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도 청중도 울려버린 천애고아 최성봉, 미국 CNN 방송에

 


최성봉은 대전예고출신 이랍니다.


노래로는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셈이죠.
그가 살아온 길을 단 몇 마디만 들었는데도
함께 지낸 것처럼 자세하게 공감되었습니다.


그런 공감이 바탕되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노래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토해내는 격정의 무대였네요.
전에 폴포츠의 무대를 다시 보는 듯한 감동이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같은 한국인이라는 편견을 떠나
폴포츠 보다는 더 극적인 감동이었죠.


이 영상을 접했을 땐
카스테라 몇 조각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들고 있었네요.
눈물 젖은 빵...


그래요,

우습게 변한 내 몰골은 아랑곳 없이
한껏 박수를 쳤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를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4:10)

 

 

환경과 세상의 격멸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을 등에 지고 세계를 놀라게 한 최성봉을

만나보시고 좌절하지 마시고 I can do it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며 일어서지

않으시겠습니까?

대한민국

힘내자!

 

최성봉 드디어 CNN 뉴스에 나오다

(아래 영문주소를 클릭해주세요)

 

"눈물을 흘리면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http://www.youtube.com/watch?v=yyeK86Vj2ko

 

Korea's Got Talent - Choi Sung-Bong

 

 

출처 : <걸거랑과함께>에 잘 오셨습니다
글쓴이 : 걸풍(걸거랑) 원글보기
메모 :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로토닌 이시형박사  (0) 2014.06.04
첼리스트 도완녀  (0) 2014.04.17
김정운 심리학 박사  (0) 2014.01.05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고미숙  (0) 2013.07.05

'치유'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떠오른 요즘이다. 세로토닌은 몸에 행복감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어느 날 한 정신과 의사는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에 대해 "이제 세로토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세로토닌 문화원'을 설립해 그저 바쁘게만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정신적 폐단을 지적하고 '이젠 다르게 살아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화두로 던졌다. 현재는 '병원이 필요 없는 사람'을 만드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 '힐링아트'라는 또 하나의 단어를 꺼내들었다. 바로 '문인화'다. 문인화를 통해 생명과 사물의 본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마음의 깨끗한 기운과 여백을 찾아 스스로 치유하자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세로토닌 문화원에서 이 시대의 대표적 정신과 의사로 통하는 이시형(80) 박사를 만났다. 문화원 앞마당에서 인사를 나눴다. 아담한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푸름이 짙은 나무들이 빙둘러 서 있었다.

"지금 꽃은 다 졌지만 때가 되면 이곳에는 목련도 피고, 튤립도 있고, 작약도 있어요. 밤에는 별들도 볼 수 있지요. 주택들이 밀집돼 있지만 아주 조용해요. 회원들도 오고 변호사, 화가 등 여러 지인들이 자주 찾아와 자연과 밤하늘을 함께 노래하기도 하지요."

친숙하게 오랫동안 사귄 벗을 소개하는 듯했다. 그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첫 문인화 전시회를 연다. '치유적 예술로서의 문인화'라는 제목으로 강연 시간도 가진다. 나이 80인 정신과 의사가 문인화 50여점을 내걸었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전시에 앞서 직접 그리고 쓴 그림과 글을 모아 '나이 여든 소년 산이 되다'라는 문인화첩을 냈다. 삶에 대한 깊은 사색, 진정한 치유와 행복을 담고 있다. 책을 펴냄과 거의 동시에 전시회를 갖는 셈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이어졌을까.

"사태(책을 내고 전시하는 일)가 이렇게 심각한 상황으로 빠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떤 치기에서 시작됐지요. 작년 말쯤 나이 80이 된다고 생각하고 보니 그동안 해 왔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들이 쉽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다 이루어졌지요. 그러면서 이제 가장 못하는 일을 한번 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교실 뒤편 게시판에 제 그림이 한번도 걸려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는 즉시 주변 사람들을 꼬드겼다. '초등학교 때 교실 뒷벽에 한번도 그림이 걸려보지 못한 사람 모여라'고 했더니 20명쯤 됐다. 평소 존경하는 김양수 화백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허락을 받아낸 그는 일주일에 한번 지인들과 함께 김 화백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나무, 매화 등 사군자부터 시작했다. 배울수록 그림이 어려워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대로 잘 그려나가는데 자신은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공부를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실컷 바람을 잡아놓고 도중하차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사군자가 아닌 산과 나무, 바위를 그렸다. 초가집과 산골, 홍천의 선마을 풍경을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조금은 쉬어졌다. 또 생각날 때마다 글귀를 써 넣었다. 차츰 문인화의 구상에 빠졌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잡념이 사라졌다. 저절로 치유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힐링아트'라는 말도 떠올랐다.

그림을 시작한 지 5개월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김 화백이 같이 그림을 배운 동료들을 모아놓고 "문인화는 담백하고 순수해야 하는데 이 박사의 그림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으뜸이다. 잘 그린 그림도 있고 좋은 그림도 있다"면서 "세로토닌 문화 후원회원을 상대로 경매에 내놓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화첩을 만들고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며칠 뒤 김 화백과 인사동 갤러리 골목에 갔더니 갤러리 주인들이 다들 서로 전시하겠다고 나섰다. 아니 이게 웬일이람? 뿐만 아니다. 출판사와 갤러리 전시 계약까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희수 교수가 책 제목을 '여든, 산이 되다'라고 정했다. 이를 본 서울대 김병종 교수가 '여든 소년의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소년'을 추가하게 되면서 '여든 소년 산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과 전시를 하게 됐던 것. 그림 여백에 그가 직접 쓴 글귀를 잠시 들여다본다.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오는 세월도 넘칩니다' '맨손의 새는 자유로이 난다' '네가 오는 길 달 지고 마중 나가마'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그런 밤입니다' '사랑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그립다' '한겨울의 파란 이끼를 피워내는 늙은 바위의 힘' 등이다. 선시(禪詩) 같은 느낌이 든다고 그에게 말했다.

"문인화 수업은 제게 참으로 많은 걸 깨우치게 했습니다. 저는 시인도, 화가도 아닙니다. 그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생각과 작업의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창조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무뚝뚝하던 바위에 그렇게 따뜻한 마음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물의 본질을 보면서 80년 동안 살아온 내공이 자연발생적으로 부려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인화는 치유의 예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 같이 문인화를 배운 동료 중에 성질이 급하고 격한 사람이 있는데 최근 그 성질이 다 없어졌다. 앞으로 일반인들에게 힐링아트를 보급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요즘 탈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추세인 만큼 기업 CEO들도 감성과 부드러움으로 경영하는 '세로토닌 기업문화'로 눈을 돌릴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화제를 세월호 얘기로 잠시 돌렸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처음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분노입니다. 누구 하나 원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선현의 말씀 중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선현이 교훈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설마'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방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어요."

세월호로 생긴 집단 우울증을 어떻게 치유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사고가 단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서에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아플 때는 충분히 아파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으면 안 되지요.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가족들도 기운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로토닌을 얘기한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후 슬프고 힘든 뉴스를 접하면서 세로토닌 균형이 깨지게 됐으며, 자연과 함께 움직이면서 힐링을 하게 되면 세로토닌 분비가 다시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우울증 등을 치료하는 좋은 약도 많지만 세로토닌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태양을 보면서 30분 동안 걷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귀띔한다.

그는 성장하는 중학생들에게 세로토닌 분비와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지금까지 160여개의 북을 제작해 각 학교에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원래는 고등학교에는 보내주지 않았는데 단원고만큼은 예외로 하고 그들을 위한 북 제작을 이미 마쳤다. 학교 측이 북을 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대로 보낼 예정이다.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서다.

건강관리에 대해 물었더니 "아들이나 딸, 손주뻘 되는 사람들과 늘 기분좋게 만난다. 주말에는 강원도 홍천 선마을에 가서 산에도 가보고 사물도 천천히 관찰하고 그러니 병이 생길 일이 없다"면서 겨울부터 본격적인 문인화 교실을 열어 또 하나의 힐링아트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더욱 건강해지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인생이 더 길고 복잡해졌지요. 따라서 후반전을 위해서는 전반전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나이 들면 모든 것이 나약해지거든요. 베이비붐 세대들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300년을 해 온 일들을 우리나라는 40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후반전을 위해 개인의 노력도 우선 중요하겠지만 기업과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릴 적 꿈에 대해서는 "중학교 때 주로 유럽 쪽을 무대로 한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는데 나중에 커서 혼자 유럽의 낯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상상했다. 나이 70이 거의 다 돼 혼자 유럽 그 상상의 무대에서 직접 꿈을 펼쳐봤다"며 웃는다. 나이 80에 새로운 것, 더구나 제일 못하는 그림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인생사에도 새로운 용기를 주지 않을까.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시형 박사는

193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정신과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스턴 주립병원 청소년 과장, 경북대·서울대 외래, 성균관 의대 교수, 강북삼성병원장,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던 '화병'(HWA-BYUNG)을 세계 정신의학 용어로 만든 정신의학계의 권위자로 대한민국에 뇌과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또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세로토닌하라!' '배짱으로 삽시다' '우뇌가 희망이다' '이젠 다르게 살아야 한다' 등 76권의 책을 펴냈다. 2007년 자연치유센터 힐리언스 선마을, 2009년에는 세로토닌 문화원을 건립했다. 현재 세로토닌 문화원 이사장, 힐리언스 선마을 촌장, 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 ㈔한국산림치유포럼 회장,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이사장, 한국청소년희망재단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아출신 성악가(최성봉)이야기  (0) 2014.07.07
첼리스트 도완녀  (0) 2014.04.17
김정운 심리학 박사  (0) 2014.01.05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고미숙  (0) 2013.07.05
 



1977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첼리스트 도완녀 대표(54)는 한때 독일 브람스음악원에서 강사로 활동할 만큼 장래성이 유망한 연주자였다. 하지만 1993년 학승이던 돈연 스님과 결혼하면서 직접 가꾼 콩으로 메주를 쑤는 등 무공해 청정원료와 전통적인 제조방법으로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무공해제품에 대해 별다른 개념이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돈연 스님과 도완녀 대표는 복잡해지고 있는 산업환경에서 청정 무공해제품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통된장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일찍부터 웰빙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예감한 것.

산골에서 스님과 첼리스트가 된장을 빚는다고 하니 소문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금세 퍼졌다. 특히 한우를 키우거나 채소를 재배할 때 음악을 틀어주는 것에 착안해 콩을 재배하거나 메주를 쑬 때, 항아리에서 숙성시킬 때도 첼로를 항상 연주하며 고객들의 관심을 유발했다. 부부의 공장에는 장류를 구입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한 발길이 이어졌고 두메산골에서 10여개의 장독으로 시작한 사업이 현재는 장독 수가 무려 5200여개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메주와 첼리스트의 항아리들은 장을 담근 날짜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항아리마다 담근 날짜가 표시돼 있으며 가장 오래된 된장은 20여년, 간장은 42년 전 것도 있을 만큼 장인의 정성이 묻어난다.

도완녀 대표의 목표는 메주와 첼리스트의 브랜드 인지도가 상승한 만큼 앞으로 양질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유기농 클러스터’를 구축,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메주와 첼리스트의 제품을 꾸준히 사랑해 준 25만명의 회원과 제품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을 위해 홈쇼핑 채널 방송, 전문 온라인마켓 개설 등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멜라민 파동으로 무공해·유기농 천연제품이 각광받게 되고 메주와 첼리스트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올해 매출목표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도완녀 대표는 “최고의 된장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술력과 좋은 재료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내”라며 “된장은 최소 2년 이상 숙성을 거쳐야 다양한 효소가 어우러진 오묘한 맛을 낸다. 최근 먹을거리 시장이 이래저래 말도 많지만 우리 제품을 먹는 소비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기다림은 오히려 즐거운 것”이라며 기다림의 지혜를 강조했다.

도완녀 대표는 첼리스트에서 메주와 첼리스트의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후 강원도 농민대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메주와 첼리스트’ ‘된장을 연주하는 여자’ 등이 있다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아출신 성악가(최성봉)이야기  (0) 2014.07.07
세로토닌 이시형박사  (0) 2014.06.04
김정운 심리학 박사  (0) 2014.01.05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고미숙  (0) 2013.07.05

 

김정운 “100년을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유인경이 만난 사람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투자 않나. 이제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한때 다방면에 걸쳐 맹활약을 하던 대중적 스타였다. 명지대 교수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라는 타이틀을 필두로 베스트셀러 저자로, 방송 진행자로, 최고 강연료로 모셔야 하는 명강사로 명성을 떨쳤고, 급기야 CF 모델까지 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는 이 모든 직함을 서울에 두고 2년 전 홀연 일본 교토의 미술대 학생으로 변신했다.

그 이후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국내 최초로 ‘휴테크’란 개념을 제안하며 ‘잘 놀아야 성공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책을 통해 중년남성들의 심리를 꿰뚫은 그는 정말 잘 놀고 있을까. 50세에 그 아까운 교수직을 내려놓고, 그 많은 강연료를 뒤로 하고 떠난 그에게 ‘안녕하게 사는 법’을 듣고 싶어 모처럼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요즘 안녕한가.

“매우 안녕하다.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 우선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혼자 우아하고 고상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장을 봐서 미리 그릇에 담아둔 샐러드, 빵과 직접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해서 내린 커피를 클래식을 들으며 먹고 마신다. 8시에 일어학원에 가서 일어공부하고, 학교로 돌아와 학생식당에서 300엔(3000원 정도)짜리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그림수업을 받으며 6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현재 교토 사가현 예술전문 단기대학생이다. 일본화 전공이다. 만화를 전공하려 했으나 영어가 가능한 교수가 일본화 교수밖에 없어 일본화를 배우고 있다. 뜻밖에 내가 너무 일본화를 잘 그려 교수도 감탄한다. 저녁에는 돌아와 책 번역하고 다른 책도 읽는다. 내가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 싶으면 칭찬해주려고 목욕탕에 가서 온천도 하고, 맥주도 마신다. 밤에 쓸쓸하면 가족과 통화하고 카톡에 올려진 사람들의 사진을 본다. 2012년 1월 3일에 큰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나는 5일 교토에 왔다. 그 사이 아들은 제대했고 난 계속 학생이다.”

50세에 가장이 직장, 그것도 65세 정년이 보장된 교수를 그만두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존경하는 이어령 선생이 인생에서 정점을 찍지 말라고 했다. 정점에선 내려올 일만 있기 때문이다. 50세 무렵에 난 정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안정된 교수직, 하루에 수십 군데에서 오는 강의 요청, 수십만권이 팔린 책들, 아이돌처럼 밴을 타고 다니고 기사와 비서도 있었다. 바쁘다면 헬기를 보낼 테니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많았고, 방송 제의나 정치권의 유혹도 많았다. 그러다 이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점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후회는 없나.

“내가 가장 잘한 결정이 교수직 그만둔 것과 그림을 시작한 것이다. 상황에 밀려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교수 체질이 아닌데 억지로 하던 교수직을 그만두니 행복하다. 학생들에게 강의는 해도 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은 부족했다. 그림 역시 내가 어떤 대상에 이렇게 몰두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재미있다. 말과 글 등 자기표현의 수단이 많은데, 말과 글은 나중에 후회하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때가 많다. 그림은 가장 후회 없는 자기성찰의 수단이다. 논리적 성찰은 아니지만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만년에는 전공에 관계없이 다들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만년도 아닌 나이에 그림을 그려 뭐할 건가.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이걸 어떻게 어디에 써먹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시작해서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거나 공부를 할 때 늘 그 결과, 활용도를 궁리했는데 그림에 대해서는 결과물에 대한 강박이 없다. 원래는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의 성을 다루는 ‘에로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만화 대신에 일본화를 배우는 중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말 잘 그린다. 앞으로 글로만 표현되지 않는 또 하나의 영역을 그림과 같이 담아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기는 하다.”

50세에 훌쩍 떠나 많은 중년남성들이 부러워한다. 물론 김정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도 하지만….
“‘당신이니까 가능하다’는 말은 불쾌하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호모헌드레드, 100세인의 삶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다. 45~60세를 신중년으로 칭할 만큼 생애주기도 달라졌다. 학교로 치면 학제가 개편된 셈이다. 그렇다면 각각 삶의 과정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일부일처제도 고민할 문제다. 25세에 결혼한 한 배우자와 75년을 계속 사는 게 행복일까. 내 아들에게도 가능한 한 늦게 결혼하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100년 동안 사용할 에너지를 50년 만에 다 쓰는 셈이다. 지난 총선 때 정치권의 유혹이 많았다. 정치를 하면 굉장히 폼나게 잘할 자신도 있고, 그런 제안을 받으니 갑자기 역사와 민족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그런데 가족과 상의하니 아들이 ‘아빠가 정치하면 정말 잘할 것 같지만 분명히 일찍 죽을 거예요’라고 했다. 정치하며 받을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정치만 하기엔 내가 너무 다른 능력이 많다. 국가적 낭비다.”

정치를 안 해도 우리 국민들, 특히 남성들은 모이면 다들 정치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은 진정한 나라 걱정이나 덕담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건 일단 한국 사회의 기본 정서가 집단불안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발전방향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한국 사회에서 불안은 아주 다양한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사안이 ‘보수 꼴통’과 ‘좌빨’로 아주 간단히 나뉘는,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도 집단불안에서 출발한다. 불안할수록 적을 분명히 하면 내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확실한 한 명의 적을 만들어놓고 그를 욕하면서 자기위안을 삼는다. 집단불안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국제통화기금 사태부터다. 그 전까지는 불안할 여지조차 없었다. 우선 가난을 극복해야 했고,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민주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우선이었다. 좀 생활의 여유도 생기고 민주화의 바람이 부니까 불안해지고, 그걸 정치혐오로 표현하는 것이다.”

집단불안의 해결이나 치유책은 없나.

“정치공학적이나 사회구조적 문제는 논외로 하고, 각각 개인의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 일단 나를 위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나도 일본에 처음 와서 6개월 동안 너무 외로웠다. 럭셔리한 밴을 타고 하루에 7~8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갑자기 아줌마들이 타는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300엔짜리 도시락을 먹는 생활을 하니…. 그런데 내 시간이 많아지니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다. 인생 100세란 말도 나 혼자 내 인생과 내 문제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으니 뇟속 깊이 이해된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많다는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상식이 없어서다. 내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상식이 내것이 된다. 매일 뼈빠지게 회사에서 시달리고 밤마다 술마시고 남 욕하는 등 삶 자체가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데 태도가 어떻게 상식적이 되나. 상식적 사고는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식적 의문을 가질 때 나온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 차분히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왜 바쁜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주말에 나와 별로 가깝지도 않은 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등에 길이 막히는데도 부지런히 다니는 이유가 뭔가. 정직하게 말하면 내 자식 결혼식이나 내 장례식에 그들이 와주길 기대해서다. 그럼 내 자식의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르고 내 장례식도 소리 없이 치르면 되지 않나. 그런 것들이 행복의 본질과 무슨 연관이 있나. 불편한 것을 쳐내면 내 시간이 많아진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상식적이 되고, 상식적이 되면 주변에도 관대하게 된다. 쫓기니까 공격적이 되고, 바쁘니까 짜증이 나고 몰상식해지는 거다.”

10년 전부터 잘 놀아야 성공한다, 그게 주체적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념에 변함이 없나.

“그렇다. 주체적 삶의 조건은 지속가능한 삶이다. 지속가능한 경영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다. 그 원동력은 삶의 재미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일본 가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같은 인간들’을 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남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 자연히 주변사람들과도 즐거움을 나누고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정치인 비판하거나 사회구조를 지적하기 전에 더 근원적인 질문,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던져야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고 지속적으로 행복하려면 삶의 매 순간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5일제 시행 후에 휴식과 여가에 대한 필요성을 알게 되고, 나와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정작 시간이 나도 자기 시간을 엉뚱한 데 쓰지 않나. 얼마 전 자료를 보니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다는 악플러의 60%가 중년남성들이라고 해 놀랐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어젠다가 얼마나 다양한가로 측정된다. 미국과 유럽 신문의 주말판을 보면 안다. 정원 가꾸기를 비롯한 각종 취미, 문화공연 행사 안내와 평들, 정치가 아닌 사회·문화분야의 에세이 등 두툼한 뭉치의 주말판 신문을 읽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그걸 주제로 대화를 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남의 이야기에 악플을 달 시간이 있나.”

대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52세다. 나이를 의식하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성욕이 약해졌다. 톨스토이가 나이 들어서 가장 좋은 것이 성욕이 사라진 것이라는 말을 예전엔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 섹스 대신에 다른 것에 관심이 확장된다. 그림, 디자인 등등…. 나이 들어 시력이 약해지고 성욕이 감퇴되는 등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문화에 눈을 돌리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 나이 또래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삶의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100세까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물론 젊은 여자들이 나를 더 이상 남성으로 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청마의 해인데 새해 계획이나 독자들에게 줄 덕담은.

“말의 해라고 마구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난 100세 시대답게 인생의 계획도 1년 주기로 짜지 않고 5년 주기로 짜고 있다. 앞으로 3년간은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예정이다. 또 5년 정도 시간을 갖고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근대 미적 감각의 변화. 인상파 이후의 미술과 산업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에 대한 연구를 문헌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보고 느끼고 글로 쓸 계획이다.”

“지난밤에 만난 사람들에게 너무 내 자랑을 해서 오늘 아침에 후회했다”는 김정운 박사. 이렇게 잘난 척을 해도 그가 밉지 않은 이유는 그는 수시로 자기성찰과 반성을 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교수생활을 할 때 내려갔던 입꼬리가 많이 올라간 것만 봐도 그는 진짜 행복한 것 같다. 아, 나도 사표를 쓰면 내 입꼬리가 올라가질까….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로토닌 이시형박사  (0) 2014.06.04
첼리스트 도완녀  (0) 2014.04.17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고미숙  (0) 2013.07.05
시니어 프랜너 조현미소장과 함께  (0) 2013.06.15

달마대사와 혜가

 



 

 

본래부터
땅 있었기에

그 땅에
씨를 심어 꽃이 피지만

본래
종자도 있는 것 아니며

꽃도
피는 것 아니네


혜가(慧可) 대사는 중국 낙양의 무뢰(武牢)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고 성은 희(姬)가였다.

신광은 어릴 때부터 덕이 있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뭇 서적들을 두루 읽었는데,

어느날 불서(佛書)를 읽다가 문득 얻은 바가 있어 출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낙양 향산사로 출가한 신광은 여덟 해 동안 좌선에 몰두하였다. 어느날 신광이 선정에 들었는데,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했다.

"머지않아 과위(果位: 깨달음의 지위)를 얻을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에 막혀 있는가? 남쪽으로 가라."

이튿날 신광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를 본 그의 스승 보정 선사가 고치려 하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신광은 뼈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예사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제서야 신광은 스승에게 신인이 말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네 얼굴이 길하고 상스러우니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라. '남쪽으로 가라' 함은

소림을 일컽는 것이니, 필시 달마대사가 너의 스승이리라."

신광은 은사 스님을 떠나 소림굴의 달마 대사를 찾아갔다.

그때에 달마대사는 아홉 해를 기약하고

면벽(面壁: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숨어 지내며 9년 동안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벽을 향하여 좌선한 것을 두고

‘면벽구년’이라 한다.

 

 그 뒤부터 선승들은 선원에서 좌선하려면 반드시 벽을 향하게 되었다)하며

법을 전할 때가 무르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오로지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아침저녁으로

달마대사를 섬기며 법을 물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고,

그럴수록 신광은 자기를 채찍질하며 정진하였다.

'옛사람들은 도를 구하고자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카락을 진흙땅에 펴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옛사람들은 무릇 도를 구함에 있어 이처럼 정성을 다하였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하는가?'

그해 동짓날 초아흐레 날이었다. 밤새 큰눈이 내렸는데, 신광은 달마대사가

선정에 든 굴 밖에 서서 꼼짝도 않고 밤을 지샜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고, 달마대사는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눈 속에 서 있는 신광을 보았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 것 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대사의 이 말씀을 듣더니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기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러자 때아닌 파초가 피어나 잘라진 팔을 고이 받히는 것이었다.

신광의 구도심이 이처럼 열렬함을 본 달마대사는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이 처음에 도를 구할 때에는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네가 지금 팔을 잘라 내 앞에 내놓으니 이제 구함을 얻을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혜가(慧可)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혜가의 왼팔이 다시 본디의 자리로 가 붙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 진리의 요체)을 들려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불안한 네 마음을 여기에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

이 말 끝에 혜가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혜가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 대사는 34년 동안 업도에 머물며 설법하다가,

552년에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하고, 그 이듬해에

그의 나이 107살이 되어 입적하였다.




마음이 일어나야 이런저런 법도 일어난다.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이 어디있나?

삼계가 모두 마음뿐이라 하심

어찌 나를 속일일까?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으메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랴?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첼리스트 도완녀  (0) 2014.04.17
김정운 심리학 박사  (0) 2014.01.05
고미숙  (0) 2013.07.05
시니어 프랜너 조현미소장과 함께  (0) 2013.06.15
앤서니 라빈스  (0) 2013.06.07

“성형은 마음의 소통을 없애고 지옥의 길로 들어서는 것”

근래 들어 ‘몸’은 남들에게 과시하는 어떤 스펙 같은 것이 돼 버렸다. ‘건강병원이나 헬스클럽에서 서비스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식틀 안에서는 ‘몸’이 자기 삶의 ‘현장’이라는 실감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실감이 사라질수록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간다. 실상 몸에 대한 우리의 이런 인식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가 않다. 몸과 정신(마음)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서양이론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서양도 몸과 정신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 동양철학에서는 이미 존재했던 인식틀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공동체 ‘감이당’(gamidang.com)을 이끌고 있는 고전평론가 고미숙(53)씨가 최근 펴낸 책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북드라망)은 ‘몸’에 대한 무관심과 터부가 갖가지 삶의 문제와 마음의 병을 낳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성형수술이 졸업이나 입학 선물이 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성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용인되는 사회 풍토에 대해 그는 “성형이 결국 마음의 소통을 없애고 고립의 길로, 지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유는 뭘까. 고씨를 서울 남산자락 필동에 위치한 감이당에서 만났다. 그의 관심사는 요즘 ‘동의보감’의 가장 큰 키워드인 ‘통즉불통(通則不痛·통하면 아프지 않다)’에 꽂혀 있다.

고미숙씨가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에서 한가로이 사유에 잠겨 있다. 그는 “인문학은 존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이라며 “운명을 바꾸려면 자신의 잉여물을 버리라는 사주명리학의 가르침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전신성형을 한 이들이 종종 TV 프로그램에 나와 말한다. 못생겨서 무시당했다고, 그래서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신을 무시한 건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이미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데 남들이야 당연한 것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 가족·친지의 이목구비도 잘 모른다. 이목구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목구비가 만들어 내는 표정과 생기를 보기 때문이다. 표정과 생기는 포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진정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기운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활발하면서도 여유있게. 그래서 성형은 미친 짓이다. 보톡스만 맞아도 표정이 사라지는데 전신을 다 헤집어 놓으면 대체 무엇으로 소통을 한단 말인가.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교감은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인정의 욕망은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성형천국, 마음지옥이다.”

사실 자신감은 조건없이 긍정하는 것이자 나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이와 달리 우월감은 남과 비교함의 산물이다. 그가 허준의 ‘동의보감’뿐 아니라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명희의 ‘임꺽정’ 등 고전을 통해 한결같이 탐구한 것은 우리의 삶이다. ‘자유’와 ‘행복’이라는, 어찌 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고, 또 누려야 하는 삶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동의보감’적 양생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삶의 비전’을 본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단지 병에 걸리지 않고 각종 수치가 정상이면 건강한 것인가? 어떤 삶을 살든간에?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그리고 이 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다. 존재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삶의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요컨대 건강이란 근원적으로 몸과 외부 사이의 활발한 소통을 의미한다.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그래서 몸의 탐구는 당연히 이웃과 사회, 혹은 자연과 우주의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여, 의학과 역학은 하나다. 그래서 의역학이다. 의역학이 21세기적 비전과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한의학 자체가 역학이라고 말한다. 한의학의 원리가 몸안에 역학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몸을 통해 우주를 보고, 우주의 흐름을 알아야 몸을 알 수 있다. 몸은 우주 기운에 감응하고 별자리 흐름과도 연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은 별개가 아니다. 몸의 병에 집중한 것이 ‘동의보감’이라면 몸의 리듬 같은 운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사주명리학이다.

“‘동의보감’ 잡병편을 공부하다가 사주명리학과 만나게 됐다. 잡병편은 ‘오운육기(五運六氣·하늘은 다섯 가지 기운으로, 땅은 여섯 가지 기운으로 돌아간다)’로 시작한다. 그걸 따라가려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육십갑자를 사람의 인생에 적용하면 사주명리학이 된다. 물론 육십갑자의 이치를 통달하려면 아주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다 깨달은 후 ‘삶의 기술’로 쓰는 건 아니다. 한글의 원리를 다 터득한 다음 한글을 쓰는 게 아니고, 디지털의 오묘한 이치를 깨친 다음에야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앎의 향유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이다. 음양오행론 혹은 사주명리학은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습속이 있다.”

그는 ‘동의보감’과 ‘열하일기’를 연계시키기도 한다. “연암의 이용후생은 정덕(正德)으로 귀환한다. 정덕이란 말 그대로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용후생이 문명적 진보를 뜻한다면, 정덕은 존재의 자기구현과 우주적 소통을 의미한다. 삶이란 어떤 경로를 거치든 반드시 이 무형의 가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유와 행복이 없다면 문명과 제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물질적 풍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의 트리아드! 이것이 곧 ‘삶의 비전’이다. ‘동의보감’ 식으로 말하면 양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생은 생명의 정·기·신(精氣神)을 자양하는 수련법이다. 다름아닌 유불도(儒佛道)의 수련법이다. 사회적 윤리를 닦는 수양과 원초적 불안(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수행, 그리고 몸을 수련하는 것이다. 양생을 위해선 수양·수행·수련이라는 ‘세 바퀴’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좋은 삶’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다.”

그는 심지어 소설 ‘임꺽정’에서도 ‘몸’ 코드로 산 등장인물들에게서 유불도의 사상사 지도를 읽어내고 있다. 대표적 인물로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를 꼽는다.

“지식인공동체 내에서도 외모·학벌·나이·교양·스펙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루 일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성(컨디션)이다. 몸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에게 인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알고 세계를 알면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지고 그 자유의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존재의 충만감을 느낀다. 그것이 행복의 실제 내용이다. 인문학은 바로 이 자유와 행복을 위한 앎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20세기 이래 인문학은 늘 위기였다. 사람들의 욕망은 언제나 기술과 자본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그 결과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빈곤이라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 계속 부와 기술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씨는 10여 년 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를 이끌었다. 3년 전부터 시선의 축을 동양적 사상으로 옮겨가면서 수유너머를 떠나 지금은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운 심리학 박사  (0) 2014.01.05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시니어 프랜너 조현미소장과 함께  (0) 2013.06.15
앤서니 라빈스  (0) 2013.06.07
조니타다/구족화가  (0) 2013.05.17

 

 

시니어 문제를 다년간 연구하고 교육하신 조현미 소장과 함께

DS 평생교육원에서는 시니어 플랜너 1기과정을 수료하였다.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가와 달마대사  (0) 2013.07.05
고미숙  (0) 2013.07.05
앤서니 라빈스  (0) 2013.06.07
조니타다/구족화가  (0) 2013.05.17
널 행복하게 하는 일을 좇아가라" - 바버라 월터스나를 구한 한 마디  (0) 2013.04.01

 

마비된 팔다리만 바라보자 인생도 마비됐지만

무한한 내면의 잠재력을 바라보기로 하자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마비된 팔 다리만 바라볼 것인가?

-불행은 막 꽃을 피기 시작한 17살 여고생

-언니와 강가에서 수영중 다이빙을 하겠다고 뛰어내렸다 불행히도 바위에 머리 부딪쳐 졸지에 사지마비환자 됨

-목 아래 모든 감각을 상실

-대학가려던 꿈은 산산조각, 모든 걸 남의 손에 메달려야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세수, 머리, 밥, 이 닦고 모든 사소한 것을

-어쩌다 휠체어 외출, 굴러 떨어질 만한 곳을 찾음, 허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함

-지도교사가 붓을 입에 물려주며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을 때

-모든 걸 철저하게 불행의 눈으로...완전히 마비돼 흐느적 거리는 팔다리만 보고 살았다

-내면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불행, 저주, 죽음만을 꿈꾸며 삶

-어느날 호흡기 입조차 못움직이는 남자, 경건한 자세로 알파벳 세 글자를 천천히

평화, 감사에 가득찬 얼굴 -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 자신은 마비 육체만 보며 사는데

-그 남자의 얼굴엔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찬란한 내면의 빛이 발산 -그제야 자신을 남의 눈으로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watching)

" 그 순간까지만 해도 저는 남들과 비교해 못 가진 것만 바라보며 살아왔었어요. 혼자서 못 일어나고, 먹고, 이 닦고 .. 그런 피상적인 것들만 바라봤죠. 그러다 팔다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제 내면에 감춰진 것들을 하나둘 꺼내 나가기 시작했죠“

팔다리는 인생의 수천가지 면들 가운데 불과 한두 면에 불과했다. 한 두 면에만 집착해 수천 가지 면들을 외면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날 팔다리 이상의 존재’로 바라보자 숨어있던 능력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붓을 입에 물고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는 평균 6~8개월이 걸린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하다. 내면의 무한한 가능성을 뽑아내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제 한계는 없다는 것 느껴요. 팔다리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만,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없으니까요”

 

 

 

 

널 행복하게 하는 일을 좇아가라" - 바버라 월터스나를 구한 한 마디

 

 

 


“널 행복하게 하는 일을 쫓아가라.”- Barbara Walters (바버라 월터스)

“텔레비전에 출연하기에 당신 외모는 너무 평범해요. 거기다 R 발음도 잘 못하네요. 카메라 앞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바버라가 처음 방송 일을 시작했을 무렵, 한 유명 PD가 그녀에게 한 충고다. ‘인터뷰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국 ABC 방송국의 간판 앵커 바버라 월터스 말이다.

여고 시절 내성적이고 평범했던 바버라는 역시 평범한 여자대학에 입학했다. 본래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나온 명문 웨슬리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그만한 성적이 안 돼 떨어졌다. 대학 4년 내내 몰두한 것은 ‘연극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쇼 비즈니스 사업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시절, 단핵세포증가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 결석을 자주하는 바람에, 자퇴와 재입학을 반복했고 점차 꿈도 멀어져갔다.

결국 졸업 후 그녀는 되는 대로 어떤 일이든 해보기로 했다. 광고회사, 방송국 홍보실을 거쳐 지역방송국의 PD, 방송 작가 등 그녀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맡은 방송 프로그램이 자주 폐지되어 실직과 이직을 반복하는 고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기회는 뜻밖에 찾아왔다. 바버라가 아침 방송 <투데이 쇼>의 작가를 하고 있을 때, 여성 보조앵커가 전날 과음을 해서 방송을 펑크 낸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작가인 바버라가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데뷔는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바버라는 몇 주에 한 번씩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성실한 여성 보조앵커가 해고되고 난 후에도, 진행자가 계속 문제였다. 후임으로 온 유명 여배우도 진행이 엉망이었고, 다른 진행자를 구하려 해봐도 섭외가 쉽지 않았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하는 힘든 자리였기 때문이다. 결국 바버라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1964년 10월, 마침내 바버라는 고정 앵커가 되었다. 얼마 안 가 유명인사들의 인터뷰를 하고 패션쇼를 소개하는 등 여성 관련 특집을 도맡아 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76년 NBC에서 ABC로 스카우트되면서 당시 최고액인 백만 달러의 연봉을 제의받았다. 당시 언론계에서 최고 연봉이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당시 방송계 편견의 벽을 넘어 바버라가 미국 최초의 뉴스앵커, 토크쇼 진행자가 된 것은 상황을 탓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20대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공으로 가는 비밀 열쇠는 바로 널 행복하게 하는 일을 좇아가라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널 성공할 수 있어.“

- <인생의 낯선 길을 헤매고 있는 너에게> 중에서

'♠ Human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앤서니 라빈스  (0) 2013.06.07
조니타다/구족화가  (0) 2013.05.17
코코샤넬  (0) 2013.04.01
김미경  (0) 2013.03.18
김병완  (0) 2013.03.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