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샤넬이라 불리는 가브리엘 샤넬은 누구?

 

코코샤넬이라 불리는 가브리엘 샤넬은 누구?

안녕하세요 유리나무입니다. 벌써 황토(황금같은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네요...

어제는 저녁에 비도오고, 많이 추웠는데요. 오늘은 온도가 많이 올라간다고 하니,

연인이나 지인과 함께 산책하는것도 괜찮은것 같습니다...ㅎ

이제 슬슬 날씨도 풀리면서 하나둘 멋진 스타일과 멋진 백을 든 많은여성분들이 거리에 나옵니다.

저야 남자이기에, 다 똑같은 옷에 백이지만 ,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부분이죠...

특히 그중에서 고가의 제품이면서 여성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제품 '샤넬'은 모르는 분들이 없으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고가의 명품브랜드이기에 요즘은 '샤넬'이 결혼 예물로도 많이 한다고 하네요...ㅎ

제눈에는 다같은 옷에 백인데 말이죠....;;

이마크가 바로 '샤넬'의 마크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이번에 여자친구가 샤넬화장품을 구입하면서

이 마크에 대해서 알게됬는데요. 알아보니 샤넬에서 나온 모든 제품(가방,지갑,단추,작은 아이템)에

이마크가 박혀있다고 합니다.....

이 마크가 박혀있기에, 샤넬 샘플이나 다쓴빈병까지 구입하는것같습니다....

(이소리에 엄청나게 놀란....;;;;;;;)

자그럼 코코샤넬로 더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샤넬은 1883년 프랑스 남부지역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릴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샤넬의 아버지는 그녀를 보육원에 맡겨버리죠..

보육원에서 그녀는 주로 바느질과 재봉일을 하는데

이때 배운 교육이 지금의 샤넬을 만드는 발판이 된다고합니다...

정규교육이 아닌 자유룝게 배운 교육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낼수있게 된 계기이죠..

가브리엘 샤넬이 파리에 가게를 처음 오픈 한거는 1909년 그녀가 20대 때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코샤넬로 더익숙한 가브리엘 샤넬

그녀가 코코샤넬로 불리게 된거는 원래 가수를 꿈꾸며

춤과 노래를 많이 불러기에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고 합니다..

코코샤넬이 보여준 패션은 지금까지 여성의 몸을 꽉!!!!

조였던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고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여성들에게는 엄청난 선물이엿죠...

샤넬 수트는 특히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그대로 살린 디자인과 단추,

샤넬의 로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가 대표적인 특징이죠..

영화 '도둑들'에서 전지현이 입고나오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기도 했죠...

날씬한 몸매로 유명한 전지현의 선을 잘 살려준 샤넬 투피스였기에

그녀의 매력을 배로 불려줬죠..ㅎ


수트도 수트지만 샤넬의 유명해진것은 바로 향수라고 합니다.

코코샤넬(가브리엘샤넬)의 명언중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 여자는 미래가 없다'

가브리엘 샤넬은 향수 전문가인 에르네스트 보 에게서 향수제작을 의뢰받았고

다양한 번호가 붙은 샘플중 5번 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향수가 바로 샤넬 넘버5로 불리는 향수입니다.

향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또한 이름은 들어봤을만큼 유명한향수이죠...

그당시(1959년) 만들어진 샤넬 향수병은 예술품으로써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합니다..

여자는 두가지여야한다. 클래식과 굉장한 멋

일 할 시간이 있고,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밖에는 남는 시간이 없다.

패션이란건 드레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길이 있다.

패션은 아이디어이다. 우리의 생활습관이며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곧 스타일이다.

코코샤넬의 명언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패션을 사랑했는지 알수있겟죠???

'샤넬'

들어는 봤지만, 어떤 브랜드이며,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본영화 '코코샤넬'로 가브리엘샤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되면서 알게되었는에요..

여성분들이라면 모두들 알고 계시겠죠??

제 입장에서야 그냥 한 브랜드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만

요즘 여성들을 보면 샤넬백 하나 못가져 안달나하는 사람들이 많은것보면

코코샤넬은 엄청난 디자이너가 아닌가 싶습니다...


디자인으로 세계를 놀라게한 코코샤넬(가브리엘샤넬)이야기

 

 

 

 

 

꿈 대한민국 뒤덮은 신드롬

팔순 노인이 시인 데뷔하고, 평범한 주부가 베스트셀러 작가 되고…
누가 개천에서 용이 못난다고 했나

지난 9일 서울 경희대 강당에서 열린 '김미경<사진>의 드림온 콘서트'에 5000여명이 몰렸다. 상당수가 20대로 보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 7시부터 기다린 첫 입장객은 고등학교 1학년생. 50세 아줌마의 '꿈' 이야기를 들으려고 12시간30분 동안 찬바람을 맞았다. 강당 안 풍경은 종교 부흥회 같았다. 거대한 군중이 모두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발을 굴렀다.

지난 9일 김미경 강연이 열린 이 강당은 2010년 8월 한국 사회에 ‘정의’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강연한 곳이다. 경희대 관계자는 “샌델 교수의 강연보다 김미경 콘서트에 훨씬 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고 전했다. / 이덕훈 기자

돈보다 꿈없는 사람이 루저, 돈이나 과시하는 졸부들, 부모 돈 믿고 설치는 애송이
돈 많은 남자에게 운명을 건 된장녀 너네들…


"오늘은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또 일어날 수 있잖아.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다시 뜨잖니. 자 힘들지만 다시 말해봐. I'll say yes!"

88만원 세대, 분노, 위로, 힐링….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절망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망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열심히 꿈을 찾는 수많은 사람의 열정이 커지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평범한 주부가 요리책, 패션책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팔순 노인이 시인으로 데뷔한다. 꿈을 이룬 그들을 따라 엄청난 인파가 요리학원, 글짓기학원, 패션학원에 몰린다. 엘리트 외교관이 몇평짜리 우동집 주인으로 전직(轉職)하고, 한동네 주민 모두가 '기부' 선행에 동참한다. 아이가 "엄마, 줄넘기가 내 꿈이야"라고 말하면 아빠까지 동참해 줄넘기 강습에 몰입한다. 모양과 의미가 다르지만 다들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 '여자 비아그라'란 별명을 가진 '희망교 교주(敎主)' 김미경(金美敬)이 서 있다. 동네 피아노 학원장, 무명 강사에서 출발한 그는 지금 '국민 강사' '국민 언니'로 불리면서 5000명씩 신도를 몰고 다닌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라고 물으면 안철수·김난도·혜민과 같은 화려한 스펙으로 답하기 어렵다. 자칭 "증평 촌년" 김미경은 "엄마 말도 안 듣는 아이들이 왜 엄마보다 더 늙은 나에게 '언니, 언니' 하면서 찾아오느냐?"고 반문한다. 그것도 '꿈'이란 뻔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게다가 김미경의 언사는 불편하다. 안철수·김난도·혜민이 내세우는 '위로'란 세일즈 포인트를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김미경은 젊은 여자들에게 "술자리에 참석하고 상사에게 술을 사면서 회사의 남자를 네편으로 만들라"고 독촉한다.

김미경이 일으키는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이 시대의 루저(loser·패배자)가 '돈 없는 사람'에서 '꿈 없는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김미경'이란 창(窓)을 통해 돈을 과시하는 부자들, 돈 많은 남자에 운명을 건 된장녀, 부모 돈을 믿고 설치는 애송이, 사회를 원망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그것이 사실이든 환상이든 김미경은 '가난을 엄청난 자산(資産)'으로 인식하도록 대중을 선동하고 유도한다.

'가난은 천형(天刑)이다. 부자 아이가 부자 되고, 가난한 아이는 가난뱅이가 된다.' 몇년 전부터 우리는 이런 인식에 포박됐다. 김미경은 반발한다. "개천에서 용 못 나는 시대라고? 너희가 봤어? 난 지금도 용 나는 거 보고 있어!" 경희대 강연 이틀 뒤인 11일 서울 마포구의 집필실에서 김미경을 다시 만났다.

그들이 찾는 건, '내일'

―바쁘시죠?

"이달 들어 내 맘대로 쓴 시간이 딱 3시간이었어요. 우울할 때도 있어요. 그거 아세요? 드림 워커(꿈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가 있고 드림머신(꿈을 좇는 기계)이 있어요. 내가 머신이 됐다는 생각도 해요. 그럴 땐 '이렇게 멋진 머신이 어디 있어?' 하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막 열광하고 '인생이 바뀌었어요' '꿈을 찾았어요' 하는데."

―책은 얼마나 나갔어요?

"다 합치면 100만부 가까이 되지 않을까요. 옛날 책도 계속 팔려나가니까요.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가 8년째 나가고 있어요."

―얼마나 버세요?

"직원 20명의 3개 회사 매출이 그런대로 자리가 잡히는 상황까지 왔어요. 강의는 21년 노하우잖아요. 기업에 강의를 나가면 100점 맞는 방법이 눈에 보이죠. 요즘 어떤 기업이 어떤 콘텐츠에 목말라 한다는 걸 알아요."

―'드림온' 강연은 종교 집회를 보는 듯했어요.

"잘 보신 거예요. 꿈은 원래 종교이니까. 꿈이란 품목 자체가 종교가 되기에 가장 쉬워요. 옛날 사람들은 뭐가 안 되면 종교에 매달렸잖아요. 싹싹 빌었잖아요. 누군가 있을 거라고 믿고. 그런데 요즘엔 누군가에게 빌지 않아요. 자기에게 빌어요. 그게 꿈이에요. 미국에도 자기에게 비는 치유적 힐링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그게 종교를 대체해요. 그래서 꿈은 내 안의 종교예요."

―5000명이 왜 왔다고 생각해요?

"제 나이가 쉰이잖아요. 자기 엄마보다 나이가 많거든. 나이 든 아줌마, 완전 노땅이잖아요. 젊은 얘들, 노땅 얘기 잘 안 듣잖아요. 그런데 왜 내 얘기는 듣느냐고. '언니, 언니' 이러면서 중학생들이 메일을 정말 많이 해요. 언니라니? 내가 네 엄마보다 나이가 몇살이나 많은데. 꿈의 길은 100가지도 넘는데 학력으로만 줄을 세우니 아이들이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출구에서 뭘 찾는다고 생각해요?

"내일.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게 뭐예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밀려오는 막연한 불안감.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내일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꿈이 있으면 꿈을 이루기 위한 '작용'이 일어나잖아요. 그 작용만 일어나도 사람은 안 불안한 거예요.

돈이 있든 없든, 무언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있고, 그런 생각에 움직이기만 해도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아요. 꿈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굉장한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힐링(healing·치유)은 같은 단어예요.”

―김미경의 힐링은 자본주의적이고 전투적이네요.

“문제를 해결해야 치유가 되지요? 안 그래요? ‘나는 괜찮아, 잘 될 거야’ 이렇게 말만 한다고 잘 되느냐고요. 돈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돈이 생겨야 힐링이 되지요. 직업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직장에 들어가야 힐링이 되지요. 소극적 힐링이 아니라 적극적 힐링을 얘기하는 거예요. ‘해낸 인간’이라는 자신감,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이야말로 최고의 힐링이지요.”

―붐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요?

“믿을 게 없잖아요. 직업이 금방 생기는 것도 아니야,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지도 않아. 결국 내 안에 있는 걸 써야 되잖아요. 내 안에 있는 가능성, 내 안에 꿈이 있다고 믿고. 어려울수록 계속되겠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각박해도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팽개치지 않아요.”

촛불은 밤에 켜고, 낮엔 꿈을

절망의 88만원 세대에게 사회가 이렇게 만들었으니촛불을 켜야 한다?
좋아, 하지만 어떻게 24시간 켜니?
밤에 촛불 들더라도 낮엔 네 꿈 위해 일하면 안되겠니?

사람들이 내게 찾는 건 來日의 희망… 어려울수록 꿈 열풍 계속된다


―젊었을 때 어떻게 힐링했어요?

“서울에 올라와 가장 괴로웠던 게 뭔데요. 3대째 잘난 것들을 보는 거였어요. 지금도 천지잖아요. ‘증평 촌년인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있을까’ 20대부터 고민했어요. 그때 ‘괜찮아, 괜찮아’ 그러는 말에 따랐으면 지금 뭐가 괜찮겠어요? ‘다 나와, 다 붙어, 다 죽었어’ 하면서 꿈을 가지고 싸우고 스스로 상처를 힐링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는 나 하나예요. 내 안에 열정, 에너지, 모든 것이 있어요. 그걸 막 꺼내서 갖다 쓰면 돼요. 자기 안에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열정에 불을 지피는 매개체가 꿈이거든요. 어려울수록, 결핍될수록 막 꺼내쓰잖아요.”

―요즘은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해요. 이런 사회에서 ‘꿈은 신기루’란 반발도 있지요. 신기루를 팔아먹는다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란 책도 있지요. 꿈을 선동해서 열정의 노동자로 만들어서 대기업 CEO의 배를 불린다고. 사회를 고치지 않고 왜 개인의 꿈만 이야기하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장(場)을 왜 얘기하지 않는가. 이런 말이지요. 그런 의견, 중요해요. 다만 사회에는 각자의 꿈에 충실하게 살면서 조금씩 주변을 바꾸는 사람도 있어요. 촛불만이 아니라 꿈도 켜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충실함이 모여 5년, 10년 지나면 역사가 서로의 성과를 가지고 합의해 주는 것 아닌가요.”

김미경은 1964년 충북 증평에서 태어났다. 돈, 장사와 인연이 없던 아버지 대신 50년 동안 옷을 만든 어머니가 가계를 돌봤다. 연세대 작곡과를 수석으로 들어갔지만, 졸업 후 남은 이십대를 서울 송파에서 피아노학원 원장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29세에 꿈을 품고 전문강사의 길을 걸었다. 김미경은 강연과 저술에서 ‘나도 했으니, 너희도 할 수 있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꿈을 이룬 성공 사례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386세대이지요. 학력고사 세대. ‘증평 촌년’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촌놈도 많았어요.

“재경향우회를 가면 짜장면 집에 촌놈 200명이 꽉 찼다니까. 그런데 지금 재경향우회가 없어지고 있다잖아요.”

―우리 세대는 성장시대였으니까. 성장시대 이야기를 듣고 요즘 젊은이가 “개천에서 용 난다”며 열광하는 게 신기해요.

“아니, 지금도 개천에서 용 나요. CEO를 상대로 강의하기 때문에 잘 알아요. 10, 20년은 부모 역량으로 살 수 있지만 마흔 넘으면 다 기초역량이에요. 명문대에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으로 들어간다는 건 다 과장이죠. 20대 학력이 평생을 보장하나요? 20년 후에 한 번 보자 그래요. 진짜 학력이 꿈보다 센지.”

―기회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잖아요.

“꿈을 사이즈로 착각하지 말자고요. 나답게 내 가치를 매일 실현해 나가면서 살자고요. 사회에 터뜨리는 불만의 에너지를 나에게 좀 더 집중해서 쓰자고요. ‘어제보다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이건 본능이잖아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잘돼.’ 이건 진리잖아요. ‘계층 이동은 이제 안 돼.’ 이런 소리를 하면서 왜 진리와 본능을 자꾸 끊어 놓느냐고요.”

꿈 과잉시대? 고갈보다 낫다

김미경을 만나기 전 서울대 내부 게시판에서 김미경 관련 글을 검색했다.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가장 꿈에 가까이 있을 듯한 사람들은 김미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봤다. 그중 많은 지지를 받은 글은 제목이 ‘김미경쇼(케이블TV에서 방송 중인 성공 이야기)가 사람 잡는다’였다. ‘꿈, 도전정신, 이런 것만 이야기하면서 그거 없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는 하루하루 만족하며 즐겁게 사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사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란다.’

―현실에 자족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비루해도.

“두 사람이 라면집을 창업했어요. 그중 한 사람이 체인점을 만들어 직원 1만명을 뒀어요. 남은 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면서 작은 가게를 이어가요. 둘 다 꿈을 이룬 거잖아요. 한 사람을 만족시키면 작은 꿈이고, 1만명을 만족시키면 큰 꿈인가요? 현실에 자족해도 좋아요. 중요한 것은 ‘나다움’이에요. 꿈 안에서 ‘나다움’이 일어나면 그게 가장 큰 꿈이에요.”

―그래도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꿈이 좋겠죠?

“꿈의 기본 속성이 원래 영향력이에요. 한 사람이 꿈을 이루면, 주위의 100명 이상이 꿈을 들고 일어나요.”

―요즘엔 너무 많이 들고 일어나서 문제가 아닐까요. 아이가 ‘이게 꿈’이라고 하면 부모까지 우르르 몰려가 다 해줘요. 꿈 과잉시대인 듯해요.

“꿈을 키워준다고 해도, 다들 생각은 같아요. 스물다섯에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그곳으로 가는 단거리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거예요. 김연아가 나오면 죄다 스케이트장으로 가고. 꿈을 꾸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기다리는 능력’이에요. 그래도 그런 현상이 나쁠 것은 없어요. ‘학력’ 하나에 목숨 걸기보다는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김미경의 힐링은 자본주의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는 “돈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돈이 있어야 힐링이 되지요. 직업이 없어서 괴로워? 그럼 직장에 들어가야 힐링이 되지요” 하고 말한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을 복원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힐링의 정의다. / 이덕훈 기자

김병완
김병완 (필명: 주선용)
저술가, 강연가, IT전문가, 기업경영컨설턴트, 자기계발 및 독서법(공부법) 컨설턴트, 인물평론 및 자서전컨설턴트, 마인드개혁컨설턴트, 집필 및 저술컨설턴트, 개인 및 조직변화경영연구가. 저자 김병완은 삼성전자에서 10년 이상 연구원으로, 6시그마 전문가, IT 전문가로 활동하며 직장생활을 했다. 십 년이 넘게 회사 생활을 한 후 갑자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와 3년 동안 도서관에서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읽은 책이 9,000권을 넘었다. 3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책만 보게 되자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자기 자신 조차도 상상도 못했던 작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내면으로부터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는 글쓰기에 미치기 시작하자 한달에 네 권의 책도 집필할 수 있는 기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대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몇 십 배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5년 동안 어둡고 칙칙한 땅 속에서 남모를 인내와 준비의 기간을 가졌기 때문이듯, 저자 역시 3년이라는 세월동안 세상의 모든 욕심과 미련과 집착을 다 버리고,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독서만 하면서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준비 기간을 가졌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저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렇다. 저자는 3년 동안 남들보다 열배나 더 지독하고 치열하게 백배나 많은 책을 읽기 위해 피를 흘리고, 세상을 등지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폭풍 집필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마치 신들린 사람 같다’ 이 말이 저자의 집필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저서로는 『삼성비전 2020』, 『왜 결국 삼성전자인가』,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들』, 『뜨거워야 움직이고 미쳐야 내 것이 된다』, 『세상은 행동하는 자의 것이다』, 『40대 다시 한 번 공부에 미쳐라』, 『안철수의 28원칙』, 『박근혜의 인생』, 『대화 속의 숨겨진 진실』, 『내 인생 조금만 더 행복하길』,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단사리 마음혁명』, 『마흔, 행복을 말하다』, 『인생의 절반은 행복하게 살자』, 『마흔 즈음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들』, 『나는 성공의 지도를 보고 간다』, 『스케일』, 『어떻게 차별화를 할 것인가』를 비롯해서 2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출간했다.
목차
프롤로그 책! 인문학을 탐하다 10

제1부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제1장 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
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 18
인문학 독서의 올바른 자세란? 23
인문학 독서가 인생을 좌우한다 27
인문학 독서는 살아가는 힘이다 31
인문학 독서 vs 일반서 독서 34
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성공을 이끈다 39

제2장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44
위대한 투자자들은 모두 인문학 독서광들이었다 48
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53
인문학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 57
인문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둥! 65
인문학 독서는 쌍방향 통행이어야 한다 69
현대 문명을 이룩한 두 축! 인문학과 과학! 74
발명왕 에디슨의 아이디어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아이디어이다 78


제2부 책, 인문학을 탐하다 _ 고전 독서법

제3장 문학을 탐하다
문학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 84
문학이란 상상력과 언어의 만남이다 88
인간! 그 이상한 존재? _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91
문학 작품을 읽는 세 가지 방법 100
문학 작품,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104
갈망하는 삶이 문학이다 _괴테 『파우스트』 109
문학 서적을 읽을 때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들 115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학이다 _셰익스피어 『햄릿』 119

제4장 역사를 탐하다
역사란 무엇이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126
신화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 129
역사 서적을 잘 읽는 법 134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다 _사마천 『사기』 139
역사 서적을 읽을 때 던져야 하는 질문들 143
역사 서적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147
지혜로운 인간을 배우다 _호메로스 『오디세이아』 150

제5장 철학을 탐하다
철학이란 무엇이며 철학서는 어떤 책인가? 158
만인을 위한 철학 책 _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62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라 _니체의 조언! 176
반 권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린다! _공자 『논어』 18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_플라톤 『변론』 192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_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98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_데카르트 『방법서설』 207

제3부 통합적인 책 읽기의 세계에 빠져 보자

제6장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갇히게 된다
가장 위대한 세계는 책의 세계다 216
‘3년 독서의 법칙’을 발견하다 219
3년 독서의 법칙 227
‘3년 독서의 법칙’의 공식 233
3년 독서의 법칙과 10년 법칙! 238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갇히게 된다 244
인생을 경영하는 통합적인 책 읽기 248
책을 읽는 즐거움이 독서의 승패를 결정한다 251

제7장 시대 흐름에 맞는 통합적인 고전 독서법
기록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손을 움직여라 256
사색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뇌를 움직여라 263
취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몸을 움직여라 268
넘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_발을 움직여라 274

부록 1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279

부록 2 분야별, 상황별, 권장, 추천 도서
1. 독서 초보와 독서 지도를 위한 도서
독서 초보를 위한 추천 도서 294
자녀들에게 독서 지도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추천 도서 294

2. 분야별 추천 도서

· · ·

3. 직업별 추천 도서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6
교사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6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일반 직장인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투자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마케터와 회계사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CEO와 리더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7

4. 나이별 추천 도서
꿈 많은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20대의 청춘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뜨거운 30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8
40대의 불혹을 위한 추천 도서 308
50대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9
60대 및 어르신들을 위한 추천 도서 309

뉴욕 타임즈 선정 100대 필독 도서 309
서울대 권장 도서 100선 310
시카고 대학교 고전 추천 도서 312
책속으로
인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더욱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인문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인간은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실상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그 발자취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기게 되는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질박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거품을 빼야 인문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위대한 지성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그렇게 거창할 필요도 없고, 거창해서도 안 된다. 인문학을 하면 고귀한 것이고 차원이 높은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결국 우리의 삶이다.
참된 인문학은 소박하고 질박하다. 우리의 삶도 참된 삶은 소박하고 질박하기 때문이다. 참된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을 잡아줄 수 있는 인문학 독서법이 최고의 독서법이다. 이것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큰 성공을 하더라도 인격이나 품성에 결함이 있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거나 수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참된 인생, 올바른 인생을 살다 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_<삶과 인문학과 독서는 하나다>에서

인문학 독서를 통해 우리는 편견을 깰 수 있고, 생각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고, 심지어는 새로운 생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강한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책들은 대부분 인문학 도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 독서만큼 우리의 생각을 넓혀주고, 사유를 확장시켜 주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견문이 넓어지고 생각이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작품과 위대한 인물,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만나고 경험한 것만큼 넓어지지는 않는다.
인문학 독서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인간들이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며, 위대한 영웅을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것이며, 위대한 사상과 조우하는 것이며, 시간의 축을 거슬러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인문학 독서인 것이다.
그러한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줄 수밖에 없고, 우리의 사유와 의식을 확장시켜 줄 수밖에 없다.
_<인문학 독서는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에서

우리는 보통 책을 읽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고 자녀들에게 권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무조건 책을 읽는다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일까?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것은 매우 비중 있는 요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일까? 필자는 절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주위에는 무수한 책벌레들이 있다. 필자도 책벌레다.
하지만 무수한 책벌레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큰 사람이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었지만 큰 성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 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책을 읽어서 큰 성공을 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책을 통해 성공하는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법칙대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식으로 독서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아래 3년 독서의 법칙에서 공식과 함께 자세히 소개했다.
_<‘3년 독서의 법칙’을 발견하다>에서
출판사서평
〈이 책에 대하여〉
2012년 국립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자기계발서 TOP 10의 『48분 기적의 독서법』의 저자가 야심차게 밝히는 인문학 독서법을 만나보자.
저자 김병완은 그동안 각 기업체의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절실히 느껴왔던 부분이 인문학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문학 책을 일반 자기계발서와 똑같은 독서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기대 효과를 얻지 못하고 금새 포기하고 만다. 이를 위해 저자만의 독특한 인문학 독서법, 즉 ‘3년 독서의 법칙’을 제시한다.

인문학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기적의 인문학 독서법을 만나다
왜 인문학 독서인가
독서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도 차이가 생기지만, 인문학적 독서를 하는 사람과 그저 베스트셀러나 읽는 독서를 하는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시류에 편승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고, 직장에서 승진을 잘 하게 해 주는 그런 책만 읽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리더나 지도자에게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혁신하고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인문학적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인문학적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문학에는 인문학에 맞는 독서법을 찾아야 한다
독서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된다. 실용서를 위주로 한 일반서 독서를 할 때와 인문학 독서를 할 때는 그 방법과 마음 자세가 달라야 한다.
일반서 독서를 할 때는 다양하게 폭넓게 훑어보면서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는 식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인문학 독서를 할 때는 깊고 좁게 천천히 되씹으면서 가능하면 전부를 다 뽑아내기 위해 몸통 전체를 다 먹지만, 한 번에 한 입씩 먹는 식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을 재미있고 내실있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는 것을 어떨까. 인문학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지금 바로 확인해 보자.
독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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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서 진 규 [美하버드대 박사]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기회와 희망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겪었던 것처럼,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나는 도와주고 싶습니다.

 

The worst thing in the world is to live without opportunity or hope.

 I want to help others who are trapped by societal prejudice or

 their own lack of self-determination, as I once was.

 

[ 이 력 ]

○ 1948년 생

○ 1967년 충문여고 졸

○ 1967년 가발공장 직공

○ 1971년 미국으로 가정부 취업 이민

○ 1972년 美 버루크대학 입학

○ 1976년 美육군 입대(일등병)

○ 1977년 한국 용산으로 발령

○ 1981년 소위 임관

○ 1982년 독일 병참중대 소대장

○ 1984년 駐韓 미군 사령부 유류담당 작전참모

○ 1985∼1986년 駐韓 미군 유류중대 중대장, 美 메리랜드대 졸

○ 1987년 美 노쓰캐롤라이나 포트 그래그 병참대대 운영과장

○ 1990년 美 캘리포니아 국방언어학교 일본어과정 졸

○ 1993∼1996년 駐日 美 육군사령부 정치·군사 고문

○ 1996년 소령 예편

○ 1997년 美하버드대 대학원 박사과정(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과)

 

마음의 힘

지난 5월 9일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 : 가발공장에서 하버드까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현실과 그 속의 자신들을 알게 되었고,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뒤이어 출간된 나의 자전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출간 후 2∼3주일이 지나기 전에

베스트셀러 1위로 올랐고, 역시 남녀노소를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성공비결에서

자신들의 성공 가능성을 보았다고 전해왔다. 모두들 희망과 용기를, 또 미래의 성취를 향한 자신이 생겼다고들 한다.

책을 잃은 많은 독자들이 나를 자신들의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나는 그 책을 통해서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데는 선택이 없다. 우리 모두가 한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는 기회는 모두에게 단 한 번 밖에 주워지지 않는다.

그 한번의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고 가느냐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렸고,

바로 우리 자신이 결정할 일''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

나는 50년을 살면서 한 번에 꼭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사실 내 나이는 백살 정도가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쓰면서 다시 50년을 살았다. 집필하는 동안 혼자 울고, 혼자 화내고, 혼자 웃고, 삶을 다시 살았다.

아, 나의 50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어려움이 있었던 50년이기에 나는 지금 참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동시에 인생 철학은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을 본인의 손으로 쓰여져야 하며,

작가를 통해서 쓰면 그 철학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책을 집필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은 책의 서문이다.

 "이 책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 동안 내 안에서 다져온 내 자신과의 약속들 가운데 하나가

결실을 맺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희망과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에

언젠가는 내가 살아온 얘기를 쓰리라 다짐해 왔다. 다만, 그 언젠가는 지금이 아닌 최소한 3∼4년 후,

내가 하버드 박사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역사를 담은 책을 출간한 이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좌절 속으로 몰아넣은 시대생활이 그 언젠가를 바로 지금으로 앞당겨 놓았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내 지난 반세기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는지를 알았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얻어진 삶의 철학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만든 올가미에 자신들을 속박해 왔다.

나는 그러한 올가미에 굴복하지 않는 참다운 삶을 살고 싶었다. 수많은 나날을 희망을 찾아 헤맸고,

불가능으로 보이는 벽에 부딪혀 희망을 잃기도 했으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영웅화시키기도 했고 나 자신에게 위대한 사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나는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었다. 불가능으로 보이는 벽이 내가 열어야 할 문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내 삶을 보면서 딸 성아가 자랐다. TV와 잡지, 그리고 신문에 소개된 우리 모녀의 삶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해 주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 누구나 대할 수 있었던 우리 모녀의 이야기에서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될 희망과 용기를 얻은 것은 그들 각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꿈을 보는 자기만의 눈이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면 희망과 행복의 재료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꿈과 행복이 결정된다고 나는 믿는다.

선택은 모두의 손에 주어져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을 만나보고 싶다.

외롭게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 만나고 모여 강을 이루듯이 올바른 인간의 역사를 향하는 길목에서 뜨겁게 만나 손잡고 싶다."

 

자랑스런 딸 성아

20년의 성공적인 미 육군 생활 끝에 소령으로 전역, 하버드의 석사학위 수여와 박사에의 도전,

한국어 외에도 능통한 영어와 일본어. 나는 편견을 비웃어줄 수 있는 자리로 자신을

끌어올려 놓았다. 조그마한 LA에서나마 나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거'',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남녀평등이 보장되는 미국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이룸으로써 한국 사회의 폐단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편견이 어리석음을 증명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나는 한국사회가 무시하는

평범한 ''아줌마''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당당한 사회의 리더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만 28살의 ''아이 엄마''로서 미 육군에 도전해 탁월한 실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40이 넘은 나이에 하버드의 석사학위를 받았고,

50이 넘은 나이에 박사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딸 성아 역시 한국사회의 편견을 지적하는데 한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한국사회가 ''손가락질''하는 이혼녀,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한국의 편견은 내 아이들과 같은 이혼녀의 자녀들은 ''문제아''가 되리라고 쉽게 단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견을 뒤엎고 딸은 한국의 부모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많은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로 자랐다.

하버드대 4학년인 딸은 23살에 이미 한국말, 영어, 일본어 3개 국어에 능통한 편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홍일점 야구선수, 장래 비즈니스 리더협회 회장, 그리고 학교신문 편집장에 전교 학생회장,

졸업 땐 250만 美 고교 졸업생 중 141명에 뽑혀 미국 대통령상도 탔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착한 마음씨도 가졌다. 또한, 성아는 일본고등학교 1년을 제외하고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공립학교에서만 공부를 했다. 다시 말해서,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아니라도

그 아이와 같은 성공의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년의 기억, 경상도와 충북 제천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도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몇 개월 전에 어머니가 굉장히 편찮으셨다고 한다.

친할머니가 오셔서 집안 살림을 맡아 주셨는데, 엿 공장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바빴다.

11월 10일날 태어났는데, 나를 제일 먼저 받아주신 분이 바로 친할머니였다.

내가 태어나니까 친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이까짓 쓸데없는 가시나 하나 낳으려고 온 식구가 그렇게 고생했나''였다고 한다.

친할머니는 그 갓난아이가 너무나 미워서 핏덩어리와 물로 끈적끈적한 아이를 낡은 포대기에 싸서

윗목으로 쓱 밀어 버리셨다고 한다. 3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씻어주는 사람이 없자,

어머니가 참다 못해서 편찮은 몸으로 일어나서 나를 씻어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미 굳어서 살이라든가 머리 전부다

딱딱한 돌덩어리로 변해 버렸단다. 울어도 완전히 쭈굴쭈굴해져 가지고 정말 노인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나는 굉장히 멍텅구리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부산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반에서 꼴지였다.

얼마나 어리숙한 지, 이름도 제대로 못 쓰고, 학년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걸 기억한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보면 오후반이래서 다시 집에 갔다가 또 다시 가야 했고,

어떤 때는 오후반인 줄 알고 학교에 가보니까 다 가고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학교를 갔는데, 결석도 제일 많이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보 같아 보이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너무 괄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 당시 지금의 나를 상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한 자원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살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가서 중학교를 그곳에서 마쳤다.

제천은 정말 추운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인생을 배웠다. 나에게 있어서 제천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워서가 아니다. 그 옛날의 제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제천은 너무나 중요한 곳이다. 왜냐하면 제천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제천은 나에게 고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 고통이 있었기에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필코 성공하리라 결심을 했다.

제천에 처음 갔을 때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아버지는 철도청 말단 공무원이셨는데,

월급이 우리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다른 가정들이 그렇듯이 어머니가 생활전선에 나섰다.

할 수 있었던 것 모두 다 했다. 술장사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천이 추워서 싫은데, 엄마가 술장사를 한다는 사실은

어린 소녀에겐 대단한 열등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5학년 때까지는 그나마 언니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집안 일을 다 맡아 하면서 엄마를 보좌했었다. 그런데 언니가 6학년 때 홀연히 시집을 가고 말았다.

우리 집은 아들은 넷인데, 딸은 나와 언니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일곱 식구의 살림을 다 맡아서 해야 했다.

그때 눈뜨기 시작한 것이 바로 ''차별에 대한 반항심''이었다.

자식은 모두 다섯인데 왜 내가 해야 되는지, 나도 학생이고 나도 가서 공부를 해야되는데

왜 오빠나 남동생들은 일을 안 해도 되고 나는 살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되는지, 도대체 이유가 뭔지 물었다.

대답은 "니는 가시나 아이가?"였다. 가시나니까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왜 가시나는 해야 됩니까? 내가 가시나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가시나이기 때문에 그런 살림을 다 맡아서 해야 하고, 공부하는 데도 뒷전으로 밀려나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 반항심!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반항심을 갖고 있다.

반항심 있는 사람들이 없는 곳은 발전도 없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굴복하고,

그냥 사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침체되기 마련이다. 반항심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때 당시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뜻으로 반항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나 혼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고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상상을 했다. 상상력! 지금도 나는 우리 인간이 뭔가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깨닫곤 한다. 모든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그 도움이 될 만한 재료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자신의 꿈과 희망에 가까이 갈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

나는 그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일어나면 나는 부잣집 딸로서 따끈따끈한 아랫목에서 뒹굴면서 맛있는 찐 계란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 나의 현실일 거다. 이것도 분명 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고, 위로를 했고, 그리고 나 스스로를 영웅화시켰다.

''나 자신에게 너는 무엇인가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지금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손금을 읽어주시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아이들은 참 천진난만하다. 그 아이들에게 해 주는 한마디의 말, 그 말에 의해서 그 아이의 장래가 결정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말이란 굉장히 신중히 생각해서 해야 한다. 5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시험시간이면 책상 사이를 지나가다가 종종 아이들의 손금을 봐 주셨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내 손금을 보시고는 깜짝 놀래셨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바깥에 나가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내 손금을 보여주시면서 ''이 아이의 손에는 성공선이 있어요.

이 아이는 나중에 크게 될 앱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술집의 어린 딸, 열등의식에 쌓여 어둡게 살아가던 소녀에게 그 말씀은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정말 훌륭하게 될 사람이라면, 지금 준비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매달릴 곳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공부, 공부를 하자. 공부는 아마 나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렇게 선택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참 재미있었다.

 나중에 제천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울로 가려고 결심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펄쩍 뛰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께서 총동원되어서 ''얘는 공부를 굉장히 잘 한다. 나중에 뭔가 훌륭한 일을 할 것이다. 믿어보라.

서울로 보내라.''고 설득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서울 풍문여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은 계속되었다.

학비와 양식은 보내 주셨지만, 나에게는 항상 용돈이 없었다. 학용품을 살 돈이 없어서 잡지를 팔고, 가정교사를 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암행어사가 꿈이었던 소녀

나는 어릴 때부터 정의감이 강한 암행어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암행어사가 되어서 이 사회의 나쁜 폐단을 물리치고, 그런 나쁜 폐단을 활용해서 자기 사리사욕만 채우는 사람들에게

대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폐단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는 암행어사가 되고 싶었다.

그게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공을 해야 한다.

그리고 크게 성공을 해서 이런 사회의 폐단을 물리치는데 앞장서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실력을 쌓아야 성공을 하기 때문에 참 신이 났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꿈이 깨졌다.

 가난해서 대학은 갈 수 없었고, 취직을 해야 했다.

사촌언니가 알려준 가발공장에서 먼지 속에 파묻혀 나무 덩어리를 붙들어 안고

거기에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이어가는 작업을 했다. 그 때 내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운명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싫어서 열심히 안 했다. 열심히 안 하니까 당연히 돈도 없었다. 가난했다. 밥도 많이 굶었다.

 주변에서 나한테 밥을 사 주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 사람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이 고작이었는데도,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들께 용돈을 보내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먹여 살릴 가족조차 없는데도

내 입에 풀칠 하나도 못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문득 ''나는 이 세상에 뭔가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이다.

이 것은 나를 훌륭하게 튼튼하게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를 도와주는 직공들, 웨이트리스들, 상인들, 나는 그 사람들을 언젠가 구하기 위해서 성공하고 나서

돌아오리라''고 다짐을 하게 됐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한테는 그것이 큰 힘이 됐다.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찾아 골프장에 가서 웨이트리스를 했고,

경리사원을 하고, 그러면서도 남들 하는 건 다했다. 연애도 굉장히 열심히 했다.

 

첫 번째 결혼의 실패

언젠가 싸인회에서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남녀의 사랑이 한참 뜨거울 때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보다 강하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데 나는 실연을 당하고 말았다.

항상 나는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는데, 실연의 상처는 나에게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너무나도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황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나의 눈에 조그만 신문광고가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직업소개소의 광고였다. 이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의 도미행을 만류했다. 영어도 할 줄 모르는 20살의 아가씨가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틀림없이 미국에서 창녀로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사람이었다. ''이 길이 있는데, 좋다! 창녀가 되어도 좋고 팔려가도 좋다.

이게 속임수라도 좋다. 나는 이미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이다. 해 보자! 한 번 가서 해보고 안 되면 그 때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항상 가지고 있는 나의 최강의 무기다. 나는 늘 나와 함께 행동한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 갔다.

처음 1년 반은 학교를 안 다녔다. 그리고 1년동안은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한국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웨이트리스 일을 하면서 영어학교를 나가고,

1년 반이 지나 정식대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낮에 뉴욕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한 달에 천불을 벌었다. 대단한 수입이었다.

나는 부자 유학생이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들한테 밥도 사 주고, 필요할 때는 용돈도 그냥 주면서 신나는 삶을 살았다.

빚도 다 갚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용돈도 보내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TV도 샀다.

미국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꿈과 희망에 넘쳐 생활을 한다는 건 굉장히 고달픈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력은 너무도 신비로워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다 한국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또다시 나의 본래의 꿈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는데, 남존여비사상에 젖어있던 그 사람은 ''여자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일년에 두세 번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절대적인 평등주의자였다.

남편의 폭행을 한번두번 당하게 되자 비로소 사랑의 베일을 걷어버릴 수 있었다.

 혹자는 나에게 너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도 아니다. 인기는 나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서 많이 노력해 왔고, 지금도 혼자 노력할 수 있다. 먹고 살 돈도 있다. 인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점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김희로 씨는 차별과 억울한 폭력을 호소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야쿠자 두 사람을 죽였다. 그 대가로 30년을 넘게 감옥에 생활했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때리고 험하게 다루는 것과 나의 남편이 부인을 두들겨 패고 술을 마시고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나의 생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차 있던 내 모습이

참으로 우스워 보였다.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다.

다시 일어나기로 결심하고 선택한 곳이었고,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어려운 벽에 부딪히면 ''그 벽은 내가 열어야 할 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나는 좀더 강한 인간이 되어 더 큰 희망을, 더 큰 꿈을 성취할 수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군에 입대한 29살의 이혼녀

29살의 나이에, 더군다나 불과 한달 전에 아이를 유산하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군에 입대해서 18, 19살 젊은이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윗몸 일으키기 한번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일어서야 한다! 가야 한다! 내가 안 가면 누가 그 사람들을 구해줄 것인가?''

그것은 나와의 약속이었고, 필요할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 실패는 어쩌면 더 큰 성취를 위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아서 더 크게, 더 훌륭하게, 더 높게,

더 넓게 뛰어라. 그 때는 그 실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해서 장교가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중대장을 했다.

나의 중대에는 약 200명의 중대원이 있었는데, 155명이 한국남자들이었다.

좀 나이가 드신 중대대장이 굉장히 걱정을 했었다.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한국남자들이 한국여자의 명령을 들을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남자들 그렇게 무시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 그렇게 바보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고 꿈이 있고 성취욕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성공하고 싶을 것입니다. 자기 성공을 위해서는 저를 거쳐 가야 합니다. 저는 미군 대위 중대장입니다.

제가 그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 사람들의 진급과 월급, 모든 것이 저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봉건사상에 젖어 나를 나쁜 태도로 대하고, 그래서 자기 일생을 망칠 바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155명의 남자분들은 다른 미군 중대원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나는 물론 그 분들에게 친절하고 열성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영어를 몰라서 미군들에게 멸시를 받던 것들을

모두 제거를 해주고 열심히 하니까, 그 사람들도 내가 성공하도록 목숨을 바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해주었다. 대성공이었다.

지역 전문가를 선발할 때도 그랬다. 나는 동북아 전문가를 신청했는데, 불합격통지가 왔다.

한국은 나를 굉장히 강하게 키웠다. 차별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에는 법이 있고, 호소를 하면 관심을 기울인다.

곧장 달려가서 담당자에게 불합격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담당자를 설득시켜 시험을 보게 되었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동양인 최초의 하버드 모녀 대학생

나는 대학을 졸업하는 데 14년이 걸렸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다녔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졸업장은 대단한 힘이다.

사람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의 실력을 쌓아야 했고,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하버드에 신청을 했다. 하버드는 훌륭한 학교다. 그들은 삶의 지식, 살아있는 교훈, 살아있는 교육을 원한다.

또한, 삶의 터전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하고 거기서 배운 실력으로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학문을 가르칠 사람을 뽑는다.

 나는 한국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고, 차별 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가르칠 수 있었다.

미군 여성장교로서는 아마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군여성, 미군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었다.

하버드가 좋아했다. 학비가 비쌌지만, 군대에서 다 지원해줬다. 나는 가난한 초등학생, 가난한 중학생으로부터

지금은 부유한 대학생, 아주 부자 대학원생으로 하버드를 다니고 있다.

한국이 나에게 가르친 게 또하나 있다.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문제다.

내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나의 성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 성공과 그 직업을 잘 이행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마저도 희생을 해가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한테 가르쳤다.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주말에 골프를 36홀씩 쳤다.

일본사람들과 거래하는 데는 일본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거래를 하는지 그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배우지도 않고 속단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는 골프장이나 가라오케 같은 곳에서 많은 비즈니스가 결정된다. 나는 그런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일본사람들이 그들의 출세를 위해서 나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꿈을 보는 자기만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면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자기의 꿈과 희망에 가까이 갈 수 있는가가 결정되는 법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 4년 반 근무하는 동안 20년간의 군대 생활이 채워졌다. 중령진급도 확정돼 있었다.

그러나 기로에 섰다. 하버드 박사 학위는 언젠가 돌아와서 해야 했다. 그것은 10년의 기한이 있다.

''90년부터 시작된 하버드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바로 가서 끝내든지 아니면 하버드를 포기해야 했다. 군대를 포기하느냐 하버드를 포기하느냐?

심각한 고민 끝에 나는 하버드를 택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한 나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돈보다는 공부를 하자! 나와의 약속,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내가 암행어사가 되고자 했던 꿈!

그리고 그 꿈은 하버드를 다니면서 더욱 커졌다. 나는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설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할 것이다. 펜이 검보다 강하다.

육군 중령이나 대령보다는 하버드의 박사로서 훌륭한 글을 써서 세계를 감동시키자.

그렇게 해서 군대를 떠나고 하버드를 다시 오게 되었는데, 하버드 오길 얼마나 잘 했는지를 가고 나서 알았다.

하버드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석사학위 때도 가르쳤지만, 나는 하버드 아이들에게 멋진 반항아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 아이들에게 인간이 만든 범주, 제도 그 것은 얼마 전에 혹은 오래 전에 그 시대 사람들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지금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바로 고쳐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리고 16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는 것만이 인생의 성공은 아니다. 20년이 되어도 좋다.

살아있는 공부를 해라. 현실을 배워라. 그리고 학문과 같이 합쳐서 강한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먼 훗날 한 20년 후 16년만에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을 한 사람과 살아있는 지식과 학문을 같이 배워서 겸비해서

좀 늦긴 했더라도 그 때 출발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

누가 더 크게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인지? 그 때 견주어 보아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그 아이들은 큰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하버드의 학생들 중에 미래의 루즈벨트, 케네디가 없으라는 법이 없다.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서 세계를 바꾼다. 그 뿐만 아니라 미래를 바꾸고, 21세기를 바꾼다.

나에게는 딸이 있다. 우리 모녀는 하버드대학생이다.

하버드역사상 두 번째로 도서관에서 나란히 공부하는 모녀 대학생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백인 모녀가 다녔는데, 동양여자로서는 우리가 최초였다.

덕분에 우리 모녀는 하버드에서 유명해졌고, 하버드 Korea News Letter와도 인터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기회와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한국에 알려지고, 방송에 나오고, 책을 쓰게 되고, 여러분을 만나게 됐다.

운명은 참 신기한 것이다. 물론 창조를 해나가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좌절도 많다.

그 많은 좌절을 헤치고 자신을 일으키면서 나아간 것은 바로 나의 상상력이었고,

그 상상력이 어느새 자기의 믿음이 되었다. 내가 나를 믿으니 사회도 나를 믿어주었다.

 

국제화시대, 한국사회의 문제점

많은 한국인들이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우리 모녀의 성취가 과연 한국에서도 가능했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내가 그대로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이만큼 인정받는 위치로 나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아마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대답하는 내가 서글프다.

이 모든 성취가 미국의 배려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나의 성취가 왜 미국에서는 가능한 지

다시 한번 미국과 한국의 제도를 검토하고 비교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희망 없이 시들어가고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폐습으로 인해 아까운 자원이 빛도 못보고 시들어 가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더욱이 인재등용에 있어서 올바른 경쟁이 없이 어느 한쪽만을 보호한다면 진정으로 실력 있는 사람을 한국의 대표로

뽑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온 국민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일꾼을 키우는 결과를 이룰 수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곧 치열하고 비정한 세계의 경쟁 속에서도 한국을 지킬 수 있는 국력이 된다.

 국제역사를 공부하면서 인간과 인간 관계도 굉장히 경쟁이 치열하고 잔인할 수 있는데,

국제관계가 더욱 잔인하고 비정하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의 우방이 내일의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와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일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자존심이나 편견을 접을 수 있다. 동시에 언제든지 이중인격자도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내 나라를 위해서 나를 희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실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타이완과 손을 잡았다. 냉전시대였으며 중국과 소련이 적이었다.

닉슨 시대, 베트남전이 끝나면서 중국과 손을 잡았다. 미국은 타이완을 버렸고 한국도 같이 따라갔다.

리더인 미국과 거래하기 위해서 일본도 마찬가지로 따라갔다. 유엔에서까지 타이완을 배척하고 중국이 가입했다.

냉전은 끝났다. 냉전시대에는 그래도 조그만 나라들이나 소수민족들이 큰 리더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머리만 좋으면 그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지금 현재는 어떤가? 미국이 최강국 리더라는 것은 상식으로 통한다.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미래를 모르듯이 미국이 언제까지 한국의 우방으로 남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북이 있다. 말썽부리고 있다. 미사일로 일본을 위협하고,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이 재무장을 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재무장도 반대하지 않는다.

이북은 충분히 그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이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교수님은 한국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강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남자에게 우선권을 준다해도 결국 정말 강한 사람은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다. 외국에 나가봐도 그렇다.

자식들도 험하게 키운 자식들이 튼튼하다. 그러나 ''네가 최고다''하며 키운 자식들은 대개 약하다.

남존여비사상에 입각해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들은 약하고, 역자들은 강해지는 것이다.

남자들 중에서도 배경이 있거나 부유한 집단의 자식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가난한 집안의 끈 없는 집안의 자식보다 약하다.

한국 내에서의 경쟁에서는 보호해 줄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버틸 수 있지만, 문제는 국제경쟁이다.

세계는 점점 국제화되어가고 좁아져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그 많은 국민들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 한국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던 나와 같은 여자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그리고 실력이 있고, 의욕이 있고, 하려고 하는 자들을 선출해서 나라를 대표하게 한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가진 것은 인력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지도를 펴놓고 보면 한국은 참 조그맣다.

한국을 대표해서 그 강자들과 겨루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약자들 아닌가?

그리고 그 국제 경쟁에서 그 사람들은 한국을 경제적 경쟁이든, 정치적인 경쟁이든,

군사적인 경쟁이든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 봐주지 않는다.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다.

 결론적으로 남존여비나 ''줄''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우선적인 기회가 주어지는 식의 잘못된 폐단은

한국을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불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오늘의 한국을 지키고 내일의 주인들인 우리의 후손들이 떳떳하게 설 땅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도

온 국민이 단합해서 힘을 키워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경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온 국민이 진정한 실력과 힘찬 의욕을 기를 수 있도록 평등한 기회를, 그리고 희망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옳지 못한 올가미는 인간 스스로가 풀어야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음은 책에 나온 글 중 일부이다.

 

"인생 50이면 황혼으로 접어드는 길인데 이제 박사는 해서 뭐하니? 그만 애쓰고 여생을 즐겨도 되지 않니?

내가 눈에 핏발을 쓰며 공부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나는 지금 내 자서전의 마지막장을 쓰고 있는 거야. 그랬다.

나도 여생을 편하게 즐기고 살고 싶다는 충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액수로 보일지 모르지만,

연금과 그 동안 저축해둔 돈이면 여생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내겐 지난 50년 동안 다져온 자신과의 약속이 있다. 꿈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삶을 통해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지만 꿈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다보면 길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작으나마 분명하게 존재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나 하나의 힘은 미약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의 누군가가 그랬고, 또 그 앞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외롭게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 서로 만나고 모여 물길을 이루고,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지 않는가?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지금 세상이 조선시대보다는 차별이 줄었다면 그건 누군가 힘겹게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한 대가라고 믿는다. 역사는 강한 자들만을 위해서 흘러서는 안된다.

역사는 약한 자들을 위해서도 흘러야 한다. 그 역사의 길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다."

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출처 : uccpr
글쓴이 : 태양가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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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경영의 神, 왕융칭,

□15세 소년의 꿈

1931년 밀가루 부대를 잘라 만든 바지에 허름한 옷차림, 15세 나이로

취업에 나선 소년

왕융칭

(王永慶)

▸대만 포모사 그릅 창업주(1917〜2008, 8남매중 장남)

▸계열사 30개, 임직원 10만여명, 매출 750억불(2010)

▸아버지의 병환으로 봄과 여름에는 찻잎을 따서 팔고 겨울

에는 목탄을 만들어 생계 유지

□그는 어떻게 약 9조원(2천억 대만달러)의 자산가가 되었을까?

성공비결1

사소한 변화가 도약의 시작

1931년(15세) 쌀가게 취업, 1932년(16세) 쌀가게 개업, 그러나 왕융칭의

가게를 찾지 않는 사람들 ⇢ 이윤 적은 쌀가게 특성상 가격경쟁 불가능

당시 쌀가게들이 돌을 골라내지 않고 파는 쌀에 착안, 돌없는 쌀판매로 성공

▸쌀가게 최초 “배달제 서비스” 실시

성공비결2

철저한 자기관리와 검소함

매일 새벽2시 기상, 명상1시간, 조깅1시간, 30년 가까이 사용한 손수건,

딸 결혼식 혼수품으로 면도기 1개, 왕회장 사무실에 1,000달러 짜리

카펫 깔다가 직원해고 당할 뻔

▸최고의 재벌이었지만 가지고 있던 양복은 다섯벌뿐

성공비결3

돈은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

▸1963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위해 명지공업전문大 설립

▸1976년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비영리재단 장경기념병원설립(現장경大)

▸1980년 생활환경개선연구센터 설립

▸1985년 포모사 경영방식을 전수하는 연수지원센터 설립

□죽는 순간까지도 소신을 지킨 명언들

○ 누구나 富를 바라지만 태어난 날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사람도 없다.

돈은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용도로 사용하라고 잠시 맡긴 것 일 뿐, 누구도

진정 이를 소유할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생각으로 충실한 인생을 경영하라.

인생 최대의 가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하고 아름다운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다.


⇨ 나는 이러한 목표 덕분에 긴 세월을 결코 나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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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팔아라: 광고로 세상을 바꾼 천재 데이비드 오길비

2013/01/10 18:40 from Book

며칠 전 도서관에 들렀다가 펼쳐져 있던 조선일보 북 세션을 살펴 보았다. 북 세션에는 새로운 신간으로 광고계의 거물인 데이비드 오길비의 전기 <무조건 팔아라>가 출판됐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예전부터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광고일을 하기 전에 요리사, 스파이, 심지어는 농부의 삶도 살았다는 그의 특이한 이력과 그가 남긴 전설적인 광고에 대한 설명, 80년 대 이후 광고계에 불어닥친 M&A 열풍 등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 바로 구입했다.


데이비드 오길비에 대한 전기


데이비드 오길비 밑에서 수십 년을 일했고, 그 자신도 오길비&매더에서 회장을 지냈던 케네스 로먼은 데이비드 오길비가 남긴 수 많은 메모들과 그가 남긴 저서, 그의 지인들에 대한 상세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전기를 작성했다. 그의 출생부터 전설적인 광고를 만들고 최고의 대행사를 이룩해 나간 과정과 WPP에 매각하고는 후회만 남은 고집스런 늙은이로 남았던 말년까지를 상세히 적고 있다.


나의 경우는, 이 책을 통해 오길비가 어떻게 3명이서 세운 광고 회사에서 클라이언트를 유치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전설적인 광고들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회사를 이끌었는지 등에 대한 그의 업적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책은 오길비의 전기에 더 충실한 나머지 그의 출생과 핏줄, 그의 언행과 인간성 등 오길비의 업적 못지 않게 인간성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광고 철학이 궁금한 것이라면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오길비가 남긴 저서인 <광고 불변의 법칙>을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이한 이력


앞서 말한데로 오길비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영국 태생이며 스코틀랜드 태생이다. 그는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각종 모임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나가 자신을 어필하기도 했다. 제법 큰 키에 다부져 보이는 몸매, 잘생긴 얼굴과 달리 그는 천식을 앓았고 운동을 잘 하지 못했다. 학창시절에도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학창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오길비는 죽을 때까지 돈에 집착했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시절의 가난에 대한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집은 가난했지만 그의 집안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명문 페테스(Fettes)를 다닐 수 있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는 이 학교를 모델로 만들어 졌고, 토니 블레어 총리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오길비는 페테스에서 읽기와 쓰기에 대한 기본을 익힌다. 그는 영어 문법 뿐만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라면 당연히 배워야 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과 읽기, 쓰기를 철저하게 교육 받는다. 제품의 특징을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기억에 남도록 카피를 작성했던 그의 능력은 아마 여기서 기초를 다진 듯 하다.


이후 옥스포드까지 장학생으로 진학한 오길비는 성적 미달로 옥스포드를 중퇴하고 만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일류 호텔 주방장 보조로 취직한다. 출근 첫날 벽에 기대어 감자를 깍던 그는 '여기서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하므로 똑바로 서서 일하라'는 주방장의 말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오길비는 그 때 주방장의 말이 일에 대한 그의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대통령 식탁에 올라갈 에피타이저까지 만들었던 오길비는 돌연 영국으로 돌아와 아가(AGA) 쿠킹 머신 세일즈맨으로 취직한다. 거기서는 그는 성실한 태도로 주부들에게 쿠킹 머신을 설명하고, 주방장 경력을 활용해 쿠킹머신 요리 교실도 열고 주부들에게 쿠킹 머신 활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그는 다른 세일즈맨에게 세일즈 매뉴얼을 작성해서 배포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형이 운영하는 광고회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에 건너가 매더앤크라우드의 자회사를 미국에 세우기 전까지 그는 영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을 돕고, 리서치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땅을 구입해 3년 간 농부로 지내기도 했다. (물론 농사일을 직접 한 건 아니다.) 특히 그는 리서치 기업 갤럽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직관과 감이 아니라 철저한 데이터와 시장 조사를 통한 과학적 분석을 중요시하기 되었다. 그래서 그는 쿠폰을 우편으로 발송하여 광고하고 회신률을 통해 광고의 효과를 측정하는 다이렉트 메일 광고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광고의 본질


이 책의 원제는 'The King of Madison Avenue: David Ogilvy and the Making of Modern Advertising'이다. 하지만 우리나라판의 제목은 '무조건 팔아라(We sell or else)'이다. 이것은 오길비의 광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강조한 말이다. 즉, 광고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발하고 재치있고 재미있는 크리에이비브를 발휘하더라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 광고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광고가 판매들 향상시키지 못하면 그 광고는 실패한 광고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오길비는 내용이 기법보다 중요하며, 사람들이 헤드라인만 읽고 바디카피를 읽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헤드라인에 제품 브랜드가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생동안 크리에이티브에만 중시하는 광고와 광고대행사들을 비난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예를 들며 원칙과 형식을 중시한다고 해서 결코 광고가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오길비는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한 거의 최초의 광고인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에 대행사를 차리고 처음으로 히트시킨 광고인 헤서웨이 셔츠의 광고도 바로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였다. 그는 모든 광고는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장기적인 과정 중의 하나로 여겼다.




안대를 착용한 신사가 옷을 재단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이 광고는 뉴욕타임즈에 실리며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된다. 해서웨이 드레스 셔츠를 광고하면서 셔츠 자체보다는 그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 남자의 스토리를 통해 다른 셔츠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이는 사실 이야기하는 기법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광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위배하지 않았다. 해서웨이 셔츠는 이 광고로 인해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한 것이다. 이 광고는 이후 몇 년 동안 다양한 시리즈로 변주 된다. 영국의 탄산수 슈웹스를 미국에 소개하면서 오길비는 또 한 번 같은 방법을 시도하고 이 역시 성공을 거둔다.





오길비가 히트 시킨 롤스로이스의 광고는 그의 원칙과 잘 맞는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 안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움은 전자시계 소리입니다."라는 긴 헤드카피와 함께 이 자동차의 장점 13가지를 나열한 기나긴 바디카피를 담고 있는 이 광고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언제나 광고주의 상품을 애용하고, 직원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던 오길비는 결국 비싼 롤스로이스를 중고로 구입하고 만다. 회사의 회계담당이 반대하고 나서자 그가 휴가간 틈을 이용해서 말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광고 중 하나는 도브 광고이다. 도브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오길비의 광고는 사실 그가 인정하듯이 이미지와 헤드카피는 진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DOVE creams your skin while you bathe'에서 보듯이 오길비는 도브의 성분 중 1/4이 보습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특성을 광고함으로써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크리에이티브보다 내용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다.


카피라이터로써 크리에이티브 인으로써 오길비의 전성기는 사실 50년대에서 60년대 이르는 약 10여년 간의 기간이다. 오길비는 그 사이는 자신이 누구보다 천재적이었지만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탕진해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광고와 판매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세웠지만 반드시 그 원칙만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코 뛰어난 크리에이티브를 보이는 광고를 혐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


기업 문화의 형성


오길비는 광고에 제품의 핵심을 담기 위해 정말로 철저하게 일했다. 프랑스 주방장의 가르침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다른 대행사들이 어떻게 광고했는지를 샅샅이 조사했고, 제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카피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했던 그는 집에 갈때도 서류 가방 3개에 일거리를 잔뜩 들고 가기 일쑤였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자기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는 종종 열심히 일하지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해고하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 오길비는 자신이 휴가를 간 사이 그 직원들을 해고시키도록 했다. 오길비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것 만으로도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종종 직원들이 만든 광고물을 신란하게 비판하던 오길비지만 직원들이 대한 그의 태도는 정중한 편이었다. 그는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에 대한 기준은 아주 높게 설정해서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오길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일종의 기업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길비는 결코 최대의 광고대행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의 광고대행사를 만들고 싶어했다. 똑똑하고 재치가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토론하고 최고의 기준에 따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하는 회사. 그것이 그가 바라는 회사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 최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의 탄생


하지만 그의 바램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80년대 미국 대형 광고대행사 사시에 합병 바람이 불었다. 여러 개의 광고 대행사들이 옴니콤(내 첫 직장인 인터브랜드도 옴니콤 소속이다.), 인터퍼블릭, WPP로 재편 되어 갔다. 오길비는 자신의 전재산이 대행사 주식에 묶여 있어 주식공개를 원했다. 이사회의 반대에도 주식공개를 단행했던 오길비는 수년 뒤 WPP의 CEO 소렐이 오길비앤매더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긴장한다. 이사회와 수차례 회의를 갖고 소렐과도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주가의 2배를 주겠다는 소렐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거절한다하더라도 결국 소렐은 어떤 식으로든 오길비의 주식을 매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을 돈에 집착했지만 돈을 제대로 다룰 줄은 몰랐던 오길비는 이때도 큰 손해를 본다. 주식공개 후 자신의 주식을 꾸준히 매각했던 오길비는 소렐이 오길비앤매더의 주식을 2배 가치로 매수하겠다는 결정이 나기 2주 전에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모든 주식을 팔아버린 것이다. 광고를 만드는 법에는 누구보다 밝았지만 숫자에는 누구보다 어두었던 그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WPP의 CEO 소렐은 이와 반대다. 그가 왜 오길비의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 책에는 나와있지 않다. 이후 WPP의 행보를 보아도 세계 최대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을 만들겠다는 WPP의 야심은 회사의 크기 이외에는 뚜렷한 방향을 보이지 못했다. 오길비를 인수하느라 너무 큰 돈을 대출한 소렐은 이후 몇 년간 주가 하락으로 고생하지만 위기를 벗어나 다시 기업 사냥에 전념한다.


WPP는 소렐의 바램대로 세계 최대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되었지만 오길비앤매더의 분위기는 전과 달라졌다. 많은 임원들이 나갔고 사원들을 존중하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한 때 최고의 광고를 위해 신과 경쟁해야 한다던 분우기도 점차 사라져 가고, 광고 크리에이티브보다 숫자가 중요해지는 시기가 왔다. 오길비는 결국 WPP 합병에 단초가 된 기업 주식 공개를 죽을 때까지 후회했지만, 돈을 위해 WPP 회장직을 수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몇몇 대외관계를 위한 얼굴뿐인 명예직이었다. 그마저도 몇 년 후 (타의에 의해) 해임하고 만다.


모순된 원칙, 모순된 캐릭터


크리에이티브(표현)보다 내용을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때때로 브랜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광고에 활용한 카피라이터. TV를 통한 미디어 혁명 시대에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와 인쇄에 공을 들인 광고 전문가.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었으면서도 비행 공포증으로 언제나 배와 기차를 선호했던 광고 대행사 CEO. 평생 돈을 많이 벌고자 했지만 돈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속물.


그의 모순되고 다양한 면모들을 보면서, 비록 이 책 한 권으로 오길비를 접했을 뿐이지만 오히려 그가 한 없이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거침없이 남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에게 한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노인네로 말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그만큼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자신의 일에 대해 진지한 자세와 태도로 임했다. 원칙을 내세웠지만 때때로 원칙에 벗어나더라도 좋은 결과물들을 순순하게 인정할 줄도 알았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데이비드 오길비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이다. 그의 광고 철학과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일면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중심은 아니다. 오길비라는 인물과 오길비앤매더의 기업 역사, 50년대~80년대까지 미국 광고대행사들 사이의 경쟁과 관계 등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쓰러진 공룡을 일으켜 세운  경영의 귀재'실패는 일었을지언정 지금가지 단 한번도 내 한계를 의심해본 적은 없다.긍정 에너지가 경영의기조

 
데이비드 노박 암 브랜드 CEO
데이비드 노박 얌 브랜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ㆍ59)
[아시아경제 박선미 기자]KFCㆍ피자헛ㆍ타코벨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 외식 전문 업체 얌 브랜즈는 올해 미국 내 판매 부진 극복과 해외 시장 확대, 새로운 사업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데이비드 노박 얌 브랜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ㆍ59)는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과 회견을 갖고 "미국 시장에서 실추된 얌 브랜즈 이미지를 회복하고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ㆍ인도ㆍ프랑스 사업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얌 브랜즈는 지난해 안방인 미국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미국 시장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온 타코벨의 매출이 최근 급감한 탓이다. 이는 타코벨의 타코(옥수수빵에 여러 재료를 넣어 먹는 멕시코 전통 요리)에 쇠고기보다 다른 양념과 식품 첨가물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KFC도 닭고기가 신선하지 않은데다 따끈따끈하지 않다는 혹평을 받으며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노박은 미국에서 얌 브랜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타코벨 제품 혁신과 KFC의 이미지 제고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는 "프리토 레이와 협력해 도리토스 칩으로 만든 새 타코 쉘 제품을 다음달 출시할 계획"이라면서 "유명 요리사 로레나 가르시아와 손잡고 다른 제품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노박은 "고객의 매장 방문 시간대를 다양한 시간대로 분산시켜야 매출이 늘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침 식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박은 "KFC가 세계 곳곳의 매장에서 아침 메뉴 확대를 추진 중"이라며 "타코벨도 미 서부를 중심으로 800개 매장에서 아침 메뉴 서비스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피자헛도 과테말라에서 아침 서비스를 시도 중이다.

노박은 얌 브랜즈의 해외 시장 공략과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았다. 중국은 얌 브랜즈에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노박은 "얌 브램즈가 미국에서 미국인 100만명당 60개 매장을 갖고 있는 셈"이라면서 "중국에서는 100만명당 매장 수가 3개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회가 무궁무진한 중국에서 얌 브랜즈는 모든 외식업 부문의 선두에 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노박은 올해 안에 인도에서 새 매장 100개를 열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인도 시장에 관심이 많다"면서 "올해 100개 매장을 새로 열어 5년 안에 매출 1억달러(약 1125억원)를 달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박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일하다 우연히 피자헛에 입사해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고속 승진했다. 4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얌 브랜즈의 CEO로 등극한 뒤 얌 브랜즈를 세계 최대 외식 전문 업체로 키웠다.

명문 대학을 나와 경영학 석사과정까지 마친 다른 기업 CEO들과 배경이 다르지만 노박의 경영능력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도 인정한다. 버핏은 노박에 대해 "미식축구 공격수를 뽑듯 CEO를 선발하라면 노박을 택하겠다"며 "노박에게 버크셔 해서웨이의 경영을 맡기고 싶다"고 평했을 정도다

Hompany란 home과 company를 합쳐 만든 신조어로 '홈퍼니 경영'은 가정과 같은 직장분위기를 만들어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을 높히자는 전략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기업들이 홈퍼니 경영을 펼치고 있다. 집처럼 편한한 회사,경영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직장을 꿈꾸어 보았을 것이다.일본의 가나가와 시에는 '홈퍼니 경영'의 롤모델이 되고 있는 작은 분필공장이 있다.전직원이 70여며 명에 불과한 이 공장 앞마당에 들어서면 '일하는 행복상'이라는 조각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조각상에 있는 글귀를 읽어보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 카나가와 현 카와사키 시에 있는 작은 분필공장 일본이화학공업日本理化學工業 앞마당에는 ‘일하는 행복상’이란 조각상이 하나 서있다.

“으뜸가는 행복으로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도움주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네 가지를 꼽는다. 흔히 일을 하면 사랑을 뺀 나머지 행복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사랑마저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글귀가 적바림되어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2009년 일본에서 가장 으뜸가는 경영자에게 주는 ‘시부사와 에이치상’을 받은 이 회사 회장 오야마 야스히로(大山泰弘)이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전성철과 꿈을 쫓는 사람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IGM의 전성철 회장의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은 한 때 변호사였던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꿈에 부풀어있던 야무진 꿈을 가진 한 청년이였던 전성철은 꿈을 향해 정말 열심히 달려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꿈은 역시 꿈이었을까요. 시련과 아픔 고통은 늘 함께 했다고 하네요. 전성철의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했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려 꿈을 꾸는 자들에게 희망과 경험담을 들려주는 꿈꾸는자에게 필요한 책인 것 같습니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장에서 자고있는 꿈의 책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다시한번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전성철과 꿈을 함께 쫓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국제변호사로서 미국 로스쿨, 로펌 성공기, 스물아홉의 무일푼 노총각으로 MBA와 로스쿨에 도전,

웨이터, 택시운전사, 야적장 수위, 빵공장 직공 등 고학끝에 세계 법률시장의 메카 맨해튼 로펌에서 성공을 거두기 까지의 도전과 꿈의 나날들을

글로 옮겨 단지 한 사람의 성공 스퇴로서의 꿈과 희망이 아닌 성공까지의 악착같은 노력과 적극적인 삶의 교훈을 체험담으로 전해줍니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많은 강연과 희망을 나누는 다양한 모습들을 사회에 비추고 있는데요. 1949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전성철은 이후 직장생황을 하다 스물아홉 늦깎이 노총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네소타 대학에서 MBA와 로스쿨을 마치고 뉴욕주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29살에 어떻게 저런생각을 했을까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꿈이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맨해튼의 대형 로펌인 리드&프리스트에서 파트너로 일하면서 현대, sk, 대우,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활동을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네요.

한국 정부를 대변하여 1980년대 최대 통상 문제였던 슈퍼 301조 지정 저지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머 거의 영웅이였던 것 같습니다 -0-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변호사이면서도 나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인상도 꽤 좋아보이네요...ㅎㅎ



 

1991년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국제변호사로 일하면서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정책기획 비서관으로 사법개혁 등 소위 세계화 개혁 작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애국심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자신의 성공과 자녀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인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까지 낸 것 같은데요.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책들을 저서했다고 합니다. 사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 라는 책도 꼭 읽어봐야 겠지만서도 협상에 관련한 책도 있더라구요. 잘 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성철을 협상의 달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꿈꾸는자는멈추지않는다의 작가 전성철은 IGM 협상스쿨 원장이기도 하다고 하며 매일 강연을 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하네요. 전성철씨가 참 존경스럽습니다.

 

 

 

1992.3.17 미국 시민 최고 영예의 상 '자유의 메달'을 받다


매출액 규모 3900억 달러,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직원 숫자 210만여 명, 매출액 기준으로 늘 세계 1위를 다투는 기업. 명실상부한 세계적 소매 유통기업 월마트를 일컫는 말이다. 월마트의 성공 이야기는 그 창업주 샘 월튼의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성공 스토리와 만나보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아칸소 주 벤톤빌의 월마트 중앙 사무소 강당에 아침부터 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잠시 뒤 보도진이 도착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 부부가 등장했다. 그들의 눈은 연단 위의 한 사람 쪽을 향했다. 74세 생일을 앞둔 휠체어에 탄 노인, 1990년 초 골수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선고를 받고서도 비행기를 타고 월마트 지점을 돌며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긴 사람, 바로 월마트 창업주 샘 월튼이었다. 월튼을 향해 월마트 직원들이 외쳤다. “나에게 W를! 나에게 A를! 나에게 L을! 나에게 ‘갈겨 쓴 글씨’를!(이 대목에서 막춤 비슷한 춤을 춘다.) 나에게 M을! 나에게 A를! 나에게 R을! 나에게 T를! 그게 뭐죠? 월마트! (WAL-MART) 그게 뭐죠? 월마트! 누가 최고죠? 고객이요!” 전 세계 월마트 매장에서 직원들이 외치는, 이른바 월마트 구호다. 그날의 구호는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대통령 부부와 보도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1992년 3월 17일 월튼은 백악관이 수여하는 미국 시민 최고 영예의 상인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약 3주 전이었다. 백악관에서 수여식이 열려야 하지만, 암 투병 중인 월튼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통령 부부가 직접 벤톤빌로 왔던 것이다. ‘겸손이 근본인 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또한 성공을 결코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소매상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메달에 새겨진 문구다. 그리고 그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형적인 미국인 샘 월튼은 기업가 정신을 실천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종업원들에 대한 극진한 배려와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 차별화하고자 하는 남다른 욕구는 그의 경력에서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것들이었다. … 충실한 가장이자 업계의 지도자이며,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인물로서 샘 월튼은 신념과 희망, 고된 노동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사업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성공한 이 기업계의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오클라호마 주 킹피셔 근교에서 태어난 월튼은 예닐곱 살 때부터 잡지 판촉일을 했고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신문 배달을 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풍족하지도 않은 가정형편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성적도 우수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우유를 직접 짜서 배달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미주리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생 클럽 회장, 4학년 남학생 명예학회 회장, ROTC 엘리트 단체 대표, 성서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식당 웨이터로 일하고 수영장 구조 책임자로도 일했으며, 신문 배달을 사업 비슷하게 운영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 배달 구역을 늘려나가면서 한 해 5천 달러 수입을 올릴 정도였다.

 

 

 

 

사업 성공 원칙의 하나로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를 꼽은 샘 월튼

 

유명한 경영대학원 와튼스쿨 진학을 계획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1940년 6월 대학 졸업 후 아이오와 주 데모인의 작은 상점에서 18개월 동안 일하면서 뛰어난 판매 능력을 발휘했다. 1942년 입대해서 항공기 공장이나 포로수용소에서 관리직으로 일했고 1943년에는 헬렌 롭슨과 결혼했다. 월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이들도 그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 나는 10살이 되기 전에 깨달았다. 월마트가 낭비하는 1달러는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고객을 위해 1달러를 절약할 때마다 우리는 경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게 된다.”

 

월튼의 딸 앨리스의 회고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식으로든 회사 일을 거들었다. 나는 사탕 계산대 뒤에서 일하기도 하고, 다섯 살 때는 팝콘 바를 맡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사업 이야기가 빠지는 법은 없었다. 언젠가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말이지,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 상점을 열려고 하셔.”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

 

 

1945년 전역 후 월튼은 자신의 돈 5천 달러와 장인에게 빌린 돈 2만 달러로 아칸소 주의 인구 7천 명 소도시 뉴포트에 있는 벤프랭클린 잡화점을 매입해 1945년 9월 1일 개업했다. 폭 15미터, 길이 30미터의 전형적인 구식 잡화점이었다. 길 건너에는 벤프랭클린 잡화점보다 두 배인 15만 달러의 연 매출액을 올리는 스털링스토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벤프랭클린 잡화점은 프랜차이즈 상점이었지만, 월튼은 독자적인 영업 전략을 폈다. 그것은 부지런히 발로 뛰면서 상품 공급자를 만나 싼 가격에 팔 것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어떤 물건을 80센트에 샀다고 하자. 나는 그것에 1달러를 매김으로써 1달러20센트의 가격을 매기는 것보다 세 배 이상 많이 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 하나 당 이윤이 반으로 줄어들지 몰라도 세 배 이상 많은 물건을 팔게 됨으로써 총 이익은 훨씬 더 늘어났다. 얼마나 간단한가. 가격을 낮춤으로써 판매량을 늘린다는 간단한 원리다.”


2년 만에 장인에게 빌린 돈을 다 갚고 이글스토어라는 상점을 하나 더 냈으며, 개업 5년이 될 무렵에는 연 매출액 25만 달러를 올리면서 아칸소 주 최고 매출 및 이익의 소매상점이 됐다. 그러나 월튼은 이런 성공을 뒤로 하고 뉴포트를 떠나야 했다. 점포 임대차 계약 5년 후 계약을 갱신할 옵션을 월튼 자신이 갖는다는 조항을 계약 당시 빠뜨렸던 것. 점포 땅 주인은 계약을 갱신해주지 않았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음은 아칸소 주의 낡고 초라한 인구 3천 명의 시골 도시 벤톤빌이었다.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해 월튼스 염가상품 판매점을 개점하고(오늘날 월마트 방문자 센터), 1950년 7월 29일 첫 신문광고를 냈다. 월튼은 곧 벤톤빌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점원의 증언이다. “월튼 씨는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사람도 크게 소리쳐 부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붙임성 있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했다. 여행에서 돌아 온 그가 가죽끈 샌들을 보여주며 최고 히트 상품이 될 거라 말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그러자 그가 통로 끝 매대 위에 몽땅 쏟아놓고 한 켤레 19센트 가격을 붙였다. 시내 모든 사람들이 그 샌들을 갖게 되었다.”

 

한 상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얼마든 다시 새로운 상점에 투자하는 것이 월튼의 방식이었다. “월마트가 한 중년 남성의 위대한 아이디어로 하룻밤 사이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공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월튼은 유능한 상점 책임자들을 스카우트하면서 속속 잡화점을 개점해 나갔다. 훌라후프가 대유행하던 시기에 월튼은 다른 업자와 절반씩 투자하여, 훌라후프와 똑 같은 크기의 호스를 만들 수 있는 제조업자에게 호스를 공급받아, 다락방에서 직접 훌라후프를 제작했다. 아칸소 북서부 지역 아이들 대부분이 월튼의 손을 거친 훌라후프를 하나씩 갖게 되었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제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1950년대 말 월튼은 미국 최대의 잡화점 경영자가 되었다.

 

 

 

 

 

 

 

소형녹음기 갖고 다니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다

 

 

1962년 7월 2일 아칸소 주의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했지만 2년 간 경쟁업체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후 스프링데일과 해리슨에 2호점과 3호점을 내면서 약진하기 시작했다. 할인판매를 통해 중소도시의 상권을 장악해나가는 전략이 주효했던 것. “우리는 모든 품목을 할인 판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언제나 싸게 팔아야 합니다. 월마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낮은 가격과 고객만족을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다른 어디에서도 더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환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

 

 

 

 

 

 

 

남들이 위험하다고 충고했지만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나가는 전략으로
월마트를 늘려 나갔다.(1911)


1969년에 월튼은 14개의 잡화점과 18개의 월마트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1일 월마트를 상장시켰다. 처음 상장했을 때 주당 거래가격은 16달러50센트였다. 당시 1,650달러에 100주를 산 주주라면, 여러 차례의 주식배당을 통해 20년 뒤인 1990년대 초에 3백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7년부터 87년까지 월마트의 연평균 순투자 수익률은 46%에 달했다.

 

월마트의 출점 전략은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 나가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월마트에 우호적일 것이라 예상한 지역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한 다음 그 구역 일대에 여러 점포를 세워 완전히 장악해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고 지역이 좁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만으로 고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월튼은 상점 부지 물색을 위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월튼은 소형녹음기를 갖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했고, 즉시 실행으로 옮겼다.

 

1970년대 중반 월마트 점포는 100개를 넘어섰고 매출액 1억7천만 달러에 이익도 600만 달러를 넘어섰다. 1974년 56세 때 월튼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한동안 여유롭게 생활했다. 그러나 월튼이 물러나 있는 동안 회사 내에 분열이 일어났다. 젊은 사원들과 나이 든 사원들이 반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1976년 6월 월튼은 회장으로 복귀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당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월튼은 사업 성공을 위한 10가지 원칙을 정리하여 제시했다.

 

첫째, 당신의 사업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사업에 전념하라.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일을 사랑하라.

둘째, 이익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라.

동료들에게 회사 지분을 갖도록 장려하고 할인된 주식을 제공하고 퇴직 때도 주식을 교부하라.

셋째, 동반자들을 자극하여 도전하게 만들어라.

좋은 실적에 충분한 보상을 하고 늘 재충전시키고 책임자들끼리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여 동기를 부여하라.

넷째,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동반자들에게 알려라. 정보는 힘이다.

동료들에게 힘을 부여해서 얻는 이익은, 정보가 누설되는 위험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다섯째, 동료들이 나의 사업을 위해 하는 일에 늘 감사하라. 진지하게 절제된 언어로 칭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늘 듣고 싶어한다.

여섯째, 성공을 자축하고 긴장을 풀고 즐기면서 열정을 보여주어라.

일곱째, 모든 사원들의 말에 귀 기울여라.

고객들과 얘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내야 한다.

여덟째, 고객의 기대를 넘어서라. 고객이 원하는 것 이상을 주도록 하라.

당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과하고 보상하라. 월마트 1호점 간판에 쓰여 있던 ‘만족 보증’이 최선의 전략이다.

아홉째, 비용을 경쟁자보다 낮게 통제하라. 월마트는 유통업계에서 매출 대비 비용이 가장 낮은 회사였다.

열째, 일반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가라.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을 택하고 있다면 그 반대로 가는 게 당신만의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인구 5만 명 이하 소도시에서는 할인점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근로자 착취값싼 중국산 유통으로 미국 경제 약화에 일조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월마트는 2003년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초우량 기업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월마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월튼 개인은 직원들을 가족이나 동료처럼 대했다고 하지만 복지 혜택이나 임금 수준이 동종 업계에서 뒤떨어지는 편인데다가, 가격경쟁력 유지를 위해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면서(이 원칙은 중국에서 깨졌다.) 사실상 저임금 근로자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값싼 중국산만 수입해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의 경쟁력 약화에 일조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최대 규모의 매출과 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매출 증가율이 떨어지고 순이익도 기대에 못 미치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미국 서민층의 실질 구매력이 한계에 도달해 월마트의 저가 전략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진단을 하기도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월튼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특유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우리가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또 한 가지가 바로 지나친 자만이다. 월마트에서 일하기 위해 자부심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자부심을 작게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침내 곤경에 처하고 말지도 모른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샘 월튼, 불황 없는 소비를 창조하라>

(샘 월튼, 존 휴이 공저, 김미옥 옮김, 21세기북스)
1990년부터 샘 월튼이 존 휴이와 함께 작업해 내놓은 회고록이다. 월튼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처세실용서, 경제경영서의 구실을 하기에도 충분하다.

 

<월마트, 슈퍼마켓 하나로 세계유통을 지배하기까지>

(로버트 슬레이터 지음, 남문희 옮김, 해냄)


 

 

샘 월튼, 불황 없는 소비를 창조하라월마트, 슈퍼마켓 하나로 세계유통을 지배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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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물세계사]샘 월튼(1918~1992)|작성자 최종욱

 

1.기회를 포착하는 직관

2.고객이 기대하는 것 그 이상을 제공하다

3.자신을 최대로 낮추다

4.부를 자랑하지 않는 세계제일의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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