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노인이 시인 데뷔하고, 평범한 주부가 베스트셀러 작가 되고… 누가 개천에서 용이
못난다고 했나
지난 9일 서울 경희대 강당에서 열린 '김미경<사진>의 드림온 콘서트'에 5000여명이 몰렸다. 상당수가 20대로
보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 7시부터 기다린 첫 입장객은 고등학교 1학년생. 50세 아줌마의 '꿈' 이야기를 들으려고 12시간30분
동안 찬바람을 맞았다. 강당 안 풍경은 종교 부흥회 같았다. 거대한 군중이 모두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발을
굴렀다.
지난 9일
김미경 강연이 열린 이 강당은 2010년 8월 한국 사회에 ‘정의’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강연한 곳이다. 경희대 관계자는
“샌델 교수의 강연보다 김미경 콘서트에 훨씬 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고 전했다. / 이덕훈 기자
돈보다 꿈없는 사람이 루저, 돈이나 과시하는 졸부들, 부모 돈 믿고 설치는
애송이 돈 많은 남자에게 운명을 건 된장녀 너네들…
"오늘은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또 일어날 수
있잖아.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다시 뜨잖니. 자 힘들지만 다시 말해봐. I'll say yes!"
88만원 세대, 분노, 위로,
힐링….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절망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망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열심히 꿈을 찾는 수많은 사람의 열정이 커지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평범한 주부가 요리책, 패션책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팔순 노인이
시인으로 데뷔한다. 꿈을 이룬 그들을 따라 엄청난 인파가 요리학원, 글짓기학원, 패션학원에 몰린다. 엘리트 외교관이 몇평짜리 우동집 주인으로
전직(轉職)하고, 한동네 주민 모두가 '기부' 선행에 동참한다. 아이가 "엄마, 줄넘기가 내 꿈이야"라고 말하면 아빠까지 동참해 줄넘기 강습에
몰입한다. 모양과 의미가 다르지만 다들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 '여자 비아그라'란 별명을 가진 '희망교
교주(敎主)' 김미경(金美敬)이 서 있다. 동네 피아노 학원장, 무명 강사에서 출발한 그는 지금 '국민 강사' '국민 언니'로 불리면서
5000명씩 신도를 몰고 다닌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라고 물으면 안철수·김난도·혜민과 같은 화려한 스펙으로 답하기 어렵다. 자칭
"증평 촌년" 김미경은 "엄마 말도 안 듣는 아이들이 왜 엄마보다 더 늙은 나에게 '언니, 언니' 하면서 찾아오느냐?"고 반문한다. 그것도
'꿈'이란 뻔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게다가 김미경의 언사는 불편하다. 안철수·김난도·혜민이 내세우는 '위로'란 세일즈 포인트를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김미경은 젊은 여자들에게 "술자리에 참석하고 상사에게 술을 사면서 회사의 남자를 네편으로 만들라"고
독촉한다.
김미경이 일으키는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이 시대의 루저(loser·패배자)가 '돈 없는 사람'에서 '꿈 없는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김미경'이란 창(窓)을 통해 돈을 과시하는 부자들, 돈 많은 남자에 운명을 건 된장녀, 부모 돈을 믿고
설치는 애송이, 사회를 원망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그것이 사실이든 환상이든 김미경은 '가난을
엄청난 자산(資産)'으로 인식하도록 대중을 선동하고 유도한다.
'가난은 천형(天刑)이다. 부자 아이가 부자 되고, 가난한 아이는
가난뱅이가 된다.' 몇년 전부터 우리는 이런 인식에 포박됐다. 김미경은 반발한다. "개천에서 용 못 나는 시대라고? 너희가 봤어? 난 지금도 용
나는 거 보고 있어!" 경희대 강연 이틀 뒤인 11일 서울 마포구의 집필실에서 김미경을 다시 만났다.
◇그들이 찾는 건,
'내일'
―바쁘시죠?
"이달 들어 내 맘대로 쓴 시간이 딱 3시간이었어요. 우울할 때도 있어요. 그거 아세요?
드림 워커(꿈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가 있고 드림머신(꿈을 좇는 기계)이 있어요. 내가 머신이 됐다는 생각도 해요. 그럴 땐 '이렇게 멋진
머신이 어디 있어?' 하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막 열광하고 '인생이 바뀌었어요' '꿈을 찾았어요' 하는데."
―책은 얼마나
나갔어요?
"다 합치면 100만부 가까이 되지 않을까요. 옛날 책도 계속 팔려나가니까요.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가 8년째
나가고 있어요."
―얼마나 버세요?
"직원 20명의 3개 회사 매출이 그런대로 자리가 잡히는 상황까지 왔어요. 강의는
21년 노하우잖아요. 기업에 강의를 나가면 100점 맞는 방법이 눈에 보이죠. 요즘 어떤 기업이 어떤 콘텐츠에 목말라 한다는 걸
알아요."
―'드림온' 강연은 종교 집회를 보는 듯했어요.
"잘 보신 거예요. 꿈은 원래 종교이니까. 꿈이란 품목
자체가 종교가 되기에 가장 쉬워요. 옛날 사람들은 뭐가 안 되면 종교에 매달렸잖아요. 싹싹 빌었잖아요. 누군가 있을 거라고 믿고. 그런데 요즘엔
누군가에게 빌지 않아요. 자기에게 빌어요. 그게 꿈이에요. 미국에도 자기에게 비는 치유적 힐링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그게 종교를 대체해요.
그래서 꿈은 내 안의 종교예요."
―5000명이 왜 왔다고 생각해요?
"제 나이가 쉰이잖아요. 자기 엄마보다 나이가
많거든. 나이 든 아줌마, 완전 노땅이잖아요. 젊은 얘들, 노땅 얘기 잘 안 듣잖아요. 그런데 왜 내 얘기는 듣느냐고. '언니, 언니' 이러면서
중학생들이 메일을 정말 많이 해요. 언니라니? 내가 네 엄마보다 나이가 몇살이나 많은데. 꿈의 길은 100가지도 넘는데 학력으로만 줄을 세우니
아이들이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출구에서 뭘 찾는다고 생각해요?
"내일.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게 뭐예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밀려오는 막연한 불안감.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내일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꿈이 있으면 꿈을 이루기 위한 '작용'이
일어나잖아요. 그 작용만 일어나도 사람은 안 불안한 거예요.
돈이 있든 없든, 무언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있고, 그런 생각에
움직이기만 해도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아요. 꿈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굉장한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힐링(healing·치유)은 같은
단어예요.”
―김미경의 힐링은 자본주의적이고 전투적이네요.
“문제를 해결해야 치유가 되지요? 안 그래요? ‘나는
괜찮아, 잘 될 거야’ 이렇게 말만 한다고 잘 되느냐고요. 돈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돈이 생겨야 힐링이 되지요. 직업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직장에 들어가야 힐링이 되지요. 소극적 힐링이 아니라 적극적 힐링을 얘기하는 거예요. ‘해낸 인간’이라는 자신감,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이야말로
최고의 힐링이지요.”
―붐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요?
“믿을 게 없잖아요. 직업이 금방 생기는 것도 아니야,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지도 않아. 결국 내 안에 있는 걸 써야 되잖아요. 내 안에 있는 가능성, 내 안에 꿈이 있다고 믿고. 어려울수록 계속되겠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각박해도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팽개치지 않아요.”
◇촛불은 밤에 켜고, 낮엔
꿈을
절망의 88만원 세대에게 사회가 이렇게 만들었으니촛불을 켜야 한다? 좋아, 하지만
어떻게 24시간 켜니? 밤에 촛불 들더라도 낮엔 네 꿈 위해 일하면 안되겠니?
사람들이 내게 찾는 건 來日의 희망… 어려울수록 꿈 열풍
계속된다
―젊었을 때 어떻게 힐링했어요?
“서울에 올라와 가장 괴로웠던 게 뭔데요.
3대째 잘난 것들을 보는 거였어요. 지금도 천지잖아요. ‘증평 촌년인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있을까’ 20대부터 고민했어요. 그때 ‘괜찮아,
괜찮아’ 그러는 말에 따랐으면 지금 뭐가 괜찮겠어요? ‘다 나와, 다 붙어, 다 죽었어’ 하면서 꿈을 가지고 싸우고 스스로 상처를 힐링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는 나 하나예요. 내 안에 열정, 에너지, 모든 것이 있어요. 그걸 막 꺼내서 갖다 쓰면 돼요. 자기 안에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열정에 불을 지피는 매개체가 꿈이거든요. 어려울수록, 결핍될수록 막 꺼내쓰잖아요.”
―요즘은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해요. 이런 사회에서 ‘꿈은 신기루’란 반발도 있지요. 신기루를 팔아먹는다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란 책도 있지요.
꿈을 선동해서 열정의 노동자로 만들어서 대기업 CEO의 배를 불린다고. 사회를 고치지 않고 왜 개인의 꿈만 이야기하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장(場)을 왜 얘기하지 않는가. 이런 말이지요. 그런 의견, 중요해요. 다만 사회에는 각자의 꿈에 충실하게 살면서 조금씩 주변을 바꾸는 사람도
있어요. 촛불만이 아니라 꿈도 켜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충실함이 모여 5년, 10년 지나면 역사가 서로의 성과를 가지고
합의해 주는 것 아닌가요.”
김미경은 1964년 충북 증평에서 태어났다. 돈, 장사와 인연이 없던 아버지 대신 50년 동안 옷을
만든 어머니가 가계를 돌봤다. 연세대 작곡과를 수석으로 들어갔지만, 졸업 후 남은 이십대를 서울 송파에서 피아노학원 원장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29세에 꿈을 품고 전문강사의 길을 걸었다. 김미경은 강연과 저술에서 ‘나도 했으니, 너희도 할 수 있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꿈을
이룬 성공 사례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386세대이지요. 학력고사 세대. ‘증평 촌년’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촌놈도
많았어요.
“재경향우회를 가면 짜장면 집에 촌놈 200명이 꽉 찼다니까. 그런데 지금 재경향우회가 없어지고
있다잖아요.”
―우리 세대는 성장시대였으니까. 성장시대 이야기를 듣고 요즘 젊은이가 “개천에서 용 난다”며 열광하는 게
신기해요.
“아니, 지금도 개천에서 용 나요. CEO를 상대로 강의하기 때문에 잘 알아요. 10, 20년은 부모 역량으로 살 수
있지만 마흔 넘으면 다 기초역량이에요. 명문대에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으로 들어간다는 건 다 과장이죠. 20대 학력이 평생을 보장하나요? 20년
후에 한 번 보자 그래요. 진짜 학력이 꿈보다 센지.”
―기회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잖아요.
“꿈을 사이즈로 착각하지
말자고요. 나답게 내 가치를 매일 실현해 나가면서 살자고요. 사회에 터뜨리는 불만의 에너지를 나에게 좀 더 집중해서 쓰자고요. ‘어제보다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이건 본능이잖아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잘돼.’ 이건 진리잖아요. ‘계층 이동은 이제 안 돼.’ 이런 소리를
하면서 왜 진리와 본능을 자꾸 끊어 놓느냐고요.”
◇꿈 과잉시대? 고갈보다 낫다
김미경을 만나기 전 서울대
내부 게시판에서 김미경 관련 글을 검색했다.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가장 꿈에 가까이 있을 듯한 사람들은 김미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봤다. 그중 많은 지지를 받은 글은 제목이 ‘김미경쇼(케이블TV에서 방송 중인 성공 이야기)가 사람 잡는다’였다. ‘꿈, 도전정신, 이런
것만 이야기하면서 그거 없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는 하루하루 만족하며 즐겁게 사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사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란다.’
―현실에 자족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비루해도.
“두 사람이 라면집을 창업했어요. 그중 한
사람이 체인점을 만들어 직원 1만명을 뒀어요. 남은 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면서 작은 가게를 이어가요. 둘 다 꿈을 이룬 거잖아요. 한 사람을
만족시키면 작은 꿈이고, 1만명을 만족시키면 큰 꿈인가요? 현실에 자족해도 좋아요. 중요한 것은 ‘나다움’이에요. 꿈 안에서 ‘나다움’이
일어나면 그게 가장 큰 꿈이에요.”
―그래도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꿈이 좋겠죠?
“꿈의 기본 속성이 원래
영향력이에요. 한 사람이 꿈을 이루면, 주위의 100명 이상이 꿈을 들고 일어나요.”
―요즘엔 너무 많이 들고 일어나서 문제가
아닐까요. 아이가 ‘이게 꿈’이라고 하면 부모까지 우르르 몰려가 다 해줘요. 꿈 과잉시대인 듯해요.
“꿈을 키워준다고 해도, 다들
생각은 같아요. 스물다섯에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그곳으로 가는 단거리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거예요. 김연아가 나오면 죄다 스케이트장으로
가고. 꿈을 꾸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기다리는 능력’이에요. 그래도 그런 현상이 나쁠 것은 없어요. ‘학력’ 하나에 목숨 걸기보다는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김미경의
힐링은 자본주의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는 “돈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돈이 있어야 힐링이 되지요. 직업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직장에 들어가야
힐링이 되지요” 하고 말한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을 복원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힐링의 정의다. / 이덕훈 기자
김병완 (필명: 주선용) 저술가, 강연가, IT전문가, 기업경영컨설턴트, 자기계발 및 독서법(공부법) 컨설턴트, 인물평론 및
자서전컨설턴트, 마인드개혁컨설턴트, 집필 및 저술컨설턴트, 개인 및 조직변화경영연구가. 저자 김병완은 삼성전자에서 10년 이상 연구원으로,
6시그마 전문가, IT 전문가로 활동하며 직장생활을 했다. 십 년이 넘게 회사 생활을 한 후 갑자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와 3년 동안 도서관에서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읽은 책이 9,000권을 넘었다. 3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책만 보게 되자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자기 자신 조차도
상상도 못했던 작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내면으로부터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는 글쓰기에 미치기 시작하자 한달에 네 권의 책도 집필할 수
있는 기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대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몇 십 배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5년 동안 어둡고 칙칙한 땅 속에서
남모를 인내와 준비의 기간을 가졌기 때문이듯, 저자 역시 3년이라는 세월동안 세상의 모든 욕심과 미련과 집착을 다 버리고,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독서만 하면서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준비 기간을 가졌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저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렇다. 저자는 3년 동안 남들보다 열배나 더 지독하고 치열하게 백배나 많은 책을 읽기 위해 피를 흘리고, 세상을
등지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폭풍 집필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마치
신들린 사람 같다’ 이 말이 저자의 집필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저서로는 『삼성비전 2020』, 『왜 결국 삼성전자인가』,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들』, 『뜨거워야 움직이고 미쳐야 내 것이 된다』, 『세상은 행동하는 자의 것이다』, 『40대 다시 한 번 공부에
미쳐라』, 『안철수의 28원칙』, 『박근혜의 인생』, 『대화 속의 숨겨진 진실』, 『내 인생 조금만 더 행복하길』,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단사리 마음혁명』, 『마흔, 행복을 말하다』, 『인생의 절반은 행복하게 살자』, 『마흔 즈음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들』, 『나는
성공의 지도를 보고 간다』, 『스케일』, 『어떻게 차별화를 할 것인가』를 비롯해서 2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출간했다.
목차
프롤로그 책! 인문학을 탐하다 10
제1부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제1장 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 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 18 인문학 독서의 올바른 자세란? 23 인문학 독서가 인생을 좌우한다
27 인문학 독서는 살아가는 힘이다 31 인문학 독서 vs 일반서 독서 34 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성공을 이끈다 39
제2장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44 위대한 투자자들은 모두
인문학 독서광들이었다 48 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53 인문학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 57 인문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둥! 65 인문학 독서는 쌍방향 통행이어야 한다 69 현대 문명을 이룩한 두 축! 인문학과 과학! 74
발명왕 에디슨의 아이디어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아이디어이다 78
제2부 책, 인문학을 탐하다 _ 고전 독서법
제3장 문학을 탐하다 문학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 84 문학이란 상상력과 언어의 만남이다 88 인간! 그
이상한 존재? _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91 문학 작품을 읽는 세 가지 방법 100 문학 작품,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104 갈망하는 삶이 문학이다 _괴테 『파우스트』 109 문학 서적을 읽을 때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들 115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학이다 _셰익스피어 『햄릿』 119
제4장 역사를 탐하다 역사란 무엇이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126 신화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 129 역사 서적을 잘 읽는 법 134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다 _사마천
『사기』 139 역사 서적을 읽을 때 던져야 하는 질문들 143 역사 서적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147
지혜로운 인간을 배우다 _호메로스 『오디세이아』 150
제5장 철학을 탐하다 철학이란 무엇이며 철학서는 어떤
책인가? 158 만인을 위한 철학 책 _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62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라 _니체의 조언!
176 반 권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린다! _공자 『논어』 18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_플라톤 『변론』 192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_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98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_데카르트 『방법서설』 207
제3부 통합적인 책 읽기의 세계에 빠져 보자
제6장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갇히게 된다 가장
위대한 세계는 책의 세계다 216 ‘3년 독서의 법칙’을 발견하다 219 3년 독서의 법칙 227 ‘3년 독서의 법칙’의
공식 233 3년 독서의 법칙과 10년 법칙! 238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갇히게 된다 244 인생을 경영하는
통합적인 책 읽기 248 책을 읽는 즐거움이 독서의 승패를 결정한다 251
제7장 시대 흐름에 맞는 통합적인 고전 독서법
기록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손을 움직여라 256 사색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뇌를 움직여라 263 취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몸을 움직여라 268 넘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발을 움직여라 274
부록 1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279
부록 2 분야별, 상황별, 권장, 추천 도서 1. 독서 초보와 독서 지도를 위한 도서 독서 초보를 위한
추천 도서 294 자녀들에게 독서 지도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추천 도서 294
2. 분야별 추천 도서
· · ·
3. 직업별 추천 도서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6 교사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6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일반 직장인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투자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마케터와 회계사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CEO와 리더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4. 나이별 추천 도서
꿈 많은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20대의 청춘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뜨거운 30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40대의 불혹을 위한 추천 도서 308 50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9 60대 및 어르신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9
뉴욕 타임즈 선정 100대 필독 도서 309 서울대 권장 도서 100선 310 시카고 대학교 고전 추천 도서
312
책속으로
인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더욱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인문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인간은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실상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그 발자취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기게 되는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질박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거품을 빼야 인문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위대한 지성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그렇게 거창할 필요도 없고, 거창해서도 안 된다. 인문학을 하면 고귀한 것이고 차원이 높은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결국 우리의 삶이다. 참된 인문학은 소박하고 질박하다. 우리의 삶도 참된 삶은 소박하고 질박하기 때문이다. 참된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을 잡아줄 수 있는 인문학 독서법이 최고의 독서법이다. 이것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큰 성공을 하더라도
인격이나 품성에 결함이 있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거나 수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참된 인생, 올바른
인생을 살다 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_<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에서
인문학
독서를 통해 우리는 편견을 깰 수 있고, 생각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고, 심지어는 새로운 생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강한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책들은 대부분 인문학 도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 독서만큼 우리의 생각을 넓혀주고, 사유를
확장시켜 주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견문이 넓어지고 생각이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작품과 위대한 인물,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만나고 경험한 것만큼 넓어지지는 않는다. 인문학 독서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인간들이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며, 위대한 영웅을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것이며, 위대한 사상과 조우하는 것이며,
시간의 축을 거슬러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인문학 독서인 것이다. 그러한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줄 수밖에 없고, 우리의
사유와 의식을 확장시켜 줄 수밖에 없다. _<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에서
우리는 보통 책을 읽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고 자녀들에게 권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무조건 책을 읽는다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일까?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것은 매우 비중 있는 요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일까? 필자는 절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주위에는 무수한 책벌레들이 있다. 필자도 책벌레다. 하지만 무수한 책벌레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큰 사람이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었지만 큰 성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 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책을 읽어서 큰 성공을 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책을
통해 성공하는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법칙대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식으로 독서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아래 3년 독서의 법칙에서 공식과 함께 자세히
소개했다. _<‘3년 독서의 법칙’을 발견하다>에서
출판사서평
〈이 책에 대하여〉 2012년 국립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자기계발서 TOP 10의 『48분 기적의 독서법』의
저자가 야심차게 밝히는 인문학 독서법을 만나보자. 저자 김병완은 그동안 각 기업체의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절실히 느껴왔던 부분이 인문학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문학 책을 일반 자기계발서와 똑같은 독서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기대
효과를 얻지 못하고 금새 포기하고 만다. 이를 위해 저자만의 독특한 인문학 독서법, 즉 ‘3년 독서의 법칙’을 제시한다.
인문학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기적의 인문학 독서법을 만나다 왜 인문학 독서인가 독서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도 차이가 생기지만,
인문학적 독서를 하는 사람과 그저 베스트셀러나 읽는 독서를 하는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시류에 편승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고, 직장에서 승진을 잘 하게 해 주는 그런 책만 읽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리더나 지도자에게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혁신하고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인문학적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인문학적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문학에는 인문학에 맞는 독서법을 찾아야 한다
독서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된다. 실용서를 위주로 한 일반서 독서를 할 때와 인문학 독서를 할 때는 그 방법과 마음 자세가
달라야 한다. 일반서 독서를 할 때는 다양하게 폭넓게 훑어보면서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는 식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인문학 독서를
할 때는 깊고 좁게 천천히 되씹으면서 가능하면 전부를 다 뽑아내기 위해 몸통 전체를 다 먹지만, 한 번에 한 입씩 먹는 식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을 재미있고 내실있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는 것을 어떨까. 인문학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지금
바로 확인해 보자.
독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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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도서관에 들렀다가 펼쳐져 있던 조선일보 북 세션을 살펴 보았다. 북 세션에는 새로운 신간으로 광고계의 거물인 데이비드 오길비의 전기 <무조건 팔아라>가 출판됐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예전부터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광고일을 하기 전에 요리사, 스파이, 심지어는 농부의 삶도 살았다는 그의 특이한 이력과 그가 남긴 전설적인 광고에 대한 설명, 80년 대 이후 광고계에 불어닥친 M&A 열풍 등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 바로 구입했다.
데이비드 오길비에 대한 전기
데이비드 오길비 밑에서 수십 년을 일했고, 그 자신도 오길비&매더에서 회장을 지냈던 케네스 로먼은 데이비드 오길비가 남긴 수 많은 메모들과 그가 남긴 저서, 그의 지인들에 대한 상세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전기를 작성했다. 그의 출생부터 전설적인 광고를 만들고 최고의 대행사를 이룩해 나간 과정과 WPP에 매각하고는 후회만 남은 고집스런 늙은이로 남았던 말년까지를 상세히 적고 있다.
나의 경우는, 이 책을 통해 오길비가 어떻게 3명이서 세운 광고 회사에서 클라이언트를 유치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전설적인 광고들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회사를 이끌었는지 등에 대한 그의 업적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책은 오길비의 전기에 더 충실한 나머지 그의 출생과 핏줄, 그의 언행과 인간성 등 오길비의 업적 못지 않게 인간성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광고 철학이 궁금한 것이라면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오길비가 남긴 저서인 <광고 불변의 법칙>을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이한 이력
앞서 말한데로 오길비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영국 태생이며 스코틀랜드 태생이다. 그는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각종 모임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나가 자신을 어필하기도 했다. 제법 큰 키에 다부져 보이는 몸매, 잘생긴 얼굴과 달리 그는 천식을 앓았고 운동을 잘 하지 못했다. 학창시절에도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학창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오길비는 죽을 때까지 돈에 집착했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시절의 가난에 대한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집은 가난했지만 그의 집안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명문 페테스(Fettes)를 다닐 수 있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는 이 학교를 모델로 만들어 졌고, 토니 블레어 총리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오길비는 페테스에서 읽기와 쓰기에 대한 기본을 익힌다. 그는 영어 문법 뿐만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라면 당연히 배워야 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과 읽기, 쓰기를 철저하게 교육 받는다. 제품의 특징을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기억에 남도록 카피를 작성했던 그의 능력은 아마 여기서 기초를 다진 듯 하다.
이후 옥스포드까지 장학생으로 진학한 오길비는 성적 미달로 옥스포드를 중퇴하고 만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일류 호텔 주방장 보조로 취직한다. 출근 첫날 벽에 기대어 감자를 깍던 그는 '여기서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하므로 똑바로 서서 일하라'는 주방장의 말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오길비는 그 때 주방장의 말이 일에 대한 그의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대통령 식탁에 올라갈 에피타이저까지 만들었던 오길비는 돌연 영국으로 돌아와 아가(AGA) 쿠킹 머신 세일즈맨으로 취직한다. 거기서는 그는 성실한 태도로 주부들에게 쿠킹 머신을 설명하고, 주방장 경력을 활용해 쿠킹머신 요리 교실도 열고 주부들에게 쿠킹 머신 활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그는 다른 세일즈맨에게 세일즈 매뉴얼을 작성해서 배포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형이 운영하는 광고회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에 건너가 매더앤크라우드의 자회사를 미국에 세우기 전까지 그는 영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을 돕고, 리서치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땅을 구입해 3년 간 농부로 지내기도 했다. (물론 농사일을 직접 한 건 아니다.) 특히 그는 리서치 기업 갤럽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직관과 감이 아니라 철저한 데이터와 시장 조사를 통한 과학적 분석을 중요시하기 되었다. 그래서 그는 쿠폰을 우편으로 발송하여 광고하고 회신률을 통해 광고의 효과를 측정하는 다이렉트 메일 광고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광고의 본질
이 책의 원제는 'The King of Madison Avenue: David Ogilvy and the Making of Modern Advertising'이다. 하지만 우리나라판의 제목은 '무조건 팔아라(We sell or else)'이다. 이것은 오길비의 광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강조한 말이다. 즉, 광고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발하고 재치있고 재미있는 크리에이비브를 발휘하더라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 광고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광고가 판매들 향상시키지 못하면 그 광고는 실패한 광고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오길비는 내용이 기법보다 중요하며, 사람들이 헤드라인만 읽고 바디카피를 읽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헤드라인에 제품 브랜드가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생동안 크리에이티브에만 중시하는 광고와 광고대행사들을 비난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예를 들며 원칙과 형식을 중시한다고 해서 결코 광고가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오길비는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한 거의 최초의 광고인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에 대행사를 차리고 처음으로 히트시킨 광고인 헤서웨이 셔츠의 광고도 바로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였다. 그는 모든 광고는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장기적인 과정 중의 하나로 여겼다.
안대를 착용한 신사가 옷을 재단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이 광고는 뉴욕타임즈에 실리며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된다. 해서웨이 드레스 셔츠를 광고하면서 셔츠 자체보다는 그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 남자의 스토리를 통해 다른 셔츠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이는 사실 이야기하는 기법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광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위배하지 않았다. 해서웨이 셔츠는 이 광고로 인해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한 것이다. 이 광고는 이후 몇 년 동안 다양한 시리즈로 변주 된다. 영국의 탄산수 슈웹스를 미국에 소개하면서 오길비는 또 한 번 같은 방법을 시도하고 이 역시 성공을 거둔다.
오길비가 히트 시킨 롤스로이스의 광고는 그의 원칙과 잘 맞는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 안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움은 전자시계 소리입니다."라는 긴 헤드카피와 함께 이 자동차의 장점 13가지를 나열한 기나긴 바디카피를 담고 있는 이 광고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언제나 광고주의 상품을 애용하고, 직원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던 오길비는 결국 비싼 롤스로이스를 중고로 구입하고 만다. 회사의 회계담당이 반대하고 나서자 그가 휴가간 틈을 이용해서 말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광고 중 하나는 도브 광고이다. 도브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오길비의 광고는 사실 그가 인정하듯이 이미지와 헤드카피는 진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DOVE creams your skin while you bathe'에서 보듯이 오길비는 도브의 성분 중 1/4이 보습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특성을 광고함으로써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크리에이티브보다 내용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다.
카피라이터로써 크리에이티브 인으로써 오길비의 전성기는 사실 50년대에서 60년대 이르는 약 10여년 간의 기간이다. 오길비는 그 사이는 자신이 누구보다 천재적이었지만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탕진해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광고와 판매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세웠지만 반드시 그 원칙만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코 뛰어난 크리에이티브를 보이는 광고를 혐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
기업 문화의 형성
오길비는 광고에 제품의 핵심을 담기 위해 정말로 철저하게 일했다. 프랑스 주방장의 가르침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다른 대행사들이 어떻게 광고했는지를 샅샅이 조사했고, 제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카피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했던 그는 집에 갈때도 서류 가방 3개에 일거리를 잔뜩 들고 가기 일쑤였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자기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는 종종 열심히 일하지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해고하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 오길비는 자신이 휴가를 간 사이 그 직원들을 해고시키도록 했다. 오길비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것 만으로도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종종 직원들이 만든 광고물을 신란하게 비판하던 오길비지만 직원들이 대한 그의 태도는 정중한 편이었다. 그는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에 대한 기준은 아주 높게 설정해서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오길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일종의 기업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길비는 결코 최대의 광고대행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의 광고대행사를 만들고 싶어했다. 똑똑하고 재치가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토론하고 최고의 기준에 따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하는 회사. 그것이 그가 바라는 회사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 최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의 탄생
하지만 그의 바램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80년대 미국 대형 광고대행사 사시에 합병 바람이 불었다. 여러 개의 광고 대행사들이 옴니콤(내 첫 직장인 인터브랜드도 옴니콤 소속이다.), 인터퍼블릭, WPP로 재편 되어 갔다. 오길비는 자신의 전재산이 대행사 주식에 묶여 있어 주식공개를 원했다. 이사회의 반대에도 주식공개를 단행했던 오길비는 수년 뒤 WPP의 CEO 소렐이 오길비앤매더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긴장한다. 이사회와 수차례 회의를 갖고 소렐과도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주가의 2배를 주겠다는 소렐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거절한다하더라도 결국 소렐은 어떤 식으로든 오길비의 주식을 매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을 돈에 집착했지만 돈을 제대로 다룰 줄은 몰랐던 오길비는 이때도 큰 손해를 본다. 주식공개 후 자신의 주식을 꾸준히 매각했던 오길비는 소렐이 오길비앤매더의 주식을 2배 가치로 매수하겠다는 결정이 나기 2주 전에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모든 주식을 팔아버린 것이다. 광고를 만드는 법에는 누구보다 밝았지만 숫자에는 누구보다 어두었던 그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WPP의 CEO 소렐은 이와 반대다. 그가 왜 오길비의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 책에는 나와있지 않다. 이후 WPP의 행보를 보아도 세계 최대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을 만들겠다는 WPP의 야심은 회사의 크기 이외에는 뚜렷한 방향을 보이지 못했다. 오길비를 인수하느라 너무 큰 돈을 대출한 소렐은 이후 몇 년간 주가 하락으로 고생하지만 위기를 벗어나 다시 기업 사냥에 전념한다.
WPP는 소렐의 바램대로 세계 최대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되었지만 오길비앤매더의 분위기는 전과 달라졌다. 많은 임원들이 나갔고 사원들을 존중하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한 때 최고의 광고를 위해 신과 경쟁해야 한다던 분우기도 점차 사라져 가고, 광고 크리에이티브보다 숫자가 중요해지는 시기가 왔다. 오길비는 결국 WPP 합병에 단초가 된 기업 주식 공개를 죽을 때까지 후회했지만, 돈을 위해 WPP 회장직을 수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몇몇 대외관계를 위한 얼굴뿐인 명예직이었다. 그마저도 몇 년 후 (타의에 의해) 해임하고 만다.
모순된 원칙, 모순된 캐릭터
크리에이티브(표현)보다 내용을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때때로 브랜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광고에 활용한 카피라이터. TV를 통한 미디어 혁명 시대에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와 인쇄에 공을 들인 광고 전문가.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었으면서도 비행 공포증으로 언제나 배와 기차를 선호했던 광고 대행사 CEO. 평생 돈을 많이 벌고자 했지만 돈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속물.
그의 모순되고 다양한 면모들을 보면서, 비록 이 책 한 권으로 오길비를 접했을 뿐이지만 오히려 그가 한 없이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거침없이 남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에게 한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노인네로 말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그만큼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자신의 일에 대해 진지한 자세와 태도로 임했다. 원칙을 내세웠지만 때때로 원칙에 벗어나더라도 좋은 결과물들을 순순하게 인정할 줄도 알았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데이비드 오길비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이다. 그의 광고 철학과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일면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중심은 아니다. 오길비라는 인물과 오길비앤매더의 기업 역사, 50년대~80년대까지 미국 광고대행사들 사이의 경쟁과 관계 등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아시아경제 박선미 기자]KFCㆍ피자헛ㆍ타코벨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 외식 전문 업체 얌 브랜즈는 올해 미국 내 판매 부진 극복과 해외 시장 확대, 새로운 사업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데이비드 노박 얌 브랜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ㆍ59)는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과 회견을 갖고 "미국 시장에서 실추된 얌 브랜즈 이미지를 회복하고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ㆍ인도ㆍ프랑스 사업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얌 브랜즈는 지난해 안방인 미국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미국 시장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온 타코벨의 매출이 최근 급감한 탓이다. 이는 타코벨의 타코(옥수수빵에 여러 재료를 넣어 먹는 멕시코 전통 요리)에 쇠고기보다 다른 양념과 식품 첨가물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KFC도 닭고기가 신선하지 않은데다 따끈따끈하지 않다는 혹평을 받으며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노박은 미국에서 얌 브랜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타코벨 제품 혁신과 KFC의 이미지 제고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는 "프리토 레이와 협력해 도리토스 칩으로 만든 새 타코 쉘 제품을 다음달 출시할 계획"이라면서 "유명 요리사 로레나 가르시아와 손잡고 다른 제품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노박은 "고객의 매장 방문 시간대를 다양한 시간대로 분산시켜야 매출이 늘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침 식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박은 "KFC가 세계 곳곳의 매장에서 아침 메뉴 확대를 추진 중"이라며 "타코벨도 미 서부를 중심으로 800개 매장에서 아침 메뉴 서비스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피자헛도 과테말라에서 아침 서비스를 시도 중이다.
노박은 얌 브랜즈의 해외 시장 공략과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았다. 중국은 얌 브랜즈에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노박은 "얌 브램즈가 미국에서 미국인 100만명당 60개 매장을 갖고 있는 셈"이라면서 "중국에서는 100만명당 매장 수가 3개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회가 무궁무진한 중국에서 얌 브랜즈는 모든 외식업 부문의 선두에 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노박은 올해 안에 인도에서 새 매장 100개를 열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인도 시장에 관심이 많다"면서 "올해 100개 매장을 새로 열어 5년 안에 매출 1억달러(약 1125억원)를 달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박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일하다 우연히 피자헛에 입사해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고속 승진했다. 4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얌 브랜즈의 CEO로 등극한 뒤 얌 브랜즈를 세계 최대 외식 전문 업체로 키웠다.
명문 대학을 나와 경영학 석사과정까지 마친 다른 기업 CEO들과 배경이 다르지만 노박의 경영능력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도 인정한다. 버핏은 노박에 대해 "미식축구 공격수를 뽑듯 CEO를 선발하라면 노박을 택하겠다"며 "노박에게 버크셔 해서웨이의 경영을 맡기고 싶다"고 평했을 정도다
Hompany란 home과 company를 합쳐 만든 신조어로 '홈퍼니 경영'은 가정과 같은 직장분위기를 만들어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을 높히자는 전략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기업들이 홈퍼니 경영을 펼치고 있다. 집처럼 편한한 회사,경영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직장을 꿈꾸어 보았을 것이다.일본의 가나가와 시에는 '홈퍼니 경영'의 롤모델이 되고 있는 작은 분필공장이 있다.전직원이 70여며 명에 불과한 이 공장 앞마당에 들어서면 '일하는 행복상'이라는 조각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조각상에 있는 글귀를 읽어보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 카나가와 현 카와사키 시에 있는 작은 분필공장 일본이화학공업日本理化學工業 앞마당에는 ‘일하는 행복상’이란 조각상이 하나 서있다.
“으뜸가는 행복으로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도움주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네 가지를 꼽는다. 흔히 일을 하면 사랑을 뺀 나머지 행복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사랑마저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글귀가 적바림되어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2009년 일본에서 가장 으뜸가는 경영자에게 주는 ‘시부사와 에이치상’을 받은 이 회사 회장 오야마 야스히로(大山泰弘)이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IGM의 전성철 회장의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은 한 때 변호사였던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꿈에 부풀어있던 야무진 꿈을 가진 한 청년이였던 전성철은 꿈을 향해 정말 열심히 달려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꿈은 역시 꿈이었을까요. 시련과 아픔 고통은 늘 함께 했다고 하네요. 전성철의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했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려 꿈을 꾸는 자들에게 희망과 경험담을 들려주는 꿈꾸는자에게 필요한 책인 것 같습니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장에서 자고있는 꿈의 책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다시한번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전성철과 꿈을 함께 쫓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국제변호사로서 미국 로스쿨, 로펌 성공기, 스물아홉의 무일푼 노총각으로 MBA와 로스쿨에 도전,
웨이터, 택시운전사, 야적장 수위, 빵공장 직공 등 고학끝에 세계 법률시장의 메카 맨해튼 로펌에서 성공을 거두기 까지의 도전과 꿈의 나날들을
글로 옮겨 단지 한 사람의 성공 스퇴로서의 꿈과 희망이 아닌 성공까지의 악착같은 노력과 적극적인 삶의 교훈을 체험담으로 전해줍니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많은 강연과 희망을 나누는 다양한 모습들을 사회에 비추고 있는데요. 1949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전성철은 이후 직장생황을 하다 스물아홉 늦깎이 노총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네소타 대학에서 MBA와 로스쿨을 마치고 뉴욕주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29살에 어떻게 저런생각을 했을까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꿈이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맨해튼의 대형 로펌인 리드&프리스트에서 파트너로 일하면서 현대, sk, 대우,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활동을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네요.
한국 정부를 대변하여 1980년대 최대 통상 문제였던 슈퍼 301조 지정 저지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머 거의 영웅이였던 것 같습니다 -0-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변호사이면서도 나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인상도 꽤 좋아보이네요...ㅎㅎ
1991년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국제변호사로 일하면서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정책기획 비서관으로 사법개혁 등 소위 세계화 개혁 작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애국심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자신의 성공과 자녀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인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까지 낸 것 같은데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책들을 저서했다고 합니다. 사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도 꼭 읽어봐야 겠지만서도 협상에 관련한 책도 있더라구요. 잘 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성철을 협상의 달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IGM 협상스쿨 원장이기도 하다고 하며 매일 강연을 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하네요. 전성철씨가 참 존경스럽습니다.
매출액 규모 3900억 달러,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직원 숫자 210만여 명, 매출액 기준으로 늘 세계 1위를 다투는 기업. 명실상부한 세계적 소매 유통기업 월마트를 일컫는 말이다. 월마트의 성공 이야기는 그 창업주 샘 월튼의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성공 스토리와 만나보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아칸소 주 벤톤빌의 월마트 중앙 사무소 강당에 아침부터 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잠시 뒤 보도진이 도착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 부부가 등장했다. 그들의 눈은 연단 위의 한 사람 쪽을 향했다. 74세 생일을 앞둔 휠체어에 탄 노인, 1990년 초 골수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선고를 받고서도 비행기를 타고 월마트 지점을 돌며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긴 사람, 바로 월마트 창업주 샘 월튼이었다. 월튼을 향해 월마트 직원들이 외쳤다. “나에게 W를! 나에게 A를! 나에게 L을! 나에게 ‘갈겨 쓴 글씨’를!(이 대목에서 막춤 비슷한 춤을 춘다.) 나에게 M을! 나에게 A를! 나에게 R을! 나에게 T를! 그게 뭐죠? 월마트! (WAL-MART) 그게 뭐죠? 월마트! 누가 최고죠? 고객이요!” 전 세계 월마트 매장에서 직원들이 외치는, 이른바 월마트 구호다. 그날의 구호는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대통령 부부와 보도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1992년 3월 17일 월튼은 백악관이 수여하는 미국 시민 최고 영예의 상인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약 3주 전이었다. 백악관에서 수여식이 열려야 하지만, 암 투병 중인 월튼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통령 부부가 직접 벤톤빌로 왔던 것이다. ‘겸손이 근본인 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또한 성공을 결코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소매상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메달에 새겨진 문구다. 그리고 그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형적인 미국인 샘 월튼은 기업가 정신을 실천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종업원들에 대한 극진한 배려와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 차별화하고자 하는 남다른 욕구는 그의 경력에서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것들이었다. … 충실한 가장이자 업계의 지도자이며,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인물로서 샘 월튼은 신념과 희망, 고된 노동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사업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성공한 이 기업계의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오클라호마 주 킹피셔 근교에서 태어난 월튼은 예닐곱 살 때부터 잡지 판촉일을 했고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신문 배달을 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풍족하지도 않은 가정형편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성적도 우수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우유를 직접 짜서 배달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미주리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생 클럽 회장, 4학년 남학생 명예학회 회장, ROTC 엘리트 단체 대표, 성서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식당 웨이터로 일하고 수영장 구조 책임자로도 일했으며, 신문 배달을 사업 비슷하게 운영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 배달 구역을 늘려나가면서 한 해 5천 달러 수입을 올릴 정도였다.
사업 성공 원칙의 하나로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를 꼽은 샘 월튼
유명한 경영대학원 와튼스쿨 진학을 계획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1940년 6월 대학 졸업 후 아이오와 주 데모인의 작은 상점에서 18개월 동안 일하면서 뛰어난 판매 능력을 발휘했다. 1942년 입대해서 항공기 공장이나 포로수용소에서 관리직으로 일했고 1943년에는 헬렌 롭슨과 결혼했다. 월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이들도 그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 나는 10살이 되기 전에 깨달았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고객을 위해 1달러를 절약할 때마다 우리는 경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게 된다.”
월튼의 딸 앨리스의 회고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식으로든 회사 일을 거들었다. 나는 사탕 계산대 뒤에서 일하기도 하고, 다섯 살 때는 팝콘 바를 맡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사업 이야기가 빠지는 법은 없었다. 언젠가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말이지,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 상점을 열려고 하셔.”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
1945년 전역 후 월튼은 자신의 돈 5천 달러와 장인에게 빌린 돈 2만 달러로 아칸소 주의 인구 7천 명 소도시 뉴포트에 있는 벤프랭클린 잡화점을 매입해 1945년 9월 1일 개업했다. 폭 15미터, 길이 30미터의 전형적인 구식 잡화점이었다. 길 건너에는 벤프랭클린 잡화점보다 두 배인 15만 달러의 연 매출액을 올리는 스털링스토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벤프랭클린 잡화점은 프랜차이즈 상점이었지만, 월튼은 독자적인 영업 전략을 폈다. 그것은 부지런히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어떤 물건을 80센트에 샀다고 하자. 나는 그것에 1달러를 매김으로써 1달러20센트의 가격을 매기는 것보다 세 배 이상 많이 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 하나 당 이윤이 반으로 줄어들지 몰라도 세 배 이상 많은 물건을 팔게 됨으로써 총 이익은 훨씬 더 늘어났다. 얼마나 간단한가. 가격을 낮춤으로써 판매량을 늘린다는 간단한 원리다.”
2년 만에 장인에게 빌린 돈을 다 갚고 이글스토어라는 상점을 하나 더 냈으며, 개업 5년이 될 무렵에는 연 매출액 25만 달러를 올리면서 아칸소 주 최고 매출 및 이익의 소매상점이 됐다. 그러나 월튼은 이런 성공을 뒤로 하고 뉴포트를 떠나야 했다. 점포 임대차 계약 5년 후 계약을 갱신할 옵션을 월튼 자신이 갖는다는 조항을 계약 당시 빠뜨렸던 것. 점포 땅 주인은 계약을 갱신해주지 않았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음은 아칸소 주의 낡고 초라한 인구 3천 명의 시골 도시 벤톤빌이었다.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해 월튼스 염가상품 판매점을 개점하고(오늘날 월마트 방문자 센터), 1950년 7월 29일 첫 신문광고를 냈다. 월튼은 곧 벤톤빌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점원의 증언이다. “월튼 씨는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사람도 크게 소리쳐 부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붙임성 있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했다. 여행에서 돌아 온 그가 가죽끈 샌들을 보여주며 최고 히트 상품이 될 거라 말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그러자 그가 통로 끝 매대 위에 몽땅 쏟아놓고 한 켤레 19센트 가격을 붙였다. 시내 모든 사람들이 그 샌들을 갖게 되었다.”
한 상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얼마든 다시 새로운 상점에 투자하는 것이 월튼의 방식이었다. “월마트가 한 중년 남성의 위대한 아이디어로 하룻밤 사이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공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월튼은 유능한 상점 책임자들을 스카우트하면서 속속 잡화점을 개점해 나갔다. 훌라후프가 대유행하던 시기에 월튼은 다른 업자와 절반씩 투자하여, 훌라후프와 똑 같은 크기의 호스를 만들 수 있는 제조업자에게 호스를 공급받아, 다락방에서 직접 훌라후프를 제작했다. 아칸소 북서부 지역 아이들 대부분이 월튼의 손을 거친 훌라후프를 하나씩 갖게 되었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1950년대 말 월튼은 미국 최대의 잡화점 경영자가 되었다.
소형녹음기 갖고 다니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다
1962년 7월 2일 아칸소 주의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했지만 2년 간 경쟁업체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후 스프링데일과 해리슨에 2호점과 3호점을 내면서 약진하기 시작했다. 할인판매를 통해 중소도시의 상권을 장악해나가는 전략이 주효했던 것. “우리는 모든 품목을 할인 판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언제나 싸게 팔아야 합니다. 월마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낮은 가격과 고객만족을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다른 어디에서도 더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환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
1969년에 월튼은 14개의 잡화점과 18개의 월마트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1일 월마트를 상장시켰다. 처음 상장했을 때 주당 거래가격은 16달러50센트였다. 당시 1,650달러에 100주를 산 주주라면, 여러 차례의 주식배당을 통해 20년 뒤인 1990년대 초에 3백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7년부터 87년까지 월마트의 연평균 순투자 수익률은 46%에 달했다.
월마트의 출점 전략은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 나가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월마트에 우호적일 것이라 예상한 지역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한 다음 그 구역 일대에 여러 점포를 세워 완전히 장악해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고 지역이 좁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만으로 고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월튼은 상점 부지 물색을 위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월튼은 소형녹음기를 갖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했고, 즉시 실행으로 옮겼다.
1970년대 중반 월마트 점포는 100개를 넘어섰고 매출액 1억7천만 달러에 이익도 600만 달러를 넘어섰다. 1974년 56세 때 월튼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한동안 여유롭게 생활했다. 그러나 월튼이 물러나 있는 동안 회사 내에 분열이 일어났다. 젊은 사원들과 나이 든 사원들이 반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1976년 6월 월튼은 회장으로 복귀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당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월튼은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을 정리하여 제시했다.
첫째, 당신의 사업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사업에 전념하라.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일을 사랑하라.
둘째,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
동료들에게 회사 지분을 갖도록 장려하고 할인된 주식을 제공하고 퇴직 때도 주식을 교부하라.
셋째, 동반자들을 자극하여 도전하게 만들어라.
좋은 실적에 충분한 보상을 하고 늘 재충전시키고 책임자들끼리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여 동기를 부여하라.
넷째,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동반자들에게 알려라. 정보는 힘이다.
동료들에게 힘을 부여해서 얻는 이익은, 정보가 누설되는 위험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다섯째, 동료들이 나의 사업을 위해 하는 일에 늘 감사하라. 진지하게 절제된 언어로 칭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늘 듣고 싶어한다.
여섯째, 성공을 자축하고 긴장을 풀고 즐기면서 열정을 보여주어라.
일곱째, 모든 사원들의 말에 귀 기울여라.
고객들과 얘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내야 한다.
여덟째, 고객의 기대를 넘어서라. 고객이 원하는 것 이상을 주도록 하라.
당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과하고 보상하라. 월마트 1호점 간판에 쓰여 있던 ‘만족 보증’이 최선의 전략이다.
아홉째, 비용을 경쟁자보다 낮게 통제하라. 월마트는 유통업계에서 매출 대비 비용이 가장 낮은 회사였다.
열째,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을 택하고 있다면 그 반대로 가는 게 당신만의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인구 5만 명 이하 소도시에서는 할인점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근로자 착취와 값싼 중국산 유통으로 미국 경제 약화에 일조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월마트는 2003년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초우량 기업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월튼 개인은 직원들을 가족이나 동료처럼 대했다고 하지만 복지 혜택이나 임금 수준이 동종 업계에서 뒤떨어지는 편인데다가, 가격경쟁력 유지를 위해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면서(이 원칙은 중국에서 깨졌다.) 사실상 저임금 근로자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값싼 중국산만 수입해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의 경쟁력 약화에 일조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최대 규모의 매출과 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매출 증가율이 떨어지고 순이익도 기대에 못 미치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미국 서민층의 실질 구매력이 한계에 도달해 월마트의 저가 전략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진단을 하기도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월튼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특유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우리가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또 한 가지가 바로 지나친 자만이다. 월마트에서 일하기 위해 자부심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자부심을 작게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침내 곤경에 처하고 말지도 모른다.”
(샘 월튼, 존 휴이 공저, 김미옥 옮김, 21세기북스) 1990년부터 샘 월튼이 존 휴이와 함께 작업해 내놓은 회고록이다. 월튼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처세실용서, 경제경영서의 구실을 하기에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