 외관적인 이유때문에 유리 복제품으로 대신 교체되었다.[9]

[편집] 정규 교육

1898년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888년 5월 초, 헬렌은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등록하였다. 1894년에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라이트 휴머슨 청각 장애 학교호레스 만 청각 장애 학교를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1896년에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서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다녔다. 그 후로 1900년, 헬렌은 레드클리프 대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크 트웨인스텐다드 오일의 간부이자 그의 아내와 함께 헬렌의 교육비를 지원해준 헨리 H.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1904년에 24살이 된 헬렌 켈러는 레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면서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편집] 그녀의 동반자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일이 끝난 뒤에도 계속 동반자로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앤 설리번은 존 메시와 1905년에 결혼했고 그녀의 건강은 1914년경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폴리 톰슨이 집을 지키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젊은 여성으로 시청각 장애인에 관한 경험들이 전무하였다. 그녀는 비서처럼 일할 만큼 발전했고, 결국에는 헬렌 켈러의 평생 동반자로 남게 되었다.[10]

헬렌 켈러는 퀸스의 포레스트 힐즈로 앤 설리번과 남편 존 메시와 함께 이사했고, 집을 미국 시각 장애 재단의 지지를 위한 노력의 거점처럼 삼았다. [11]

1936년, 앤 설리번이 사망하고 나서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은 코네티컷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또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기금을 늘렸다. 톰슨은 1957년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발작을 일으켰고, 곧 1960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2]

1957년에 원래 폴리 톰슨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온 간호사인 위니 코베리는 톰슨의 죽음 이후로도 헬렌의 집에 남아서 그녀의 남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2]

[편집] 정치적 활동

헬렌 켈러라고 하면 흔히 앤 설리번 선생의 인내와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12], 역사 속의 헬렌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편집] 인권운동

헬렌 켈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연설가로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불리한 신체조건 등 많은 장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및 옹호로 많이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반대자였으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 여성 피임 지원자였다. 1915년, 헬렌 켈러와 조지 케슬러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비전과 건강, 영양 연구에 열심이었다. 1920년에는 그녀가 미국 자유 인권 협회(ACLU)의 설립을 도왔다.

[편집] 일본방문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은 39여개 국가들을 돌아녔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의 몇 차례 방문으로 일본인들의 인기인이 되었다.

[편집] 유명인사들과의 만남

헬렌 켈러는 그로버 클리블랜드부터 린든 존슨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만났고 또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찰리 채플린, 마크 트웨인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친구였다.

1920년 경 헬렌 켈러가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목련을 들고 있는 모습

[편집] 사회주의 운동

헬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영어: Socialist Party of America, 1901년 창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 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발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편집] 미국의 도덕주의 비판과 민중운동

또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라고 선언하자,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Moralism)가 얼마나 표리부동한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했다.[13] 그녀의 이러한 활발한 사회참여에 대해 보수주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 라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 헬렌 켈러,

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14]

[편집] 한계

하지만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당원으로 활동한 미국 사회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당은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빌 헤이우드 집행위원에 대한 제명 조치에 반발, 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일치하여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할 사회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고 비판했지만,[15] 결국 내분을 막지 못했다. 헬렌 켈러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노동 계급의 지원자들에게 투서하였다. 그녀는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자인 유진 뎁스의 모든 대통령 선거 운동들을 지원하였다.

[편집] 보수언론들의 인신공격

헬렌 켈러와 친구였던 마크 트웨인은 20세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인물들로 생각되었으며,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안목은 잊혀지거나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덮어졌다. [16] 그녀가 그녀의 사회주의적인 견해를 표현하기 전에 그녀의 업적과 영리함을 칭찬하던 보수적인 신문 칼럼니스트들은 헬렌이 사회주의자임을 알고부터는 그녀의 신체적인 장애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인신공격을 하였다. 브루클린 이글이라는 지역 신문의 편집장은 그녀의 "명백한 그녀의 발전의 한계를 깨버린 실수들"에 대해 썼다. 헬렌 켈러는 그가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알기전에 만났던 일을 언급하며 대답했다.

이때는 그가 제게 보내주었던 찬사들이 제가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저에겐 너무나도 과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지금 그(편집장)은 저와 대중들에게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이고 또한 오류를 쉽게 범한다는 걸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를 만난 후부터 몇 년 동안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오, 어리석은 《브루클린 이글》! 사회적으로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들리는 것은 우리가 예방하고자 노력하는 신체적인 시청각 장애를 일으키는 질서를 옹호합니다. [17]

[편집] 노동운동

헬렌 켈러는 1912년세계산업노동자 단체(IWW 혹은 워블리)에 가입했으며[16] 의회 사회주의는 "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16년1918년사이에 IWW를 위한 글을 썼다. 내가 왜 IWW가 되었나라는 글에서 [18] 헬렌 켈러는 그녀의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나오는 실천적인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였다.

저는 시각 장애인들의 상태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로 시각 장애를 인간의 제어를 벗어난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대개 고용주들의 탐욕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노동 환경이 존재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악은 그것에 일정부분 기여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여성들을 계속 장님인 상태로 끝나는 수치스러운 삶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여성들의 매춘과 시각 장애의 원인이 되는 매독을 언급한 것이다.

[편집] 집필

헬렌 켈러의 가장 오래된 집필 활동중 하나는 그녀가 11살일때 작업한 서리 왕(The Frost King) (1891)이다. 이 작품은 마가렛 캔비의 서리 요정(The Frost Fairies)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는 헬렌 켈러가 잠복기억 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폭로하였다. 헬렌 켈러는 캔비의 이야기를 읽고서 잊어버렸으나 무의식적인 기억속에 남았다는 이야기이다.[2]

22살에는 헬렌 켈러가 그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1903)를 앤 설리번과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와 함께 출간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녀가 21살까지 자라온 이야기를 담았고 그녀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썼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그녀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지 알게 깨닫게 해주는 내가 사는 세계1908년에 집필하였다.[19] 어둠의 바깥이라는 사회주의에 대해 쓴 에세이 시리즈는 1913년에 출판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인 나의 종교1927년에 출판되었고 내 어둠속의 빛과 같이 다시 이슈가 되었다. 이 자서전은 논란이 많은 신비주의 신학자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지지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예수의 부활에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에는 스데벤보리아니즘이라고 이름이 붙기도 한다.

헬렌 켈러는 총 12개의 책을 출판하였고 많은 기사들을 썼다.

[편집] 아키타

1937년 7월에 일본아키타 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1935년에 죽은 유명한 개 하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일본인에게 아키타 견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며 한마리를 한 달도 안돼서 받았고 이름은 Kamikaze-go였다. 이 개가 개 홍역으로 죽었을 때 이 개의 형이었던 Kenzan-go가 일본 정부의 공식 선물로서 1938년 7월에 왔다. 헬렌 켈러는 이 두마리의 개를 미국에 아키타 견을 소개하며 미국인들이 이 개들에 대해 신뢰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까지 품종 기준(breed standard)이 만들어졌고 개 쇼(dog shows)가 열렸지만 이런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멈추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아키타 저널을 썼다.

만약 천사의 털이 있다면 그것은 카미카제[주해 1]의 털이다. 나는 다른 애완동물에게서는 영원히 이렇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것을 안다. 아키타 견은 모든 것에 있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개는 온화하고 사교적이고 믿음직하다.[20][21]

[편집] 말년

1952년 1월 5일, 이스라엘의 크바 우리엘 마을을 방문한 헬렌 켈러. 가운데가 헬렌 켈러이다.

헬렌 켈러는 1961년에 지속적인 뇌졸중에 시달렸고 말년을 그녀의 집에서만 보냈다.[2]

1964년 9월 14일, 미국의 대통령린든 존슨은 헬렌 켈러에게 가장 높은 두개의 훈장 중 하나인 '대통령 훈장'을 수여했다.[22] 1965년, 헬렌 켈러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뽑혔다.[2]

헬렌 켈러는 '미국 시각 장애인 재단'의 기부 활성화를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헬렌 켈러는 말년을 미국 맹인 재단에 자금을 제공하는일에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1968년 7월 1일에 코네티컷, 웨스트포드의 아컨 리지(Arcan Ridge)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성공회 대성당인 워싱턴 국립 대성당(영어: Washington National Cardinal)에서 행해졌으며 그녀의 유해는 영원한 동료이자 선생이었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의 옆에 놓였다.

[편집] 헬렌 켈러에 대한 묘사들

[편집] 구조

헬렌 켈러의 삶은 수어번 소개되었다. 그녀는 무성 영화인 《구조》 (1919)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녀의 이야기를 약간 과장하고 우화적으로 표현하였다.[23]

[편집] 헬렌 켈러의 삶 속의 그녀

그녀는 또한 《헬렌 켈러의 삶 속의 그녀》(Helen Keller in Her Story)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케서린 코넬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The Story of Helen Keller)》라는 유명 미국의 시리즈물의 한 파트로서 허스트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에서 제작되었다.

[편집] 미라클 워커

미라클 워커》는 그녀의 자서전인 나의 삶에서 나온 극적인 일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 여러 드라마들은 각각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관계를 설리번 선생이 어떻게 방황하는 삶을 살던 헬렌 켈러를 교육과 실천적인 행동, 또 저명한 인사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묘사를 했다. 가장 잘 알려진 제목은 마크 트웨인이 앤 설리번을 표현한 것과 같이 "미라클 워커(기적적인 일꾼)"이다.

[편집] 첫번째 미라클 워커

그 첫 번째 실현은 1957년에 윌리엄 깁슨이 제작한 플레이하우스 90의 각본이었다. 그는 연극 미라클 워커(1959)를 위해 이 작품을 각색하였고 앤 밴크로프패티 듀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미라클 워커(1979)》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79년2000년TV 방송용으로 재제작되었다.

[편집] 방송용 영화

2000년 제작된 방송용 영화는 디즈니에서 제작했으며, 교육방송에서 토요일 오후에 방송되었던 EBS 가족극장으로 소개되었다. 헬렌이 말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때문에 방황했지만, 설리번의 끈질긴 교육, 가족들과 고용인들의 인내와 협조로 장애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미국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실례로 영화에서 헬렌의 부친, 모친, 오빠, 고모할머니 그리고 집안살림을 맡아보는 분들은 헬렌이 장애를 극복하자 자신의 일처럼 같이 기뻐한다.

[편집] 기적은 계속된다.

1984년, 헬렌 켈러의 삶 이야기는 《기적은 계속된다》 TV 영화로도 만들어졌다..[24] 《미라클 워커》의 속편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헬렌 켈러의 대학 생활과 초기 성인으로써의 생활을 담았다. 초기의 어떠한 영화들도 헬렌 켈러의 삶의 흔적인 사회주의적 행동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2000년에 디즈니에서 제작한 텔레비전 방송용 미라클 워커 영화는 헬렌을 평등을 위한 행동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주의 운동경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편집] 블랙

볼리우드 영화인 《블랙》 (2005)은 대부분 헬렌 켈러의 어린시절부터 졸업 때까지의 그녀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샤이닝 소울: 헬렌 켈러의 영적인 삶과 유산》[25]은 같은 년도에 스베덴보리 재단이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그녀의 삶에 대한 스웨덴 개신교 영성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신학에 의한 역할극과 어떻게 헬렌 켈러가 3대 악재인 실명, 실청 그리고 거대한 언어의 장벽을 넘었다는 것에 영감을 받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편집] 사진

2008년 3월 6일, 뉴잉글랜드 역사족보협회는 이미 발표 되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진 진귀한 1888년에 찍은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사진을 직원들이 찾았다고 발표하였다.[26] 그녀의 많은 인형 중 하나를 들고있는 헬렌 켈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앤 설리번의 가장 오래된 사진일거라 믿어진다.[27][28]

[편집] 사후의 명예

헬렌 켈러가 그려져 있는 앨라배마 주 쿼터 동전

1999년에는 헬렌 켈러가 "갤럽이 선정한 20세기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인물" 1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03년 앨라배마 주는 주를 상징하는 쿼터(25 센트) 동전에 헬렌 켈러를 그려넣었다.[29]

앨라배마 셰필드에 있는 '헬렌 켈러 병원'은 앨라배마 주가 헬렌으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30]

전 세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도시는 스페인헤타페이스라엘로드가 있다.[31]

인도 마이소르에 있는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유치원은 설립자 K. K. 스리니바센에 의해 헬렌 켈러의 이름을 따게 되었다.

2009년 10월 7일, 헬렌 켈러의 동색 동상이 "미국 조각 수집관"(National Statuary Hall Collection)에 1908년 자베즈 커리(Jabez Lamar Monroe Curry)의 앨라배마 주 동상 대신으로 추가되었다. 이 동상은 "미국 국회의사당 방문객 센터"에 전시되어 있으며, 수중 펌프앞에 서있는 7살의 헬렌 켈러를 담아냈다. 이 동상은 그녀가 W-A-T-E-R(물)이라는 단어를 앤 설리번이 그녀의 손에 써가면서 처음으로 이해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글은 일반 글자와 점자로 쓰여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거나 만져질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 속에서 느껴질 것이다.
 
— 헬렌 켈러

바로크 음악(The Baroque Ages : 1600-1750)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16세기 말경부터 1750년경까지의 음악을 말한다.
16세기 말은 "지오반니 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학파의 시대이며 1750년이면 바하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바로크 음악 특히 대위법의 음악은 바하의 작고와 함께 대체로 끝났다고 하겠다.

 

바로크의 본래의 뜻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진주', '찌그러진 보석' 이란 뜻으로서 르네상스의 명쾌한 균형미로부터 떠나 번잡하고 까다로운 세부 기구의 과잉을 표현한 것'이다.
나라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그 공통되는 특성은 전형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식과 균형을 깨뜨리고 강력한 표현을 중요시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범위를 좁혀 말한다면 바로크 음악은 17세기경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말하는데 '근대의 화성적인 원칙과 중세의 대위법적 방법이 결합한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세기 초엽의 르네상스의 본고장은 이탈리아인데 신진 음악가들이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 양식인 화성적인 반주를 지닌 이른바 단음악(Monodia)을 기용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는 것이다.
음악상으로는 르네상스의 작품에서부터 로코코(Rococo)양식으로 옮아가는 중산의 것으로서, 숫자 저음(Generalbass 數字低音)이라는 화성의 진행을 저음에 붙인 숫자로 약기(略記)하는 방법의 시대인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사회적인 기초는 절대주의인 왕권의 제도와 귀족 제도이며 주로 극음악과 기악 음악의 부류인데 이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베니스 나폴리파에서 주력을 두었는데 교회 음악, 오페라, 기악 부문이 모두 발전하여 유럽 전역에 그 힘이 미치게 되었다.
베니스의 성 마르코 교회에서는 59성부의 미사가 연주되었으며 오페라의 근원의 본고장도 이탈리아였다.
오케스트라 내지는 심포니도 그 본거점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대라고 하겠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몬테베르디(C.Monteverdi 1567-1643)가 1612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오페라에 의한 본격적인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탄생

 

오페라(Opera)는 바로크 음악시대인 16세기 말에 생겼다. 16세기 말경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음악 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612)의 집에 신진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 불렀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정선에 따라 음악도 고대 그리이스의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위법을 버리고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성의 반주를 붙이는 양식을 고안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단음악(Monodia)이며 여기에서 바로크 음악은 시작한다.

이것을 만든 것은 카메라타의 여러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가곡으로 쓴 최초의 사람은 갈릴레이(V.Galilei 1520-1591)와 캇치니(G.Caccini 1545경-1618)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1)의 대본에 페리(J.Peri 1561-1633)가 오페라 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이것이 상연된 이래 카메라타의 역사는 오페라의 역사를 출발시키게 된다.

두번째의 작품도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캇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i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오페라의 확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페라 사상 결정적인 것은 몬테 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La Favola d'Orfeo)'를 1607년에 상연한 때부터이다.
그는 기악의 서주로 오페라를 시작했으며 댄스 음악이 있고 심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는 큰 길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A. 스카를랏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폴리 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1600년대인 바로크 시대에 오라토리오(聖譚曲)가 로마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성서에 의한 소재에 몇 사람의 독창과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서술적인 규모가 큰 가곡이다.
곡은 극적인 구성을 가진 연기나 무대 장치도 없이 연주한다.
따라서 교회 칸타타와 수난곡 (Passion music)과의 한계가 애매함을 볼 수 있다.

 

오라토리오는 중세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 상연했던 전례극(典禮劇), 신비극(Mystery) 등에서 생겼는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뛰어난 작곡가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카릿시미(G. Carissimi 1605∼1674), 17세기 독일의 쉬쯔(H. Schutz 1585∼1672), 그리고 18세기 헨델 (Handel 1685∼1759), 하이든(Haydn F. J. 1732∼1809) 등을 들 수 있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에 단음악의 또 하나의 형식으로 생겨났다.
이는 본래 성악곡을 말했는데 17세기에는 기악 반주가 있는 대규모의 성악곡으로 되었다.
그 내용으로 보아 세속적인 실내 칸타타 혹은 세속 칸타타와 종교적인 내용 또는 전례용으로 된 교회 칸타타가 있다.

 

악기의 발달

 

지금까지 합창 만능에서 벗어나 독창 또는 독주적인 음악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건반 악기로서 먼저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클라비코오드(Klavichord)인데 이는 셈여림이 가능한 것으로서 피아노의 전신이다.
그리고 줄을 튀겨서 소리를 내는 하아프시코오드(Harpsichord)가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쳄발로,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이라 부르며 이 시기에 사용된 악기였다.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는 기악이 성악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악기는 성악의 편곡을 연주하거나 또는 중창과 합창에 있어서 목소리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것이 이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악의 독립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불세출의 제작가들이 출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바이올린족의 완성은 크레모나(the cremona school 1550~1760경)파의 위대한 제작자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크레모나는 알프스 산맥의 남쪽에 있으며 포 강에 임한 시가로서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가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아마티(Amati) 가문과 구아르네리(Andrea Guarneri 1626∼1698) 가문에서 훌륭한 명기를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아마티의 제자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의 제품은 300년을 지난 오늘에도 그 성능이 대단하여 아주 귀한 명기로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1700∼1725년대의 그의 작품이 독자적인데 음색이 투명하고 소리가 큰 것으로서는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는 1500개 가량의 여러 종류의 현악기를 제작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바이올린이 약 540대, 비올라 12대, 첼로가 약 50대 정도이다.
그리고 지우젭페 안토니오(Giuseppe Antonio 1687∼1745)의 작품도 우수한데 파가니니가 쓰던 마술의 바이올린(Wundergeige)도 지우젭페의 작품이다.

 

기악곡

 

이 시기에는 또 콘체르토(Concerto 協奏曲)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 말이 16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음악 용어로 쓸 때는 성악과 기악의 앙상블(Ensemble)로서 중창 또는 중주라는 뜻으로 통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주가 있는 독주를 의미하는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 合奏協奏曲)이 생겼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연주하는데 극소수의 인원으로 된 독주부인 콘체르티노(Concertino)와 관현악의 집단으로 구분한다.
이 둘이 대화풍으로 서로 응답하면서 연주해 나가는 형식의 음악인 것이다.


소나타(Sonata)는 17세기 말경에 생겼는데 기악 독주, 2중주, 3중주 등에 의해서 연주된다.
처음에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푸가 양식의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 (Sonata da Camera)로 구분하였으나 17세기에 이 둘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협주곡이나 소나타는 2, 또는 3악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합주 협주곡은 고전파 시대에 협주곡으로 변화하였다.

 

모음곡(Suite 組曲)은 몇 개의 곡을 묶어 모은 기악곡이다. 이것 역시 17세기의 산물로서 몇개의 악곡을 같이 모은다는 것은 소나타나 교향곡과 같지만 모음곡은 소나타와 교향곡처럼 상호간의 내면적인 연결이 없고 단지 성격이 다른 곡을 대조시킨 것이다.

 

관현악(Orchestra)곡으로는 신포니아(Sinfonia)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페라의 발달과 함께 생겨났으며 처음에는 반주에 끝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바로크 말기, 나아가서는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교향곡 시대를 이루었다.
오르간곡으로 17세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푸가(Fuga)이다. 이 형식이 점차 완성되어 바하 시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런데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독일은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비하면 별로 특색이 없었다.
오페라도 육성되지 못했으며 기악에 있어서도 대위법적인 폴리포니(Polyphony)의 양식으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대위법과 폴리포니 음악은 9세기경부터 네델란드에서 비롯되어, 이것이 로마 교회의 의식과 결부되어 약 7백년간이나 발전했으므로 그 발달은 이미 귀로 듣기만 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크 말기에 바하와 결정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위법적인 음악의 깊이까지 그 진가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바로크와의 융합을 이룬 금자탑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두 거인은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면에서나 다른 점이 많았다.
작품면에서 볼 때 헨델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중점을 두었으며 기악적인 작품에 있어서도 성악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바하는 그와는 달리 성악 작품에 이르기까지 기악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그들은 바로크 음악의 최후요 최고의 대가라고 하겠다.

 

당시 사회적인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십자군의 실패와 상업 자본이 대두하여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 개혁의 결과 봉건 세력과 법왕의 권한이 쇠퇴하고 절대 왕권에 의한 사회가 확립된 시대였다.
한편 가톨리에 항거하여 종교 개혁과 절대 왕권의 궁정 문화 등을 배경으로 웅대하고 화려한 바로크 형식에 의한 여러 예술이 유럽 여러 나라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음악의 특징으로서는 대위법적인 다성(多聲) 양식의 완성과 화성 양식이 대두되었으며 숫자 저음에 의한 기보법의 보급을 들 수 있다.

한편 왕후와 귀족 사회에 있어서 세속 음악의 발전과 호화롭고 대규모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여러 나라의 음악이 발달되었고 조성 개념이 명확해졌으며 화성 이론이 현저하게 되었다.

 


작품에 있어서는 오르간과 하프시코오드에 의한 푸가, 코랄 전주곡, 변주곡, 모음곡, 소나타 등과 실내악에 '솔로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인 '솔로 콘체르토', '콘체 르토 그롯소' 서곡과 관현악 모음곡, 서곡의 일종인 신포니아 등이 있다.
극음악으로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다성적인 가곡과 숫자 저음의 반주가 붙은 가곡이 있었다.

 


악곡의 형식에 있어서는 아리아나 무곡 등으로 된 A-B-A, 변주곡 형식(변주곡, 파르티타, 샤콘, 팟사칼리아)과 푸가, 옛 스타일의 론도 A-B-A-C-A-D-A 등. 작곡가로는 몬테베르디, 륄리, 코렐리, 퍼어셀, 쿠프랭, 비발디, 텔레만, 라모, J. S. 바하, 헨델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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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출생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사망 2005년 11월 11일
미국 미국
국적 미국 미국
직업 작가,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1909년 11월 19일 ~ 2005년 11월 11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이며, 작가이자 경영학자였으며 스스로는 “사회생태학자(social ecologist)”라고 불렀다. 그의 저서들은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널리 읽혔는데 주로 어떻게 인간이 사업과 정부기관과 비영리단체를 통하여 조직화되는가에 대한 탐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20세기 후반의 많은 변화들을 예측하였는데, 이를테면 민영화분권화, 일본 경제의 발전, 사업에서의 판촉(marketing)의 중요성, 정보화 사회의 발현과 평생 교육의 필요성들에 대해 역설하였다. 1959년에 그는 지식 노동자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는데 만년의 그는 다음 세대 경영에서의 지식 노동의 생산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편집] 저서

  • Fredrich Julius Stahl, Konservative Staatslehre und Geschichtliche Entwicklung : 1933년, Tuebingen Mohr 출판
  • 경제인의 종말(원제 : The End of Economic Man, 1939년)
  • 산업인의 미래(원제 : The Future of Industrial Man, 1942년)
  • 법인의 개념(원제 : Concept of the Corporation, 1946년)
  • New Society(원제 : The New Society : 1950년, Harper & Row 출판)
  • 경영의 실제(원제 : The Practice of Management, 1954년)
  • America's Next Twenty Years : 1957년 Harper & Row 출판
  • The Landmarks of Tomorrow : 1959년 Harper & Row 출판
  • 결과를 위한 경영(원제 : Managing for the Results, 1964년)
  • 목표를 달성하는 경영자(원제 : The Effective Executive, 1966년)
  • 단절의 시대(원제 : The Age of Discontinuity, Guidelines to Our Changing Society, 1969년)
  • Technology, Management, and Society : 1970년 Harper & Row 출판
  • Men, Ideas and Politics : 1970년 Harper & Row 출판
  •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원제 :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Practices, 1974년)
  • 보이지 않는 혁명(원제 : The Unseen Revolution, How Pension Fund Socialism Came To America, 1976년)
  • Management Case Book : 1977년 Harper & Row 출판
  • 방관자의 시대(원제 : Adventures of a Bystander, 1979년) (자서전)
  • Song of the Brush: Japanese Paintings from the Sanso Collection 1979년
  • 격변기의 경영(원제 : Managing in Turbulent Times, 1980년)
  • 새로운 경제학을 위하여(원제 : Toward the Next Economics and Other Essays, 1981년)
  • The Changing World of the Executive 1982년
  • 가능한 세상의 마지막(원제 : The Last of All Possible Worlds, 1982년)
  • The Temptation to Do Good 1984년
  • 혁신과 기업가정신(원제 : In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 1985년)
  • The Discipline of Innovation, Harvard Business Review, 1985년
  • 경영의 최전선(원제 : The Frontiers of Management, 1986년)
  • 새로운 현실(원제 : The New Realities, 1989년)
  • 비영리단체의 경영(원제 : Managing the Non-Profit Organization: Practices and Principles, 1990년)
  • 생태학적 비전(원제 : The Ecological Vision, 1992년)
  • 미래기업(원제 : Managing for the Future: The 1990s and Beyond, 1992년)
  •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원제 : The Post-Capitalist Society, 1993년)
  • The Ecological Vision: Reflections on the American Condition 1993년
  • 자기경영 노트(원제 : The Effective Executive, 1993)
  • 다섯가지 경영원칙(원제 : five most important questions, 1993년)
  • The Theory of the Business, Harvard Business Review, September-October 1994년
  • 미래의 결단(원제 : Managing in a Time of Great Change, 1995년)
  • 드러커 온 아시아(원제 : Drucker on Asia: A Dialogue Between Peter Drucker and Isao Nakauchi, 1996년)
  •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경영자(원제 : Peter Drucker on the Profession of Management, 1998년)
  • 성과측정(원제 : Harvard Business Review on Measuring Corporate Performance, 1998년)
  • 21세기 지식경영(원제 :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년)
  • Managing oneself,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April 1999년
  • 프로페셔널의 조건(원제 : The essential Drucker)
  • Leading in a Time of Change: What it Will Take to Lead Tomorrow]] (2001년; with Peter Senge)
  • The Effective Executive Revised 2002년
  • They're Not Employees, They're People, Harvard Business Review, February 2002년
  • Next Society(원제 : Managing in the Next Society, 2002년)
  • A Functioning Society 2003년
  • 경영 바이블(원제 :The Daily Drucker: 366 Days of Insight and Motivation for Getting the Right Things Done 2004년)
  • What Makes An Effective Executive, Harvard Business Review, June 2004년
  • The Effective Executive in Action 2005년
  • 클래식 드러커(원제 : Classic Drucker 2006년
  • )

4대 강희제 康熙帝  (재위1661~1722년)

순치제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나 8세때 황제로 즉위해 61년의 재위기간으로 역대 중국황제중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황태자의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때 황제로써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닫고 학문엘 열중하며 지식을 쌓아나갔다.  


8세의 어린 황제앞에는 청나라의 1대, 2대 황제때부터 온갖 전쟁에서 용맹함을 보여 "만주 제일의 용사" 라는 평가를 받던 오배가 있었다.  오배는 청나라의 병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어 그는 거칠것이 없었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았고 심지어 어린 강희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구는등 방자한 행동을 계속하였지만 아무런 힘이없었던 어린 황제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씨름 구경을 하며 즐거워 하는척 하면서 명망 높은 학자들을 불러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았다.  오만방자하던 4명의 대신 중 한명이 사망하자 오배는 자신의 정적에게 24가지의 누명을 덮어 씌워 제거한 후 모든 권력을 손게 쥐게 되었다.  어느날 오배의 병문안에서 오배의 몸에서 단검을 발견하자  강희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만주족은 본래 몸을 지키기 위해 단도를 가지고 있는것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지." 말을 했지만 언젠가는 그 단도로 황제를 시해할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없애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善營이라는 특별군을 조직하고 관람했다.  실상은 오배를 속이며 황제의 친위대를 조직한 것이다.  강희제가 16살이 되던 해 오배가 홀로 궁정에 오자 사로잡고 그에게 30가지 씌어 처형을 하려했지만 오배가 죽기 직전에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따라 싸우면서 생긴 수많은 상처들을 보여주며 애원해 형량을 낮추었다. 


오배를 없앤 후 실권을 잡게 된 황제에게는 삼번(三藩)이라는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  강남 일대로 파견한 세명의 번(藩)왕들이 비옥한 강남 일대에서 세금, 군사, 관리의 임명등 모두 자신들의 맘대로 처리하며 각자의 지역에서 황제와 같이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신이 국사의 전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들의 세력은 큰 문제가 되어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 때를 기다릴 줄 알던 황제는 기회가 왔을때 놓치지 않고 번을 해체해버렸다.  신하들은 번을 폐지하면 틀림없이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번을 폐지해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고 폐지하지 않아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니 차라리 선수를 치는것이 낫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9년간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명나라의 장군으로 명을 배반하고 청나라를 도왔던 '오삼계'는 3명의 번왕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삼번의 난'이 일어나 반년이 채 되지 않아 강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을 손에 쥐에 되었다.  반란군들의 엄청난 기세에 몽골의 칸들이 강희제를 지원하겠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상황을 길게보고 끈질기게 대처했고 반란군인 오삼계는 지나치게 신중해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공격하지 않고 어물거렸다.  오삼계의 반란군은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 만주족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한족의 명나라를 수복하자'는 명목이었지만 오삼계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빌붙은 인물이라 한족들이 큰 호응을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한족 출신의 명장들을 대거 등용해 반란군에게 역습을 하게되고 반란군의 장군들 중 자결하는 자도 있고 투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와중 반란군의 총대장인 오삼계는 노환으로 사망하자 9난간의 '삼번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그 당시 대만등은 청나라가 아닌 독립 지역으로 '삼번의 난'에 가담하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였다.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 한 후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대만의 전설적인 인물인 '장성공'은 무역을 하던 명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일본인의 어머니와 사이에서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명나라로 유학을 온 인물로 일곱살에 명나라로 유학을 할때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을 소탕하는등 큰 공을 세워 명나라 조정의 벼슬을 받았다.  명나라의 장수인 '오삼계(삼번의 난을 일으킨 인물)'가 변심해 청나라에 투항 한 후 명나라를 쳐 자신이 몸담았던 한족의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을때 그는 명나라의 황손인 주율건이라는 인물을 융무제로 세워 남명(南明)왕조를 건국해 명나라에 대항했다.  남명의 황제는 정성공을 높이 여기어 그에게 명나라 황제의 성인 주씨 성을 하사했으나 곧 남명의 황제인 융무제는 청군에 잡혀 굶어 죽게 되었고 정성공의 일본인 어머니가 죽게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나라와 전쟁을 하게된다.  정성공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청나라는 그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정성공은 전혀 듣지 않자 분노한 청나라는 아버지 정지룡을 잡아 천천히 살을 떠서 죽였다.  명나라를 침공했지만 태풍등으로 계속 좌절하자  정성공은 장기 전투를 생각해 청나라가 쉽게 공격하기 힘든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성공이 대만에 도착했을때 대만은 네덜란드인들의 동인도 회사가 대만을 점령하고 있을때 정성공은 2만의 군대로 10개월동안 네덜란드인들을 압박해 네덜란드들로부터 통치권을 전부 넘겨준다는 문서받고 대만의 왕으로 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오래 전부터 골치덩어리인 대만을 청나라로 흡수할 려고 했지만 네덜란드로부터 배운 서양문물로 만든 배들이 몹시 빨라 바다에선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무역으로 먹고 살던 대만인들에게는 청나라의 오랜 침공으로 무역을 하고 대만인들의 삶은 점점 힘들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청나라는 침략보다는 많은 뇌물을 동원해 정씨 집안에서의 분란을 유도하기 사작했고 대만의 왕족들은 후계자 쟁탈전을 벌여 대만인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후계자 쟁탈전으로 12세의 어린 '정극상'을 대만의 왕의 자리에 올린' 풍석범'이란 사람이 전권을 손에 쥐고 전횡을 휘둘러 대만인들 사이에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만군은 패배하고 청나라에 귀속되었다.  


대만을 점령한 강희제는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들은 칭송할만 하다" 며 대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희제의 성군정치를 펴 내,외부의 적을 없앴지만 북쪽의 러시아는 강희제의 아버지인 순치제때부터 많은 전쟁이 극심했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파견되어 러시아군을 물리친 '나선 정벌'이 이 시기의 전쟁 중 하나이다.   국경에서 러시아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등 계속 세력을 넒히려 해 분노한 강희제는 강경책으로  러시아의 요새 아르바진을 점령합니다. 그 후 청군과 러시아군은 몇차례 더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다 협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양국간에 조약을 맺게 되었다. 


1. 헤이룽강의 아르군·케르비치 두 강과 외싱안링 산맥(外興安嶺)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정하고 알바진 성은 파괴할 것

2. 흑룡강에 접하는 아르군강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 북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다.

3. 월경자의 인도와 처벌

4. 양국 민간인 사이의 교역의 자유 등을 규정하다

5. 과거의 갈등은 일체 불문에 부친다. 각자의 나라에서 정당한 업무활동을 하는 양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6.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며, 앞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조약이 의미의 가장 큰 의미는 이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나라와 외교할때의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천자(황제)의 것이다”  라며 신하의 나라, 형의 나라였지만  이 조약문으로 두나라가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다것이다.  그전까지는 로마 교황이건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건 그저 신하로 세계사에 안하무인이었지만 이 조약 하나로 새로운 청나라로 세계속에 발을 디딘것이다.  


강희제가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청의 태조 누르하치가 설립한 팔기군 제도를 강화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단속했으며 능력이 있으면 한족 출신의 장군들도 높이 등용했고 과거 적이었던 인물들도 포용하여 지휘관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학문을 사랑했고 호신술로 무예를 열심히 익혔으며 서양에서 온 여러 책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라틴어를 배웠고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화살의 명수로 사냥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만주족 전통의 기마술이나 무예도 부지런히 익혀 문무를 겸비했다.  또한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는 역대 황제와는 달리 폭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분별있게 먹으며 나이가 들서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학문을 사랑하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끝이 없었다.  서양의 여러 학문을 배웠으며 그들의 지리와 역사, 수학등을 배웠고 서양의 우수한것을 인정하고 배워나갔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지 않았고 배울 생각도 없었으나 가톨릭의 포교와 종교의 자유를 허가했다.  그가 무엇을 질문하면 신하들은 쩔쩔맬 정도로 엄청난 학문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옆에서 지켜본 서양인 선교사이 귀국해 중국 학회를 세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는 유교를 숭배했지만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카톨릭을 믿지도 않았지만 카톨릭의 선교활동을 금하지도 않았다.  현대 중국어의 어법을 확립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완성해 현대 중국어의 기틀을 잡았던 그의 68번째 생일 날에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서양 선교사들 등 수많은 인종들이 차별없이 참가했으며 각기 3000여명의 다른 민족들이 모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라며 명나라말기 무려 10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고작 400명로 줄여 국고의 낭비를 줄였으며 옷이 찢어지지 않는한 최대한 꾸메어 입기조차 했다. 그는 강남을 자주 순회하며 백성들의 삶이 풍성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황제였다.  평생동안 하루에 300~400통이 넘는 보고서를 모두 보고 답변까지 달아주며 그 모든것을 처리한 후 잠이 들었다.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이지만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어소박하기 그지없어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이었다.  한족 출신이 아닌 만주족 출신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에도 불구하고 한족에게조차 존경을 받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황제 강희제는 35명의 아들과 20명을 딸을 두었다.  


그의 61년 재위기간은 중국의 역대 황제중 가장 긴 재위기간이었지만 청나라를 황금의 시대로 이끈 성군으로 그는 평생의 좌우명을 삼국시대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보고 제갈량이 남긴 말중에 鞠躬盡瘁 鞠躬盡瘁(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로 삼아 평생 이뜻을 가슴에 새겨 모범으로 삼고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신하들에 '제갈량의 말은 신하가 군주를 모시는 태도에 관한 말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따르시겠습니까?'  라는 신하들에게  '나는 하늘을 섬기는 신하이외다.'   청나라에 이런 황제가 있었다는게 청나라의 축복이었다.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이대엔 과학의 피 흘러 … 노벨 과학상 1호 낼 것”
대학 경쟁력을 말한다 -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이화여대 캠퍼스의 가을은 젊었다. 교문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뻗은 계곡형 건물 사이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명 건축가인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캠퍼스 ECC(Ehwa Campus Complex)다. 2008년 연면적 6만6000여㎡에 6층 건물로 개관한 ECC는 이대 변신의 상징이다.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서는 학생들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김선욱(59) 총장은 "125년 역사의 이대는 끊임없이 변신 중이며 이공계 교육에서 미래를 찾겠다"며 "한국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24일 총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캠퍼스에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이대가 조용해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그렇지 않다. 그동안 등록금, 파주캠퍼스, 감사원 감사 등 여러 문제가 있었으나 내실을 기하느라 분주하게 지냈다. 이화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1946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 공식 인가를 받은 이대는 의대·공대·로스쿨 등 여자대학으로서 모든 것을 갖췄다. 대학의 미래를 과학에서 찾으려고 한다. 노벨 과학상 1호를 우리가 낼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는 구상이 생소하다.

 "나는 법학자지만 총장이 된 후에는 과학 쪽에 쓰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면서 교육할 수 있으려면 대학의 이공계 연구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학생과 교수가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얻으면 대학은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과학은 인류에 기여하지만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이디어는 세계적인 벨기에 화학기업인 솔베이(Solvay)에서 얻었다."

 이대는 올해 5월 세계 5대 화학업체인 솔베이의 글로벌 연구개발(R & D)본부를 유치했다. 세계 다국적기업이 국내 대학과 공동으로 R & D센터를 설립하기로 한 것은 처음이다. 솔베이는 이대에 2013년까지 2150만 달러(약 280억원)를 투자해 산학협력동 건축과 장학금, 연구인프라 등을 지원한다. 김 총장은 "솔베이와 우리가 '제2의 마담 퀴리를 키우자'는 데 공감했다"고 했다.

 -글로벌 산학협력만으로 노벨 과학상이 나올까.

 "3년간 연구비 100억원을 투자하는 '이화 글로벌 톱5'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대학이 교비에서 100억원을 연구에 투자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글로벌 연구역량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톱5는 어느 부문에 집중하는가.

 "나노·바이오·화학·에너지·녹색성장 분야를 생각 중이다. (집무실 책상 위의 솔베이 태양에너지 비행기 모형을 가리키며) 글로벌 산학협력의 모델을 제시하겠다. 이화에는 '과학'의 피가 흐르고 있다.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도 이화인이고, 바이오·나노 융합 분야를 처음 연구한 대학이기도 하다."

 -노벨 과학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새 개념과 분야에 대한 연구, 이를 통한 사회적 기여가 필요한데 우리는 과학의 역사가 짧다. 기존 연구를 넘어서는 데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새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선구적인 자세를 추구해 온 이대가 노벨상 배출에 잠재력이 큰 이유다."

 -대학 경쟁력은 교수에게서 나온다. 교수들이 더 피곤해져야 한다.

 "(웃으며) 교수님들 요즘 정말 피곤하다. 연구·강의 다 잘해야 한다. 세계적인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올린 분들에게 인센티브를 더 줄 생각이다. 경쟁무대는 국제다."

 -정부가 등록금 문제로 사학을 감사하는 등 자율권 훼손 논란이 있다.

 "대학이 책임을 지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사립대에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니까 자율성이 퇴보한 느낌이 든다. 다양한 대학을 일률적으로 가이드하면 발전이 없다."

 -대학이 뽑는 경쟁만 하고 가르치는 경쟁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이 있다.

 "입시 자율이 거의 없다. 고교의 평가를 각 대학이 그대로 활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사회적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이대는 지난해부터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교수학습센터에선 강의 개선을 원하는 교수들에게 강의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컨설팅한다. 인문학·글쓰기·리더십·다문화·다언어 교육을 1~2학년 때 완벽하게 시킬 것이다."

 -등록금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9월에 교비회계 장학적립금을 1350억원 늘려 총 2097억원이 됐다. 기존(747억원)의 세 배, 전체 적립금(6569억원, 2010년)의 3분의 1이다. 국내 최대 규모다. 적립금 운용수익 장학금도 60억원 늘어나 연간 235억원, 2015년에는 410억원이 된다."

 -학생들이 취업 문제로 고민한다. 졸업 후 서비스도 필요하다.

 "경력을 밀착 관리하는 이화케어넷(Ewha CareNet)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여성은 졸업 후 사회·직장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데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해주겠다는 뜻이다. 취업, 법률상담, 경력관리, 대학원 진학 등이다."

인터뷰=양영유 정책사회 데스크

정리=박수련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 yangyyjoongang.co.kr >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1952년 서울생. 명동 계성여고 학생회장에 이어 이화여대 법학과에 수석 입학한 뒤 3학년 때인 1973년 총학생회장을 맡아 유신 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88년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행정법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95년부터 이화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다. 2005년 1월~2007년 4월 최초의 여성 법제처장(장관급)을 역임했고, 한국독일동문네트워크 아데코(ADeKo)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9월 제14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평. 산행(山行)을 즐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 문화산업 비법은?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리스크 큰 CT<컬처 테크놀로지>산업… 내 성공 비결은 매뉴얼, 인내 그리고 꿈"

5만5000명의 청중이 야광봉을 흔들며 파도처럼 물결 치고 있었다. 5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을 거의 모든 청중이 내내 서서 지켜봤다. 소녀시대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고, 따라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회장이 말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 ·가상국가)'이란 말이 실감 났다.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일본인이기도 하거니와 'SM엔터테인먼트'라는 가상국가의 국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1만2800엔,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이다. 그런데 맨 앞자리이든 3층 맨 뒷자리이든 객석 어느 자리나 티켓 값이 똑같다. 이수만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는 오직 '충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인터넷 예매 때 1초라도 빠르면 앞자리에 앉고, 5분이 늦으면 맨 뒷자리에 앉는 식이다.

원래는 4월에 갖기로 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3·11 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공연이 무기 연기됐다. SM측은 티켓값을 환불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팬들이 결사 반대했다. "로또 당첨되듯 표를 구했는데, 왜 뺏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불해 주지 않고 돈을 고스란히 5개월을 갖고 있다가 공연했다.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영 석학 장 클로드 라레슈 교수가 "제품을 고객에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팔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라. 스스로 물살을 만들어 올라타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게 딱 떨어지는 예일 것이다.

기자는 이수만이 부른 ‘행복’이며 ‘모든 것 끝난 뒤’와 같은 노래를 듣고, 그가 진행하는 TV쇼를 보며 자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만난 그의 나이가 만으로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었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지난해 그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강연 제목이 ‘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Don’t try to cut your ears)’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반 고흐 같은 천재가 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천재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천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어요. 반 고흐의 천재성은 남들이 못 갖고 있는 오감(五感)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는 음악을 들어도 그림이 보이고, 음식을 먹어도 그림이 보였을 겁니다. 이수만이란 사람은 반대로 그림을 보면 음악으로 들리겠죠. 어느 날 고흐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막 녹아내리는 겁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보이는 거죠.”

―감각이 통합되는 경험 말씀이군요.

“예. 사실 그런 경험은 천재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흐도 그런 느낌을 처음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게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귀를 잘라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안 돼 있어서 생긴 비극인 셈입니다.”

그는 주먹구구식이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흐처럼 천재의 싹을 가진 연습생을 뽑아 13년 동안 장기 육성해 아이돌 스타로 길러냈다.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시스템화가 필요

하지만 13년에 이르는 장기계약은 ‘노예계약’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 끝에 계약 기간을 한국에만 있을 경우 7년, 해외에 나갈 경우 10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13년이란 시간은 연습생에게는 물론, 경영자에게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기간 동안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는 약속이니까.

가수이자 TV쇼 진행자였던 이수만.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SM을 통해 수많은 아이돌을 길러낸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수만 회장은 K-팝이 전 세계를 휩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장기 계약에 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꼽았다.

“우리 같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미국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장기 계약해서 오랫동안 트레이닝하는 일이 미국에선 못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에이전시 제도라고 해서 가수나 연예인이 스스로 커지면 에이전시 회사에 일을 하도급을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에이전시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유망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뒤늦게 문화산업이 발달한 한국이나 일본은 자유 계약이 가능했고, 그래서 장기 투자를 하게 된 겁니다.”

―CT(컬처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만드셨는데, CT 산업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은 뭡니까?

“IT 산업을 흔히 고위험-고수익 산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CT 산업은 한술 더 떠 초고위험-초고수익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공의 예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뛰어난 도자기공이 독보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기술은 그의 감각과 손끝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 배워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기술을 잘 성문화(成文化)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리고 이것을 잘 전수해서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하나의 산업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SM은 이걸 하자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 또 우리 직원 누군가가 갖고 있는 기술, 이런 것들을 성문화하고, 교육을 통해 전수하자. 그래야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문화산업 특유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시키는 매뉴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충고는 비단 엔터테인먼트산업뿐만 아니라 ‘초불확실 환경’에 직면한 모든 기업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충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영자라면 감성 지향의 우뇌형 경영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쉬운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다분히 좌뇌적이었다.

그는 “이수만이 없으면 SM이 끝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래서 이수만을 대신할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내에 춤과 노래, 믹싱 등 각 분야 전문가 6명으로 만든 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플러스 알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수만의 머리를 카피한 것 이상이 나올 것이고 SM은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만 경영의 요체는 ‘인내’

이수만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그의 성공 비결을 “최고를 위한 인내의 경영”이라고 표현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가수를 고르고, 좋은 스태프를 고르고, 좋은 음악을 고른다. 그런데 그 선택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이수만 회장이다. 선택을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를 검토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포기한다.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en cost)’이 발생하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정쩡한 제품에 목을 매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최고가 될 때까지 투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수만 회장이 키워낸 대표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는 요즘 새로운 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콘셉트의 팀 두 팀을 구성해서 한 팀은 한국에서, 다른 한 팀은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곡을 부르게 된다. 가칭 M1과 M2이다. 두 팀의 타이틀곡 하나를 쓰기 위해 SM은 지난 8월 덴마크노르웨이에서 뮤직캠프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 작곡가 50여명이 모여서 3~6일간 SM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곡을 쓰는 행사이다. SM측이 M1과 M2를 보여주고, 원하는 콘셉트를 이야기하고, 리듬을 들려주면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곡을 창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두 차례나 했는데도 아직 M1과 M2의 타이틀곡을 못 골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비를 다 날린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트레이닝, 둘째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 셋째 곡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새 팀 하나 론칭하는데 보통 4년이 걸립니다. 동방신기 곡 하나 쓰는데 50명이 모여서 썼고, 맨 처음 데뷔하는 데 40억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음반을 내는 프로모션비가 또 40억원씩 들어갑니다.”

그는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팀에서 최고를 한 사람씩 뽑아서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팀을 구성했고, 그것이 동방신기였다. “여기에 선발되지 않은 팀은 모두 와해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팀 중에서 음악도 잘하고 버라이어티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키운 게 슈퍼쥬니어였어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저희도 미안해서 도와주게 됐지요.”

그 슈퍼쥬니어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 슈퍼주니어는 유럽, 태국, 남미에서 최정상의 가수이다.

◇동양의 할리우드를 한국이 만든다

―미국 LA에 이어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 진출한다기보다 SM타운이란 가상 국가의 동포들이 거기에도 있으니 위문공연차 가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미국보다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머지않아 동양에 할리우드가 생기면서 문화의 중심이 갑자기 이리로 대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미국에서는 동양 노래를 잘 모른다고요? 전혀 상관없어요. 중심은 아시아가 될 거니까요.”

그는 “아시아에 제2의 할리우드가 생긴다면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업고 가는 전략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프로듀싱은 우리가 하고, 마케팅은 일본이 하고, 가수나 탤런트, 감독은 중국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해서 그 큰 시장의 3분의 1만 우리가 가져와도 우리 국민이 4500만명밖에 되지 않으니 1인당으로 따지면 우리가 가장 수혜를 보지 않을까요?”

그는 늘 꿈을 꾼다. 그가 새로 꾸는 꿈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뮤지컬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팀을 선발해 공연하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이 클래식과 팝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가 화합해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내용이란다. 그동안 나온 SM엔터테인먼트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섞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쓰던 중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이던 테디 라일리가 소녀시대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썼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수만 회장은 “SM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를 배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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