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강희제 康熙帝  (재위1661~1722년)

순치제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나 8세때 황제로 즉위해 61년의 재위기간으로 역대 중국황제중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황태자의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때 황제로써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닫고 학문엘 열중하며 지식을 쌓아나갔다.  


8세의 어린 황제앞에는 청나라의 1대, 2대 황제때부터 온갖 전쟁에서 용맹함을 보여 "만주 제일의 용사" 라는 평가를 받던 오배가 있었다.  오배는 청나라의 병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어 그는 거칠것이 없었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았고 심지어 어린 강희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구는등 방자한 행동을 계속하였지만 아무런 힘이없었던 어린 황제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씨름 구경을 하며 즐거워 하는척 하면서 명망 높은 학자들을 불러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았다.  오만방자하던 4명의 대신 중 한명이 사망하자 오배는 자신의 정적에게 24가지의 누명을 덮어 씌워 제거한 후 모든 권력을 손게 쥐게 되었다.  어느날 오배의 병문안에서 오배의 몸에서 단검을 발견하자  강희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만주족은 본래 몸을 지키기 위해 단도를 가지고 있는것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지." 말을 했지만 언젠가는 그 단도로 황제를 시해할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없애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善營이라는 특별군을 조직하고 관람했다.  실상은 오배를 속이며 황제의 친위대를 조직한 것이다.  강희제가 16살이 되던 해 오배가 홀로 궁정에 오자 사로잡고 그에게 30가지 씌어 처형을 하려했지만 오배가 죽기 직전에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따라 싸우면서 생긴 수많은 상처들을 보여주며 애원해 형량을 낮추었다. 


오배를 없앤 후 실권을 잡게 된 황제에게는 삼번(三藩)이라는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  강남 일대로 파견한 세명의 번(藩)왕들이 비옥한 강남 일대에서 세금, 군사, 관리의 임명등 모두 자신들의 맘대로 처리하며 각자의 지역에서 황제와 같이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신이 국사의 전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들의 세력은 큰 문제가 되어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 때를 기다릴 줄 알던 황제는 기회가 왔을때 놓치지 않고 번을 해체해버렸다.  신하들은 번을 폐지하면 틀림없이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번을 폐지해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고 폐지하지 않아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니 차라리 선수를 치는것이 낫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9년간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명나라의 장군으로 명을 배반하고 청나라를 도왔던 '오삼계'는 3명의 번왕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삼번의 난'이 일어나 반년이 채 되지 않아 강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을 손에 쥐에 되었다.  반란군들의 엄청난 기세에 몽골의 칸들이 강희제를 지원하겠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상황을 길게보고 끈질기게 대처했고 반란군인 오삼계는 지나치게 신중해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공격하지 않고 어물거렸다.  오삼계의 반란군은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 만주족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한족의 명나라를 수복하자'는 명목이었지만 오삼계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빌붙은 인물이라 한족들이 큰 호응을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한족 출신의 명장들을 대거 등용해 반란군에게 역습을 하게되고 반란군의 장군들 중 자결하는 자도 있고 투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와중 반란군의 총대장인 오삼계는 노환으로 사망하자 9난간의 '삼번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그 당시 대만등은 청나라가 아닌 독립 지역으로 '삼번의 난'에 가담하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였다.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 한 후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대만의 전설적인 인물인 '장성공'은 무역을 하던 명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일본인의 어머니와 사이에서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명나라로 유학을 온 인물로 일곱살에 명나라로 유학을 할때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을 소탕하는등 큰 공을 세워 명나라 조정의 벼슬을 받았다.  명나라의 장수인 '오삼계(삼번의 난을 일으킨 인물)'가 변심해 청나라에 투항 한 후 명나라를 쳐 자신이 몸담았던 한족의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을때 그는 명나라의 황손인 주율건이라는 인물을 융무제로 세워 남명(南明)왕조를 건국해 명나라에 대항했다.  남명의 황제는 정성공을 높이 여기어 그에게 명나라 황제의 성인 주씨 성을 하사했으나 곧 남명의 황제인 융무제는 청군에 잡혀 굶어 죽게 되었고 정성공의 일본인 어머니가 죽게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나라와 전쟁을 하게된다.  정성공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청나라는 그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정성공은 전혀 듣지 않자 분노한 청나라는 아버지 정지룡을 잡아 천천히 살을 떠서 죽였다.  명나라를 침공했지만 태풍등으로 계속 좌절하자  정성공은 장기 전투를 생각해 청나라가 쉽게 공격하기 힘든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성공이 대만에 도착했을때 대만은 네덜란드인들의 동인도 회사가 대만을 점령하고 있을때 정성공은 2만의 군대로 10개월동안 네덜란드인들을 압박해 네덜란드들로부터 통치권을 전부 넘겨준다는 문서받고 대만의 왕으로 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오래 전부터 골치덩어리인 대만을 청나라로 흡수할 려고 했지만 네덜란드로부터 배운 서양문물로 만든 배들이 몹시 빨라 바다에선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무역으로 먹고 살던 대만인들에게는 청나라의 오랜 침공으로 무역을 하고 대만인들의 삶은 점점 힘들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청나라는 침략보다는 많은 뇌물을 동원해 정씨 집안에서의 분란을 유도하기 사작했고 대만의 왕족들은 후계자 쟁탈전을 벌여 대만인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후계자 쟁탈전으로 12세의 어린 '정극상'을 대만의 왕의 자리에 올린' 풍석범'이란 사람이 전권을 손에 쥐고 전횡을 휘둘러 대만인들 사이에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만군은 패배하고 청나라에 귀속되었다.  


대만을 점령한 강희제는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들은 칭송할만 하다" 며 대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희제의 성군정치를 펴 내,외부의 적을 없앴지만 북쪽의 러시아는 강희제의 아버지인 순치제때부터 많은 전쟁이 극심했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파견되어 러시아군을 물리친 '나선 정벌'이 이 시기의 전쟁 중 하나이다.   국경에서 러시아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등 계속 세력을 넒히려 해 분노한 강희제는 강경책으로  러시아의 요새 아르바진을 점령합니다. 그 후 청군과 러시아군은 몇차례 더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다 협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양국간에 조약을 맺게 되었다. 


1. 헤이룽강의 아르군·케르비치 두 강과 외싱안링 산맥(外興安嶺)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정하고 알바진 성은 파괴할 것

2. 흑룡강에 접하는 아르군강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 북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다.

3. 월경자의 인도와 처벌

4. 양국 민간인 사이의 교역의 자유 등을 규정하다

5. 과거의 갈등은 일체 불문에 부친다. 각자의 나라에서 정당한 업무활동을 하는 양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6.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며, 앞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조약이 의미의 가장 큰 의미는 이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나라와 외교할때의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천자(황제)의 것이다”  라며 신하의 나라, 형의 나라였지만  이 조약문으로 두나라가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다것이다.  그전까지는 로마 교황이건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건 그저 신하로 세계사에 안하무인이었지만 이 조약 하나로 새로운 청나라로 세계속에 발을 디딘것이다.  


강희제가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청의 태조 누르하치가 설립한 팔기군 제도를 강화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단속했으며 능력이 있으면 한족 출신의 장군들도 높이 등용했고 과거 적이었던 인물들도 포용하여 지휘관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학문을 사랑했고 호신술로 무예를 열심히 익혔으며 서양에서 온 여러 책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라틴어를 배웠고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화살의 명수로 사냥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만주족 전통의 기마술이나 무예도 부지런히 익혀 문무를 겸비했다.  또한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는 역대 황제와는 달리 폭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분별있게 먹으며 나이가 들서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학문을 사랑하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끝이 없었다.  서양의 여러 학문을 배웠으며 그들의 지리와 역사, 수학등을 배웠고 서양의 우수한것을 인정하고 배워나갔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지 않았고 배울 생각도 없었으나 가톨릭의 포교와 종교의 자유를 허가했다.  그가 무엇을 질문하면 신하들은 쩔쩔맬 정도로 엄청난 학문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옆에서 지켜본 서양인 선교사이 귀국해 중국 학회를 세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는 유교를 숭배했지만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카톨릭을 믿지도 않았지만 카톨릭의 선교활동을 금하지도 않았다.  현대 중국어의 어법을 확립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완성해 현대 중국어의 기틀을 잡았던 그의 68번째 생일 날에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서양 선교사들 등 수많은 인종들이 차별없이 참가했으며 각기 3000여명의 다른 민족들이 모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라며 명나라말기 무려 10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고작 400명로 줄여 국고의 낭비를 줄였으며 옷이 찢어지지 않는한 최대한 꾸메어 입기조차 했다. 그는 강남을 자주 순회하며 백성들의 삶이 풍성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황제였다.  평생동안 하루에 300~400통이 넘는 보고서를 모두 보고 답변까지 달아주며 그 모든것을 처리한 후 잠이 들었다.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이지만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어소박하기 그지없어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이었다.  한족 출신이 아닌 만주족 출신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에도 불구하고 한족에게조차 존경을 받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황제 강희제는 35명의 아들과 20명을 딸을 두었다.  


그의 61년 재위기간은 중국의 역대 황제중 가장 긴 재위기간이었지만 청나라를 황금의 시대로 이끈 성군으로 그는 평생의 좌우명을 삼국시대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보고 제갈량이 남긴 말중에 鞠躬盡瘁 鞠躬盡瘁(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로 삼아 평생 이뜻을 가슴에 새겨 모범으로 삼고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신하들에 '제갈량의 말은 신하가 군주를 모시는 태도에 관한 말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따르시겠습니까?'  라는 신하들에게  '나는 하늘을 섬기는 신하이외다.'   청나라에 이런 황제가 있었다는게 청나라의 축복이었다. 

하를 경영한 조조와 강희제의 인재등용 철학은 대조를 이룬다. 위나라를 세운 조조는 재능을 늘 첫 손가락에 꼽았다. 반면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청나라 강희제는 덕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두사람은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인재를 중시한 대표적인 지도자에 속하지만 용인술은 이와같이 대척점에 서 있었다. 이 때문에 재능이 먼저냐 덕이 먼저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조조는 능력만 있으면 남에게 욕을 먹거나 말거나 주저없이 발탁했다. 그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비록 형수와 간통한 인간이라도 뇌물을 받아 먹은 전과가 있는 인간이라도 재능만 있으면 쓴다." 인재를 널리 구하는 구현령을 발표했을 때도 그의 철두철미한 능력 우선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가 아니면 안된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언제 현인을 찾을 것인가?"란 구절이 단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재능만으로 인재를 발탁한다는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원칙을 어김없이 실행했던 조조는 "덕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기용했다고 해서 꼭 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되묻는다.

 

 

          (조조의 인물상)

조조와 달리 강희제의 인재등용 기준은 덕재겸비(德才兼備)였지만, 덕을 늘 우위에 두었다. <강희정요(康熙政要)>에 그의 인재관이 잘 녹아있다.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덕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짐은 사람을 볼 때 반드시 심보를 본 다음 학식을 본다. 심보가 선량하지 않으면 학식과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재능이 덕을 능가하는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재관은 그런 점에서 조조와 빼어 닮았다. 이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능력이 있으면 도덕성에 좀 흠이 있더라도 괜찮다." 인사철학을 밝혀왔다. 이대통령 스스로 그런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유권자들도 위장전입, 자녀위장취업, BBK문제같은 이대통령의 도덕성 논란에는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조각 때부터 의혹많은 재산형성이나 도덕성 문제를 치지도외(置之度外) 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검증 시스템의 문제'라는 진단이 있었지만 인사철학이 더 큰 난점이었다. 이대통령의 인사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

 

역대 중국 용인사(用人史)에는 또 다른 양대 원칙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오직 능력과 인품만을 보고 사람을 기용한다는 '임인유현(任人唯賢)과 능력과는 관계없이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인용한다는 임인유친(任仁唯親)의 원칙이 그것이다.

 

 

 

이점에서도 이대통령은 대부분 자신과 가깝고 아는 사람을 등용하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아는 사람만 찾다보니 편벽한 돌려막기 인사가 불가피하다. 오죽하면 낯가림 증세싸까지 있는게 아니냐는 염려가 나온 것도 이때문이다. 인재 풀이 좁기 그지없는 까닭이다.  

 

이대통령의 인사는 중국역사의 거울에서 비춰보면 흠집이 있어도 능력만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도 아는 사람만 쓰겠다는 고집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른바 '고소영 내각'에서부터 지금까지 국민의 객관적 평가가 어떤지는 물어보나마나다.  

 

4월27일 재보선선거가 끝나면 곧 개각과 청와대 개편을 단행할 것이란 설이 벌써부터 파다하다. 초대 대통령실장이자 최측근 가운데 한사람인 류우익 주중대사를 지난주에

교체한 것도 그를 통일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 등으로 기용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른 자리에 거론되는 인사들도 대부분 현정부에서 요직을 지내 이대통령에게 '낯익은' 사람들이다. 

 

하마평대로라면 또다시 돌려막기 인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게 틀림없다. 이명박정부의 실패는 인사의 실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2년이 채 남지않은 

임기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진부하지만 값진 격언은 이대통령의 인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청나라 관리 심문규는 이렇게 충언했다. "하늘은 한세대에 충분히 쓰고도 남을 인재를 내려 줍니다." 

 

(*출처 : 김학순의 서재에서 인용)

출처 : technic
글쓴이 : 테크 원글보기
메모 :

 

 인문학이란?

 

예부터 文,史,哲이라 했다. 문장과역사와 철학이다.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니다. 문장은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더불어 역사는 포폄(褒砭,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다.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단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삶의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가는 살아있는 운동이다.

이것이 문.사.철이 바로 인문학의 본령이다.

 

문,사,철은 세간에서 흔히 오해하듯이 결코 박제화된 관념의 관념의 집합이 아니다.그것은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폎쳐지는 거대한 魂의 운동이다.

인문학은 살아 있다. 삶의 끈끈하고 처절한 몸부림과 절규가 녹아난것이 인문학의 진짜모습이다.

진정한 인문학은 '훈고학'으로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활설화된' 변화의 학'이며 지속하는 '삶의 고투에서'에서 응어리져 빚어진 빛나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문학은 살아 있다.숨을 쉰다.거기에는 인간의 감각적 돌기들, 그리고 꿈이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욕망, 감각, 꿈이야말로 인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사실 어떤 통찰도 인간의 욕망,인간의 감각,그리고 인간이 주체할 수 없는 꿈을 아우르고 꿰차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 인문학의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정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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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폴라 크리머 F-16 전투기 탑승

 

LPGA 홈페이지 캡처

지난 7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오크먼트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폴라 크리머(Creamer)가 전투기에 탑승했다. 크리머는 지난 9월9일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 곡예비행팀 ‘썬더버드’의 F-16 전투기를 타고 비행했다. 크리머가 탑승한 전투기의 조종은 여성 최초로 썬더버드 조종사가 된 크리스틴 허바드(Hubbard) 대위가 맡았다. 아버지가 해군과 민항사에서 조종사로 근무했던 크리머는 “전투기를 타고 비행할 때의 짜릿한 스릴을 느껴보고 싶다”며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종사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LPGA 홈페이지 캡처
LPGA 홈페이지 캡처
출처 : 알럽 페낭
글쓴이 : Jenny 원글보기
메모 :

남의 험담을 하지마라
남을 헐뜯는 소문을 내는 건 살인보다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중상모략은 퍼뜨리는 사람,
듣는 사람, 그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해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죄가 무겁다.
나쁜 소문은 멀리서도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
촌철활인: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그것이 좋지 않다는 교육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한 험담의 유혹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성공의 비결은 남의 험담을 결코 하지 않고 장점을 들춰내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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