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리스크 큰 CT<컬처 테크놀로지>산업… 내 성공 비결은 매뉴얼, 인내 그리고 꿈"
5만5000명의 청중이 야광봉을 흔들며 파도처럼 물결 치고 있었다. 5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을 거의 모든 청중이 내내 서서 지켜봤다.
소녀시대며
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고, 따라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회장이 말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 ·가상국가)'이란 말이 실감 났다.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일본인이기도 하거니와 '
SM엔터테인먼트'라는 가상국가의 국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1만2800엔,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이다. 그런데 맨 앞자리이든 3층 맨 뒷자리이든 객석 어느 자리나 티켓 값이 똑같다. 이수만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는 오직 '충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인터넷 예매 때 1초라도 빠르면 앞자리에 앉고, 5분이 늦으면 맨 뒷자리에 앉는 식이다.
원래는 4월에 갖기로 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3·11 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공연이 무기 연기됐다. SM측은 티켓값을 환불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팬들이 결사 반대했다. "로또 당첨되듯 표를 구했는데, 왜 뺏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불해 주지 않고 돈을 고스란히 5개월을 갖고 있다가 공연했다.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영 석학 장 클로드 라레슈 교수가 "제품을 고객에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팔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라. 스스로 물살을 만들어 올라타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게 딱 떨어지는 예일 것이다.
기자는 이수만이 부른 ‘행복’이며 ‘모든 것 끝난 뒤’와 같은 노래를 듣고, 그가 진행하는 TV쇼를 보며 자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만난 그의 나이가 만으로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었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지난해 그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강연 제목이 ‘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Don’t try to cut your ears)’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반 고흐 같은 천재가 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천재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천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어요. 반 고흐의 천재성은 남들이 못 갖고 있는 오감(五感)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는 음악을 들어도 그림이 보이고, 음식을 먹어도 그림이 보였을 겁니다. 이수만이란 사람은 반대로 그림을 보면 음악으로 들리겠죠. 어느 날 고흐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막 녹아내리는 겁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보이는 거죠.”
―감각이 통합되는 경험 말씀이군요.
“예. 사실 그런 경험은 천재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흐도 그런 느낌을 처음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게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귀를 잘라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안 돼 있어서 생긴 비극인 셈입니다.”
그는 주먹구구식이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흐처럼 천재의 싹을 가진 연습생을 뽑아 13년 동안 장기 육성해 아이돌 스타로 길러냈다.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시스템화가 필요하지만 13년에 이르는 장기계약은 ‘노예계약’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 끝에 계약 기간을 한국에만 있을 경우 7년, 해외에 나갈 경우 10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13년이란 시간은 연습생에게는 물론, 경영자에게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기간 동안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는 약속이니까.
-
- ▲ 가수이자 TV쇼 진행자였던 이수만.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SM을 통해 수많은 아이돌을 길러낸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수만 회장은 K-팝이 전 세계를 휩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장기 계약에 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꼽았다.
“우리 같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미국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장기 계약해서 오랫동안 트레이닝하는 일이
미국에선 못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에이전시 제도라고 해서 가수나 연예인이 스스로 커지면 에이전시 회사에 일을 하도급을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에이전시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유망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뒤늦게 문화산업이 발달한 한국이나 일본은 자유 계약이 가능했고, 그래서 장기 투자를 하게 된 겁니다.”
―CT(컬처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만드셨는데, CT 산업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은 뭡니까?
“IT 산업을 흔히 고위험-고수익 산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CT 산업은 한술 더 떠 초고위험-초고수익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공의 예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뛰어난 도자기공이 독보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기술은 그의 감각과 손끝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 배워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기술을 잘 성문화(成文化)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리고 이것을 잘 전수해서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하나의 산업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SM은 이걸 하자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 또 우리 직원 누군가가 갖고 있는 기술, 이런 것들을 성문화하고, 교육을 통해 전수하자. 그래야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문화산업 특유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시키는 매뉴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충고는 비단 엔터테인먼트산업뿐만 아니라 ‘초불확실 환경’에 직면한 모든 기업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충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영자라면 감성 지향의 우뇌형 경영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쉬운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다분히 좌뇌적이었다.
그는 “이수만이 없으면 SM이 끝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래서 이수만을 대신할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내에 춤과 노래, 믹싱 등 각 분야 전문가 6명으로 만든 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플러스 알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수만의 머리를 카피한 것 이상이 나올 것이고 SM은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만 경영의 요체는 ‘인내’이수만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그의 성공 비결을 “최고를 위한 인내의 경영”이라고 표현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가수를 고르고, 좋은 스태프를 고르고, 좋은 음악을 고른다. 그런데 그 선택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이수만 회장이다. 선택을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를 검토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포기한다.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en cost)’이 발생하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정쩡한 제품에 목을 매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최고가 될 때까지 투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
- ▲ 이수만 회장이 키워낸 대표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는 요즘 새로운 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콘셉트의 팀 두 팀을 구성해서 한 팀은 한국에서, 다른 한 팀은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곡을 부르게 된다. 가칭 M1과 M2이다. 두 팀의 타이틀곡 하나를 쓰기 위해 SM은 지난 8월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뮤직캠프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 작곡가 50여명이 모여서 3~6일간 SM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곡을 쓰는 행사이다. SM측이 M1과 M2를 보여주고, 원하는 콘셉트를 이야기하고, 리듬을 들려주면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곡을 창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두 차례나 했는데도 아직 M1과 M2의 타이틀곡을 못 골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비를 다 날린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트레이닝, 둘째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 셋째 곡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새 팀 하나 론칭하는데 보통 4년이 걸립니다. 동방신기 곡 하나 쓰는데 50명이 모여서 썼고, 맨 처음 데뷔하는 데 40억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음반을 내는 프로모션비가 또 40억원씩 들어갑니다.”
그는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팀에서 최고를 한 사람씩 뽑아서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팀을 구성했고, 그것이 동방신기였다. “여기에 선발되지 않은 팀은 모두 와해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팀 중에서 음악도 잘하고 버라이어티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키운 게 슈퍼쥬니어였어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저희도 미안해서 도와주게 됐지요.”
그 슈퍼쥬니어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 슈퍼주니어는 유럽,
태국, 남미에서 최정상의 가수이다.
◇동양의 할리우드를 한국이 만든다―미국 LA에 이어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 진출한다기보다 SM타운이란 가상 국가의 동포들이 거기에도 있으니 위문공연차 가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미국보다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머지않아 동양에 할리우드가 생기면서 문화의 중심이 갑자기 이리로 대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미국에서는 동양 노래를 잘 모른다고요? 전혀 상관없어요. 중심은 아시아가 될 거니까요.”
그는 “아시아에 제2의 할리우드가 생긴다면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업고 가는 전략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프로듀싱은 우리가 하고, 마케팅은 일본이 하고, 가수나 탤런트, 감독은 중국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해서 그 큰 시장의 3분의 1만 우리가 가져와도 우리 국민이 4500만명밖에 되지 않으니 1인당으로 따지면 우리가 가장 수혜를 보지 않을까요?”
그는 늘 꿈을 꾼다. 그가 새로 꾸는 꿈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뮤지컬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팀을 선발해 공연하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이 클래식과 팝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가 화합해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내용이란다. 그동안 나온 SM엔터테인먼트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섞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쓰던 중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이던 테디 라일리가 소녀시대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썼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수만 회장은 “SM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를 배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