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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1일자 <경향신문> 보도 |
[1] 국내 언론이 ‘영원한 김대중의 비서’, ‘절대적 DJ맨’으로 평가해온 朴智元(박지원, 지역구: 전남 목포시) 민통당 원내대표는 원래 美國 영주권자였다. 전남 진도 태생의 朴씨는 목포 문태고와 광주교대를 거쳐 1969년 단국대 상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초 渡美(도미)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을 거쳐 1975년 가발 및 잡화를 수입-도매하는 ‘데일리패숀즈(주)’를 설립해 대표이사가 됐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朴씨는 이후 ‘뉴욕한인회’(1980년) 회장 겸 ‘미주지역한인회총연합회’(1981년) 회장까지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형적인 親美인사였다.
朴씨는 ‘뉴욕한인회’ 회장 활동 시기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국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교포로서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승공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1980년 8월28일자 <경향신문>)
이듬해인 1981년 1월 전두환 前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자 미국 교포를 대표해 朴씨를 중심으로 여러 교포단체들이 참여하는 환영준비위를 구성하기도 했다. 당시 이들은 케네디 공항과 대통령의 숙소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부근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환영행사를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980년 1월27일자 <동아일보> 보도인용)
그는 1983년 6월1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미주지역 해외평통자문위원들의 활동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북한의 분열책동을 봉쇄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고려연방제’의 허구성을 폭로, 우리의 평화통일의지를 교포사회와 미국인들에게 정확하게 심어주는 데 1차적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중략) 한때 미국교포사회에서는 우리의 통일노력에 관해 회의를 느낀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이후 획기적인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 제시돼 통일에 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중략) 아직도 일부 교포 가운데는 주한미군 철수 등 적화 야욕이 숨겨진 전제조건이 붙은 ‘고려연방제’를 아무런 조건이 없는 연방제안으로 착각하고 있는 인사가 없지 않다.”
당시 朴씨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평통자문회의에 참석차 일시 귀국하여 지난 이틀 동안 통일문제연수에 참석했던 박 회장은 1일 새벽 “연수과정을 통해 모국의 밝은 경제 사정과 통일정책, 정부의 시책 방향 등을 듣고 한결 가슴이 뿌듯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리고 “모국을 방문하는 다른 재외 국민들에게도 같은 연수를 실시한다면 조국애를 더욱 북돋워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단국대를 졸업한 후 71년 미국에 건너가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박 회장은 현재 뉴욕근교 뉴저지에서 부인 李善子(이선자)여사(40)와 단둘이 살고 있다.》
朴씨는 또 1985년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같은 해 4월 미국을 방문한다는 보도가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다음과 같이 대통령의 訪美를 환영하는 멘트를 남겼다.
《박지원 뉴욕평통자문위원회 회장 등 재미교포들은 전 대통령의 방미를 크게 환영하고 한미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특히 무역분야의 장벽이 잘 해소되어 서로 공동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1985년 2월4일자 <매일경제>)》
金大中과의 만남 이후 인생 180도 역전
[2] 朴씨가 김대중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DJ의 미국 망명 시기인 1983년 가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 등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한국일보> 등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87년 김대중이 赦免復權(사면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하자 미국 영주권을 정리한 뒤 귀국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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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홈페이지 캡쳐 |
말하자면 그는 해외로 이민을 갔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逆(역)이민자’인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2004년 4월28일자 ‘피고인 박지원의 의안과 눈물’에서 “역이민자 가운데는 고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어 재미동포 사회에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라며 김경재·박원홍·유재권 前 의원 등과 함께 朴씨를 꼽기도 했었다.
그는 1987년 평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1989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1991년 민주당 국제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4·18·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朴씨는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청와대 대변인, 공보수석비서관, 문화부 장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권력형 非理 사건들
그가 관련된 비리 사건들은 많다.
▲朴씨는 2002년 가을, 김대중-김정일 회담 직전에 있었던 4억5000만 달러 對北송금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단돈 1달러도 보낸 적이 없다”(2003년 6월25일자 인터넷 <동아일보> 보도)고 부인하였다가 不法송금 관련혐의가 사실로 드러나 법원으로부터 직권남용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천안함 爆沈(폭침)사건에 대해서는 “북한의 공격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과거에도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불바다 만든 적 없지 않느냐”고 했었다.
▲연평도 砲擊(포격)사건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가 3년간 햇볕정책을 반대하고 강경정책을 써서 이 꼴이 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3대 권력세습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그게 상식이다. 그것(후계)은 자기들 상식대로 하는 것이다. 영국 엘리자베스家에서도 아들로 태어나면 王子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2010년 10월19일 당시 민주당 원내대책회의에서는 中國의 習近平(습근평) 부주석이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왜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하는가”라며 한국 정부의 對北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中國의 공식부인과 대화기록 등을 통해 거짓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