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매일같이 당신도 무언가를 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잠자리에 든다면,
16시간의 이용 가능한 시간이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
만약 한 가지 방향과 일에 열중할 수 있다면 성공할 것이다.
다만 열중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토마스 에디슨
촌철활인: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 성공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자기 일에 몰두했고,
그 결과 특별한 명예와 부를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자주 사람들이 쓸모없어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자신의 전문직이나 소명을 무시한 채
여러 가지 대상이나 목적을 향해 관심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라는
나다니엘 애먼스의 글도 함께 보내드립니다.

“마치 스티브 잡스 보는 듯”…12세 IT 천재에 ‘열광’
"기술 면에서는 어쩌면 아이들이 선생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지도 모르죠."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하는 12세 소년의 당찬 프레젠테이션 영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해 12살인 토마스 수아레즈(Thomas Suarez)가 지난 달 22일(현지시간) '테드엑스(TEDx)' 강연 무대에 올랐다. '테드엑스'는 매년 미국에서 각 분야 명사들이 18분씩 릴레이 강연을 펼치는 지식 콘퍼런스 '테드(TED)'의 지역별 행사.

한 손에 아이패드를 들고 강연을 시작한 토마스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조리있는 말솜씨와 여유로운 태도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그는 약 4분30초 간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하게 된 과정과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앱을 소개했다.

토마스는 "스티브 잡스, 그리고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며 "결정적으로 애플이 SDK(소프트웨어 개발 키트)를 내놓으면서 앱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스스로 자바, C언어 등 개발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물론 토마스에게 앱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만들고 싶어하기도 한다"며 "축구를 배우고 싶으면 축구팀에 들어가면 되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으면 레슨을 들으면 된다. 하지만 앱을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토마스가 테스트 용으로 만들어 처음 선보인 앱은 '어스 포춘'(Earth Fortune). 지구의 색상 변화로 자신의 운세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앱이다. 토마스는 이 앱을 부모님으로부터 99달러를 지원받아 앱 스토어에 등록할 수 있었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다른 앱은 '버스틴 지버(Bustin Jieber)'로, 이름부터 10대 소녀들의 우상인 '저스틴 비버'를 비꼰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저스틴 비버의 얼굴을 때리면 멍이 드는 게임으로, 토마스는 학교에서 저스틴 비버를 좋아하지 않는 일부 친구들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최근 토마스는 '캐롯코프(CarrotCorp)'라는 앱 개발사를 직접 차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토마스는 "앞으로 더 많은 앱과 게임을 만들고 싶고, 안드로이드 프로그래밍과 개발 공부도 하고 싶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해 학교에서 앱 클럽(App Club)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토마스의 강연 영상은 지난 7일 유튜브에 공개된 후, 무려 13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토마스의 발표를 본 누리꾼들은 "매우 영특한 아이다" "고작 12살인 아이가 저렇게 프로페셔널하게 강의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열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다"라고 치켜 세웠다.

한편, 일부 누리꾼은 "그 나이에 큰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끔찍한 앱을 만들었다." "자신감 있는 태도는 놀라웠지만 그리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이혜미 기자 @blue_knights >
ham@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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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의 명언| 삶의 글 좋은 글
바다해 | 조회 655 |추천 0 | 2011.10.28. 15:22

 

 

▲ 스티브잡스 명언

 

 

 

▲ 스티브잡스 명언

 

◇ 일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일을 찾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 사랑하는 일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혁신&품질

   “혁신은 연구 개발 자금 규모와는 상관없습니다. 애플이 매킨토시를 출시했을 때 IBM은 연구

   개발에 애플보다 최소 100배 이상의 비용을 쏟았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혁신은 어떤

   인력, 어떤 방향, 어떤 결과가 얼마나 나오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혁신은 리더와 추종자를

   구분하는 잣대입니다.” “품질은 물량보다 더 중요합니다. 한 번의 홈런이 두 번의 2루타보다 낫습니다.”

 

 

◇ 디자인

   “디자인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낸 인간 창조물의 영혼입니다. 디자인은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디자인은 어떻게 가능하냐의 문제입니다.”

 

◇ 실패&자신감

   “가끔은 혁신을 추구하다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다른 혁신을

   추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이룬 것만큼, 이루지 못한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 인력

   “나머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를 갖고

   싶습니까?”. 잡스가 펩시콜라 사장을 영입할 당시 한 말.

 

 

◇ 한편, 잡스는 생전에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최고의 명연설로 꼽히는 지난 2005년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에서 잡스는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 만약 며칠 동안 그 답이 ‘NO’라고

   나온다면,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을 대신해 변화를 만듭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바로 ‘죽음’입니다”고 말했다.

 

 

 

▲ 스티브잡스 명언

 

이렇게 스티븐잡스는 우리에게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애플의 창업주이자 세계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였던 스티브잡스의 사망소식은

아직도 전 세계인을 안타깝게 만드네요 ㅜㅜ

 

 

 

 
 
진행바
■ 스티브 잡스 10계명

1. 완벽하게 업무를 챙겨라
2. 전문가를 최대한 활용하라
3. 냉혹하게 판단하라
4. 외부 소리만을 믿지 마라
5. 끊임없이 연구하라
6. 결론은 간결하게 정리하라
7. 비밀을 지켜라
8. 작은 팀 위주로 운영하라
9. 채찍보다 당근을 주어라
10. 견본품에 최선을 다해라

 

 
스티브 잡스가 남긴 삶과 리더십 명언들
2011.10.07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리고 실제로 바꿔낸 한 천재가 떠났다. 기자는 그를 만나본 적도, 통화한 적도, 심지어는 맥을 보유했던 적도 없다. 아이폰 3GS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애플 기기도 구입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을 인정했고 그를 떠나보낸 것에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애플 기기를 소유한 적이 없었던 이라고 할지라도 스티브 잡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순 없다. 그에 대한 헌정의 일환으로,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몇몇 교훈과 명언을 정리해본다.

 

다르게 사고하라(Think Different)
"네모난 구멍에 동그란 나사처럼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있다. 가끔은 미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분쟁만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규칙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곤 한다."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찬사를 보내거나 악평을 쏟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무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진보하는 원동력이 그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만큼 미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끔 몇몇은 실로 세상을 바꿔낸다."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실행한다. 그들에게 적합한 결정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위대한 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놓는다면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늘 갈망하라, 그리고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혁신은 얼마나 많은 R&D 예산을 가지고 있는지와 무관하다. 애플이 맥을 출시할 때, IBM은 R&D에 최소 100배는 많은 예산을 가지고 있었다. 예산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어떻게 이끄는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것이다."

 

앞에서 이끌어라(Lead from the Front)
"소비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개발 완료할 때쯤이면, 소비자들은 다른 것을 원할 것이다."

"대중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를 바보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소비자들에게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파악한다. 내 생각에 우리는 소비자들이 앞으로 무엇을 원할지 여부를 파악하기에 적합한 원칙을 훌륭히 세워왔다. 우리의 노력이 보상받는 방식이다."

 

완벽을 추구하라(Strive for Perfection)
"당신이 아름다운 장식장을 만드는 목수라고 하자. 보이지 않는 뒷면이라고 해서 베니어 합판을 쓸 것인가? 다른 사람은 보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안다. 백면에도 아름다운 재질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고품질을 전과정에 걸쳐 달성했을 때, 당신은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Love What You Do)
"삶 전체에 있어 일이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위대한 작업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위대한 작업을 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직 찾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계속 찾아라. 안주하면 안된다. 찾는 순간 가슴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라. 머무르지 말라."

스티브 잡스가 남긴 이러한 교훈을 일상과 업무에 접목시켜보는 것을 어떨까? 지지 않으려는 전략은 부작용을 낳는 초라한 전략일 뿐이다. 이기려고 해야 한다. 새로운 목표에 대한 설정을 멈춘다면, 정체와 내리막길이 남았을 뿐이다. 아직 오늘이라는 기회가 남았다. 당신의 유물은 무엇이 될 것인가

 

골프만 치지 말고 ‘골프 +α’로 즐기자 //

 

스크린 골프를 통해 골프가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골프는 여전히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더구나 골프를 배우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요즘 100타 언저리를 갓 벗어난 마음골프학교 학생들에게 '골프 플러스 알파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골프 플러스 알파 운동'이란 골프와 취미의 결합 혹은 골프와 자신의 전문성(직업)을 결합시켜 또 하나의 영역을 개척하자는 제안이다.

'골프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거기다 뭘 더 엮어?' 하고 말하는 이가 많겠지만 자식 '하나'가 더 기르기 어려운 법이다.

온갖 정성과 기대를 쏟으면서 골프 하나만을 바라보고 갈 세월이 너무 길다.

그 하나를 바라보고 가니까 골프도 자식도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된다.

잘 생각해 보면 이미 10여 년 동안 골프를 해온 사람이든, 이제 막 100타를 깬 사람이든 앞으로 골프를 해야 할 남은 세월이 10년은 족히 넘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1~2년의 노력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기는 어렵겠지만 10~20년 후를 바라보면서 '나만의 영역'을 개척해 간다면 오직 골프만을 배우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다.

골프와 사진의 결합도 좋고, 골프를 하면서 공이든 볼 마크든 수집을 하는 취미도 좋다.

꽃이든 나뭇잎이든 채집을 하는 것도 좋다.

골프와 글쓰기도 좋고, 골프와 그림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직업이 건축이라면 언젠가는 클럽 하우스나 그늘집을 멋지게 디자인하겠다는 꿈으로 자료를 모아가는 것도 좋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골프와 관련된 사업거리를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부들이 아파트 디자인에 아이디어를 내고, 가전제품의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의견을 묻는 시대다.

공도 잘 쳐야 하지만 스타일도 멋이 있어야 한다면서 라운드 전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의상 선택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이라면 골프 의류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공부도 하면서 골프 의류회사에 제안을 해 볼 수도 있다.

 마음골프학교 졸업생 중에는 한의사가 잔디 농약을 연구하고, 무기제조 회사의 간부가 스크린 골프의 센서를 연구한다. 골프와 인문학이 만나도 좋고 골프와 자연과학이 만나도 좋다.

보험의 시대다.

불우한 노년을 막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만이 보험일까.

정년 후에도 행복하게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험가입 아닌가.

그렇다면 '골프 플러스 알파 운동'은 어쩌면 진정한 보험일 수도 있다.

그토록 사랑하는 골프를 하면서 좋아하는 취미도 즐기고 평생 해 왔던 전문성을 연장해서 그것이 조그마한 수익이 생기는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에는 영어만 잘해도 취직이 잘되고,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요즘은 영어 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골프도 꼭 그렇다.

골프 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는 골프를 친다는 사실만으로도 차별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골프와 다른 것이 혼합된 한 차원 높은 골프만이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이제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는데 즉각 도움이 되는 팁이나 알려주지 뭔 김 빠지는 소리를 하나 싶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샷 중심주의' 에서 '스코어 중심주의'로! 스코어 중심에서 골프 그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골프만을 즐기는 것에서 골프와 더불어 즐기는 어떤 것으로 지평을 넓히는 것이 당연히 스코어를 좋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역설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런 골프라야 그 많은 시간과 비용들 들여도 아깝지 않다.

그런 골프라야 더 풍성한 콘텐트가 되어 다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고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미래의 먹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박수!!!!

출처 : Daejeon Silver Orchestra ㅡ Chorus
글쓴이 : 유진 원글보기
메모 :

 

[최보식이 만난 사람] 세계 최고 자살률의 나라… ‘뇌(腦) 정신과학자’ 권준수
“우리는‘마음’이라 알고 있지만… 그 정체는 腦의 물질일 뿐”
얼마 전 영국 방송 BBC는 세계 12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 이 왜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지를 심층보도했다.

'한국은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고, 살사클럽에서 밤새도록 춤출 수 있고, 출근길에는 맛있는 카푸치노를 살 수 있는 나라일 정도로 부유해졌지만, 사람들은 한국전쟁 직후의 어려웠던 시절보다도 덜 행복해 보인다.'

↑ [조선일보]뇌 부위는 크게 두정엽(위), 전두엽(앞), 측두엽(옆), 후두엽(뒤), 소뇌(아래), 척수(척추 안쪽), 말초신경 등으로 분류한다. 정신분열병은 ‘조현병(調絃病)’으로 개명됐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라는 뜻으로, 치료가 가능한 정신 기능의 부조화임을 지적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통합실조증’, 홍콩에선 ‘사각(思覺)실조증’이라고 부른다.

↑ [조선일보]권준수 박사는 "괴담과 선동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뇌의 전두엽 기능이 퇴화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자살, 광기, 불안, 우울, 집착, 망상, 피해의식, 게임중독, 사이코패스 등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해마다 한국인 545만명(전체 인구의 17%)은 한 번 이상 정신병을 앓는다. 2006년 건강보험으로 진료받은 정신질환자는 180만명으로 2001년에 비해 35% 증가했다. 이는 보건복지부 통계다.

"급격한 사회 변화의 스트레스가 사람을 몰래 무너뜨려 온 것이다. 정신질환은 숨어 있다. 자기만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남들 보기에는 괜찮았는데 어느 날 우울증으로 자살한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 환자는 터질 듯이 심장이 뛰고 땀을 흘리며 본인은 죽을 것 같아 응급실로 실려온다. 하지만 맥박이나 혈압검사를 해보면 정상이다."

권준수(52) 서울대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와 마주 앉아 있다. 그는 국내 최고 권위의 의학상인 분쉬의학상(2009년)을 받았다. 대한조현병학회의 이사장, 국제정신분열병학회에서는 동양인 최초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매년 연인원 9000여명의 정신질환 환자를 보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항상 희희낙락 기분 좋은 게 정상인가, 약간 가라앉아 있는 기분이 정상인가?

"명랑하거나 침울한 것은 성격의 특징일 뿐이다. 정도가 심하거나 이상한 반응을 보이면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상태란 어떤 것인가?

"비유하면 어떤 집단에서 눈 두 개보다 눈 하나뿐인 원숭이가 월등히 많으면 그게 정상이다."

―통계적으로 다수가 되면 정상인가?

"정상이란 주위 환경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가령 사랑하는 연인이 숨졌는데 '기분이 좋다'고 하면 비정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 혼자 환청(幻聽)이 들린다거나, 피해망상도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을 관찰해보면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 직장 일에 매달리고, 종교에 사로잡히고, 술과 게임에 중독되고, 성적 쾌락에 빠지고, 권력에도 미친다. 이렇게 사로잡힌 것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심하면 정신질환으로 볼 수 있다.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워크홀릭은 남들이 보기에는 안타깝지만, 본인은 거기서 쾌락 혹은 내적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 사람은 일을 못하면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실제 뭔가에 쉽게 빠지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가령 술 중독인 사람이 술을 끊으면 다른 무엇에 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대체 어디까지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나?

"당(糖)수치가 얼마면 당뇨, 혈압이 얼마면 고혈압이라든지, 다른 질환처럼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은 있다. 우울증의 경우 흥미 상실, 입맛 감소, 잠이 많이 오거나 적게 옴, 자존감 상실, 자살 생각 등과 같은 증상 중 몇 가지가 2주(週) 이상 계속 되면 전문가가 주관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전문가 판단은 틀릴 때가 없나?

"분명한 것은 뇌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 현상은 뇌의 기능·조직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는 1996년부터 2년간 하버드대학 정신과에서 연수하는 동안 정신분열증(조현병) 환자는 뇌파 중 감마파에 이상이 있다는 걸 최초로 발견했다. 언어기능 이상은 뇌의 '편평측두엽' 손상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정신병을 앓은 예술적 천재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이 창작 행위에 어떤 작용을 하는 걸까?

"정보를 전달하는 이들의 뇌 신경세포는 연결이 엉성하다. 배열도 가지런하지 않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정보 전달이 이뤄진다. 일반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참신한 발상과 창의성을 가져올 수 있다."

―정신병자와 천재의 차이는 뭘까?

"천재는 현실 속에서 판단할 능력이 있다. 정신병자는 환청·환시를 현실로 믿는다. 본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평소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천재 예술가는 약간 덜 미친 광인으로 정의할 수 있나?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자폐증 환자의 경우 대인관계와 관련된 사회적인 기능이 떨어져 있을 뿐, 기억력이 뛰어나거나 예술 운동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이기도 한다.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적 천재의 경우도 특정 뇌 기능은 몹시 발달했으나, 다른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뇌의 모든 기능이 다 뛰어난 경우는 없다."

―뇌 상태를 보면 그 사람이 불안·우울·피해의식 등 어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지도 알 수 있나?

"도박중독자의 경우 뇌 신경세포 간에 전달하는 물질(일종의 전기적 자극)인 '도파민' 기능에 이상이 있는 걸로 발견됐다. 도파민이 쾌락과 중독과 관련돼 있다는 뜻이다. 도파민이 쉽게 분비되면 그 사람은 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은 신경물질인 '세라토닌'에 문제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가 위축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현재로는 이런 노이로제 증상에 뇌의 어떤 영역이 어떻게 달라져 있다는 식으로 정의할 수준에는 와있지 않다."

―우울·불안감 같은 감정 상태를 뇌가 지시하는가?

"뇌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지시가 아니라 인지하는 것이다."

―본인이 자살충동에 이르는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걸 의식했을 때, 그런 감정에 빠지지 말자고 마음을 먹으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일시적인 우울증은 영화나 쇼핑 등으로 기분 전환이 된다. 그러나 중증이면 약물이나 다른 운동치료를 통해 뇌 상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세라토닌'을 높이는 약을 투여해 뇌의 변화가 오면 기분이 바뀐다. 지속적인 운동을 하거나 억지로라도 웃는 것도 뇌 상태에 변화를 준다."

―몸의 어떤 행위나 훈련으로 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나?

"저글링을 하루 30분 이상 석 달간 꾸준히 연습한 사람에게는 시각과 공간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에서 변화가 있었다.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된 것이다. 우리 팀도 바둑기사들의 뇌 영상을 관찰해본 결과, 뇌의 여러 영역에서 상호 연결성이 발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몸의 반복훈련을 통해 뇌 상태가 바뀔 수 있다. 이를 '뇌 가소성(plastisity)'이라고 한다."

―음식도 뇌에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그렇게 보는데 과학적인 증명은 아직 안 됐다."

―음주는?

"술을 많이 마시면 치매가 빨리 온다. 치매의 경우 뇌 피질이 굉장히 얇아져 있다. 요즘 어떤 TV 드라마에 젊은 여자가 치매에 걸린 걸로 나온다. 실제로 30대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치매는 65세 이후에 나타나는 병이다. 자폐증은 어릴 때, 조현병은 10대와 20대, 우울증은 중년 이후에 잘 나타난다."

―당신은 명상(瞑想)의 효과에 대해서도 실험해본 적이 있다고 들었다.

"명상 수련자 40여명의 뇌를 찍어보니 '전두엽' 부위가 일반 사람들의 평균보다 두꺼웠다. 고등동물이 될수록 '전두엽'이 점점 커진다. 그 부위의 앞쪽인 '전(前)전두엽'은 욕망과 충동 등을 절제하는 기능을 맡는다. 요즘 트위터 괴담(怪談)이나 선동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개체적으로 보면 이런 '전전두엽'의 기능 퇴화와 관계가 있다."

―소위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도 결국 뇌를 조절한다는 뜻인가?

"바로 그거다. 마음과 뇌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마음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뇌다."

―비슷한 조건에서 어떤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고, 어떤 사람은 괜찮다. 타고날 때 정해진 것인가?

"정신질환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외부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사이코패스나 유아 성폭행범도 선천적 유전 결함으로 설명하려는가?

"외부 환경보다 생물학적 요인에 더 발병 원인이 있다는 게 과학계 정설이다. 감정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속의 '편도체(신경세포 다발)'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합리적인 결정에 기여하는 '전전두엽 피질'도 정상인의 85%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개인이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유전자의 문제로 범죄가 이뤄진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그 개인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가?

"그게 신경윤리학계의 핫 이슈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자유의지로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뇌의 문제로 뇌가 시켜서 한 것이라면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논쟁이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동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은 에드워드 윌슨(미국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생물학자)의 '사회생물학'에서 비롯됐다.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한다, 한 개체의 장래 삶은 유전적으로 결정돼 있다, 정신은 뇌신경의 현상일 뿐이다…. 이는 인간 탐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지만 인종적 편견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어려운 문제다. 유전 못지않게 후천적 환경이 중요하다. 취약한 유전자를 타고나와도 환경과 마음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유전자는 불변(不變)이 아니다. 오랜 세월 환경 속에서 유전자도 바뀌어왔다. 그런 유전자 결함을 타고났다고 다 사이코패스가 되지는 않는다. 마음을 잘 갈고 닦아라는 게 이런 뜻이다."

―현재 우리가 뇌에 관해 아는 지식은 어디까지인가?

"뇌는 신경세포의 다발과 연결에 불과하다. 그런 물질적인 뇌가 근육운동·감정·인지기능은 물론이고, 고도의 정신영역인 철학과 신앙까지 모두 관여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10의 11승(乘)이나 있다. 이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 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정신 현상이 뇌와 관련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뇌 연구를 통해 정확하게 정신 질환의 원인과 치료에 접근할 수 있다. 가령 대뇌피질의 두께 감소 등이 조현병의 원인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뇌피질 두께가 얇아지기 전에 대처하면 조현병을 억지시킬 수 있다. 또 뇌의 특정 기능을 개선하면 행복감을 느끼고 창의성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왜 살아가고 어떤 의미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하는 답도 나올까?

"과학기술이 발달해 우리의 뇌를 1㎜간격으로, 수백분의 1초의 간격으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고 해도 그 답이 그저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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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시장후  드림  소사이어티>>

 

정보화 사회의 태양이 지고 있다.

우리가 그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제 또 다른 형태의 사회 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드림소사이어티다. 이것은 신화의꿈, 이야기(story)를 바탕으로

감성의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롤퍼 옌센..

저자 롤프 옌센

세계에서 가장 큰 미래문제 연구 집단인 코펜하겐 미래학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 세계 100여개 이상의 기업과 정부기관의 전략부문 컨설팅을 수행 해 왔으며, 현재 유럽 미래학회의 자문위원이다. 그는 미래와 전략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들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에 있는 세계미래사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코펜하겐 미래문제 연구센터의 모든 역량을 "정보화 사회 이후는

무엇인가?"에 집중시켰고,1999년 마침내 보고서<<드림 소사이어티>>가 완성되었다

**드림소사이어티의 시장은 감성과 꿈이 지배한다. 이시장에서 승리하려거든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이야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야기를 품지 못하는 상품은 창고에 처박힐 것이다. 이야기 업는 이는 그 어떤 부가가치도 낳지 못한다.

소비자들은 이제 상품 그 자체를 사는것이 아니라 상품에 읽힌 이야기를 산다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업는 상품은 도태되고 말 것이다.

기업과 시장을 주도하려거든 이야기꾼(storyteller)이 되어라..그것이 정보화 사회 이후에 도래할

드림 소사이어티를 찾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나이키는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는 이야기를펼쳐 보인 대표적이 기업이다.

나이키가 중ㅅ기하는 것은 상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불패와 승리의 신화다.

*미래는 꿈과 감성과 이야기를 파는 사회 즉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사회다

이 시대에 이야기는 이윤을 만든다. 소비자는 상품 자체보다 상품에 딸린 이야기를 중시하고

그것에 배료되기 때문이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한 마디로 이야기의 힘이 지배하고 꿈과 감성이 주도하는 사회다

상상력은 생산력과 직결된다.상상력은 정신적 생산력이라는 말이 지금은 상상력이 바로 생산력을  대물질적체하고 있으며 상상력이 바로 생산력이다.

 CIO(chief imagination officer)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 6대 감성시장

*모험 판매 시장.. 일상탈출의 욕구를 자극한다 이 시장의 최대 장점은 프로 모험가들의 도전과 성패의 모든 이야기가 시장에서도 그대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연대감.우월감 ,우정, 사랑을 위한 시장.. .우리는 나와 같은 음료를 마시며 누군가에게서

조차친밀감을 느낀다. 즉 음료 시장과 외식 산업 역시 연대감 친밀감의 시장이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되레 "느낌의 공동체의 영향력이 증폭되었다.

*관심의 시장..개인이든 조직이든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살아남으려면 관심과 나눔의 방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봉사나 나눔도 끊임없이 관심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생존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 의 시장..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이 욕구는 옷이나 넥타이 구두나 자동차 가전제품이나 핸드폰 등 거의 모든 상품에

투영되었고 이 같은 추세는 이른바 명품 시장 출현의 배경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요즘 소비자들이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세콤 캡스 등의 보안 사업이 활성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은행 로펌 투자자문회사 등은 모두

신뢰를 판다.즉 어떻게 하면 안심을 팔수 있을까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신념의 시장..신념의 시장에서 움직이는 소비자와 맞서는 기업은 백이면 백 쓰러진다

때문에 드림 소사이어티의 기업은 매일매일 소비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신념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신념의 시장에서 기업의 이미지를 추락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단체과 부딪힐 때는 단순히 피하지 말고 그대 대한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표명해야 한다.

그래야 신념의 시장에서 살아남고 존경받는 기업 ,존경받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정진홍/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중에서..

<정보의 시장후  드림  소사이어티>>

 

정보화 사회의 태양이 지고 있다.

우리가 그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제 또 다른 형태의 사회 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드림소사이어티다. 이것은 신화의꿈, 이야기(story)를 바탕으로

감성의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저자 롤프 옌센 /드림 소사이어티

세계에서 가장 큰 미래문제 연구 집단인 코펜하겐 미래학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 세계 100여개 이상의 기업과 정부기관의 전략부문 컨설팅을 수행 해 왔으며, 현재 유럽 미래학회의 자문위원이다. 그는 미래와 전략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들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에 있는 세계미래사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코펜하겐 미래문제 연구센터의 모든 역량을 "정보화 사회 이후는

무엇인가?"에 집중시켰고,1999년 마침내 보고서<<드림 소사이어티>>가 완성되었다

**드림소사이어티의 시장은 감성과 꿈이 지배한다. 이시장에서 승리하려거든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이야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야기를 품지 못하는 상품은 창고에 처박힐 것이다. 이야기 업는 이는 그 어떤 부가가치도 낳지 못한다.

소비자들은 이제 상품 그 자체를 사는것이 아니라 상품에 읽힌 이야기를 산다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업는 상품은 도태되고 말 것이다.

기업과 시장을 주도하려거든 이야기꾼(storyteller)이 되어라..그것이 정보화 사회 이후에 도래할

드림 소사이어티를 찾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나이키는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는 이야기를펼쳐 보인 대표적이 기업이다.

나이키가 중ㅅ기하는 것은 상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불패와 승리의 신화다.

*미래는 꿈과 감성과 이야기를 파는 사회 즉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사회다

이 시대에 이야기는 이윤을 만든다. 소비자는 상품 자체보다 상품에 딸린 이야기를 중시하고

그것에 배료되기 때문이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한 마디로 이야기의 힘이 지배하고 꿈과 감성이 주도하는 사회다

상상력은 생산력과 직결된다.상상력은 정신적 생산력이라는 말이 지금은 상상력이 바로 생산력을  대물질적체하고 있으며 상상력이 바로 생산력이다.

 CIO(chief imagination officer)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 6대 감성시장

*모험 판매 시장.. 일상탈출의 욕구를 자극한다 이 시장의 최대 장점은 프로 모험가들의 도전과 성패의 모든 이야기가 시장에서도 그대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연대감.우월감 ,우정, 사랑을 위한 시장.. .우리는 나와 같은 음료를 마시며 누군가에게서

조차친밀감을 느낀다. 즉 음료 시장과 외식 산업 역시 연대감 친밀감의 시장이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되레 "느낌의 공동체의 영향력이 증폭되었다.

*관심의 시장..개인이든 조직이든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살아남으려면 관심과 나눔의 방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봉사나 나눔도 끊임없이 관심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생존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 의 시장..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이 욕구는 옷이나 넥타이 구두나 자동차 가전제품이나 핸드폰 등 거의 모든 상품에

투영되었고 이 같은 추세는 이른바 명품 시장 출현의 배경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요즘 소비자들이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세콤 캡스 등의 보안 사업이 활성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은행 로펌 투자자문회사 등은 모두

신뢰를 판다.즉 어떻게 하면 안심을 팔수 있을까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신념의 시장..신념의 시장에서 움직이는 소비자와 맞서는 기업은 백이면 백 쓰러진다

때문에 드림 소사이어티의 기업은 매일매일 소비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신념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신념의 시장에서 기업의 이미지를 추락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단체과 부딪힐 때는 단순히 피하지 말고 그대 대한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표명해야 한다.

그래야 신념의 시장에서 살아남고 존경받는 기업 ,존경받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정진홍/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중에서..

 

헬렌 켈러

 
헬렌 켈러
1904년의 헬렌 켈러
출생 1880년 6월 27일(1880-06-27)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
사망 1968년 6월 1일 (87)
미국 코네티컷 주 이스턴 아칸릿지
국적 미국 미국
종교 개신교[1]
서명
Helen keller signature.svg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는 미국작가, 정치 활동가 및 교육자이다.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이다.[2][3] 헬렌 켈러의 장애로 인해 가지고 있던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많은 집필 활동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여행을 자주 다녔고 또한 전쟁에 대해 미국이 전쟁가담의 구실로 내세운 민주주의 옹호론을 "인종차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인가?"라고 논박함으로써 반대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여성의 선거권참정권,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인권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목차

[편집] 어린 시절과 질병

1888년 7월, 앤 설리번과 함께 케이프 코드에서 휴가를 보내는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1880년 7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의 아이비 그린[4]이라는 이름의 한 농장의 저택에서 남부 동맹의 전직 사무관인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와 로버트 리 남부 동맹 총 사령관의 사촌이자 전직 남부 동맹 장군이었던 찰스 W. 애덤스의 딸인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녀의 가족은 스위스에서 왔다.[6]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생후 19개월 후에 의사로부터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생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 때는 가정 요리사의 6살 난 딸이자 그녀의 수화를 이해하는 아이인 마르타 워싱턴과 대화가 가능했었다.[7] 헬렌 켈러는 7살 때부터 집안에서 60개가 넘는 수화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다. 소련의 시청각 장애 심리학자인 A. 메스체리코프에 의하면, 마르타과의 교제와 그녀의 가르침은 헬렌이 나중에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한다.

1886년, 헬렌의 어머니 케이트 켈러는 찰스 딕슨의 《American Notes》라는 시청각 장애인인 로라 브릿맨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 관해 쓰여진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그녀는 공문을 헬렌과 그의 아버지를 동행하게하여 눈, 귀, 코, 목에 관련한 전문가인 J. 줄리안 치솜을 찾아 조언을 얻기위해 볼티모어로 보냈다.[8] 그는 이어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그녀의 가족을 연결시켜줬다. 벨은 보스턴 남쪽에 위치해있고 브릿맨이 교육을 받은 학교인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연락해보라고 조언하였다. 그 학교의 교장 선생인 마이클 아나가노스는 시력 감퇴가 있는 20살의 학교 졸업생 앤 설리번에게 헬렌의 가정 교사가 되는 것을 물어보았다. 이 일은 49년간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이다. 곧 그녀는 헬렌의 가정교사가 되고 나중에는 그녀의 동반자로써 함께하게 된다.

앤 설리번1887년 3월에 헬렌의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헬렌이 단어의 스펠링을 그녀의 손에 적어주는 식으로, 그녀가 헬렌에게 선물로 가져온 'd-o-l-l'(doll, 인형)의 스펠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헬렌이 의사소통 방식에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그녀가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고 '(water)'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쓰면서 연상시켜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헬렌은 설리번과 세상의 다른 흔한 사물들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왼쪽 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헬렌은 사물의 윤곽을 형상화시키며 배웠다. 그녀의 양쪽 눈은 의학적인 이유와 외관적인 이유때문에 유리 복제품으로 대신 교체되었다.[9]

[편집] 정규 교육

1898년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888년 5월 초, 헬렌은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등록하였다. 1894년에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라이트 휴머슨 청각 장애 학교호레스 만 청각 장애 학교를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1896년에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서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다녔다. 그 후로 1900년, 헬렌은 레드클리프 대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크 트웨인스텐다드 오일의 간부이자 그의 아내와 함께 헬렌의 교육비를 지원해준 헨리 H.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1904년에 24살이 된 헬렌 켈러는 레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면서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편집] 그녀의 동반자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일이 끝난 뒤에도 계속 동반자로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앤 설리번은 존 메시와 1905년에 결혼했고 그녀의 건강은 1914년경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폴리 톰슨이 집을 지키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젊은 여성으로 시청각 장애인에 관한 경험들이 전무하였다. 그녀는 비서처럼 일할 만큼 발전했고, 결국에는 헬렌 켈러의 평생 동반자로 남게 되었다.[10]

헬렌 켈러는 퀸스의 포레스트 힐즈로 앤 설리번과 남편 존 메시와 함께 이사했고, 집을 미국 시각 장애 재단의 지지를 위한 노력의 거점처럼 삼았다. [11]

1936년, 앤 설리번이 사망하고 나서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은 코네티컷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또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기금을 늘렸다. 톰슨은 1957년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발작을 일으켰고, 곧 1960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2]

1957년에 원래 폴리 톰슨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온 간호사인 위니 코베리는 톰슨의 죽음 이후로도 헬렌의 집에 남아서 그녀의 남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2]

[편집] 정치적 활동

헬렌 켈러라고 하면 흔히 앤 설리번 선생의 인내와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12], 역사 속의 헬렌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편집] 인권운동

헬렌 켈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연설가로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불리한 신체조건 등 많은 장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및 옹호로 많이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반대자였으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 여성 피임 지원자였다. 1915년, 헬렌 켈러와 조지 케슬러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비전과 건강, 영양 연구에 열심이었다. 1920년에는 그녀가 미국 자유 인권 협회(ACLU)의 설립을 도왔다.

[편집] 일본방문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은 39여개 국가들을 돌아녔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의 몇 차례 방문으로 일본인들의 인기인이 되었다.

[편집] 유명인사들과의 만남

헬렌 켈러는 그로버 클리블랜드부터 린든 존슨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만났고 또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찰리 채플린, 마크 트웨인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친구였다.

1920년 경 헬렌 켈러가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목련을 들고 있는 모습

[편집] 사회주의 운동

헬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영어: Socialist Party of America, 1901년 창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 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발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편집] 미국의 도덕주의 비판과 민중운동

또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라고 선언하자,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Moralism)가 얼마나 표리부동한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했다.[13] 그녀의 이러한 활발한 사회참여에 대해 보수주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 라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 헬렌 켈러,

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14]

[편집] 한계

하지만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당원으로 활동한 미국 사회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당은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빌 헤이우드 집행위원에 대한 제명 조치에 반발, 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일치하여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할 사회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고 비판했지만,[15] 결국 내분을 막지 못했다. 헬렌 켈러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노동 계급의 지원자들에게 투서하였다. 그녀는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자인 유진 뎁스의 모든 대통령 선거 운동들을 지원하였다.

[편집] 보수언론들의 인신공격

헬렌 켈러와 친구였던 마크 트웨인은 20세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인물들로 생각되었으며,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안목은 잊혀지거나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덮어졌다. [16] 그녀가 그녀의 사회주의적인 견해를 표현하기 전에 그녀의 업적과 영리함을 칭찬하던 보수적인 신문 칼럼니스트들은 헬렌이 사회주의자임을 알고부터는 그녀의 신체적인 장애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인신공격을 하였다. 브루클린 이글이라는 지역 신문의 편집장은 그녀의 "명백한 그녀의 발전의 한계를 깨버린 실수들"에 대해 썼다. 헬렌 켈러는 그가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알기전에 만났던 일을 언급하며 대답했다.

이때는 그가 제게 보내주었던 찬사들이 제가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저에겐 너무나도 과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지금 그(편집장)은 저와 대중들에게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이고 또한 오류를 쉽게 범한다는 걸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를 만난 후부터 몇 년 동안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오, 어리석은 《브루클린 이글》! 사회적으로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들리는 것은 우리가 예방하고자 노력하는 신체적인 시청각 장애를 일으키는 질서를 옹호합니다. [17]

[편집] 노동운동

헬렌 켈러는 1912년세계산업노동자 단체(IWW 혹은 워블리)에 가입했으며[16] 의회 사회주의는 "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16년1918년사이에 IWW를 위한 글을 썼다. 내가 왜 IWW가 되었나라는 글에서 [18] 헬렌 켈러는 그녀의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나오는 실천적인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였다.

저는 시각 장애인들의 상태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로 시각 장애를 인간의 제어를 벗어난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대개 고용주들의 탐욕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노동 환경이 존재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악은 그것에 일정부분 기여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여성들을 계속 장님인 상태로 끝나는 수치스러운 삶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여성들의 매춘과 시각 장애의 원인이 되는 매독을 언급한 것이다.

[편집] 집필

헬렌 켈러의 가장 오래된 집필 활동중 하나는 그녀가 11살일때 작업한 서리 왕(The Frost King) (1891)이다. 이 작품은 마가렛 캔비의 서리 요정(The Frost Fairies)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는 헬렌 켈러가 잠복기억 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폭로하였다. 헬렌 켈러는 캔비의 이야기를 읽고서 잊어버렸으나 무의식적인 기억속에 남았다는 이야기이다.[2]

22살에는 헬렌 켈러가 그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1903)를 앤 설리번과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와 함께 출간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녀가 21살까지 자라온 이야기를 담았고 그녀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썼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그녀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지 알게 깨닫게 해주는 내가 사는 세계1908년에 집필하였다.[19] 어둠의 바깥이라는 사회주의에 대해 쓴 에세이 시리즈는 1913년에 출판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인 나의 종교1927년에 출판되었고 내 어둠속의 빛과 같이 다시 이슈가 되었다. 이 자서전은 논란이 많은 신비주의 신학자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지지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예수의 부활에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에는 스데벤보리아니즘이라고 이름이 붙기도 한다.

헬렌 켈러는 총 12개의 책을 출판하였고 많은 기사들을 썼다.

[편집] 아키타

1937년 7월에 일본아키타 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1935년에 죽은 유명한 개 하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일본인에게 아키타 견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며 한마리를 한 달도 안돼서 받았고 이름은 Kamikaze-go였다. 이 개가 개 홍역으로 죽었을 때 이 개의 형이었던 Kenzan-go가 일본 정부의 공식 선물로서 1938년 7월에 왔다. 헬렌 켈러는 이 두마리의 개를 미국에 아키타 견을 소개하며 미국인들이 이 개들에 대해 신뢰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까지 품종 기준(breed standard)이 만들어졌고 개 쇼(dog shows)가 열렸지만 이런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멈추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아키타 저널을 썼다.

만약 천사의 털이 있다면 그것은 카미카제[주해 1]의 털이다. 나는 다른 애완동물에게서는 영원히 이렇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것을 안다. 아키타 견은 모든 것에 있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개는 온화하고 사교적이고 믿음직하다.[20][21]

[편집] 말년

1952년 1월 5일, 이스라엘의 크바 우리엘 마을을 방문한 헬렌 켈러. 가운데가 헬렌 켈러이다.

헬렌 켈러는 1961년에 지속적인 뇌졸중에 시달렸고 말년을 그녀의 집에서만 보냈다.[2]

1964년 9월 14일, 미국의 대통령린든 존슨은 헬렌 켈러에게 가장 높은 두개의 훈장 중 하나인 '대통령 훈장'을 수여했다.[22] 1965년, 헬렌 켈러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뽑혔다.[2]

헬렌 켈러는 '미국 시각 장애인 재단'의 기부 활성화를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헬렌 켈러는 말년을 미국 맹인 재단에 자금을 제공하는일에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1968년 7월 1일에 코네티컷, 웨스트포드의 아컨 리지(Arcan Ridge)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성공회 대성당인 워싱턴 국립 대성당(영어: Washington National Cardinal)에서 행해졌으며 그녀의 유해는 영원한 동료이자 선생이었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의 옆에 놓였다.

[편집] 헬렌 켈러에 대한 묘사들

[편집] 구조

헬렌 켈러의 삶은 수어번 소개되었다. 그녀는 무성 영화인 《구조》 (1919)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녀의 이야기를 약간 과장하고 우화적으로 표현하였다.[23]

[편집] 헬렌 켈러의 삶 속의 그녀

그녀는 또한 《헬렌 켈러의 삶 속의 그녀》(Helen Keller in Her Story)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케서린 코넬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The Story of Helen Keller)》라는 유명 미국의 시리즈물의 한 파트로서 허스트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에서 제작되었다.

[편집] 미라클 워커

미라클 워커》는 그녀의 자서전인 나의 삶에서 나온 극적인 일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 여러 드라마들은 각각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관계를 설리번 선생이 어떻게 방황하는 삶을 살던 헬렌 켈러를 교육과 실천적인 행동, 또 저명한 인사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묘사를 했다. 가장 잘 알려진 제목은 마크 트웨인이 앤 설리번을 표현한 것과 같이 "미라클 워커(기적적인 일꾼)"이다.

[편집] 첫번째 미라클 워커

그 첫 번째 실현은 1957년에 윌리엄 깁슨이 제작한 플레이하우스 90의 각본이었다. 그는 연극 미라클 워커(1959)를 위해 이 작품을 각색하였고 앤 밴크로프패티 듀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미라클 워커(1979)》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79년2000년TV 방송용으로 재제작되었다.

[편집] 방송용 영화

2000년 제작된 방송용 영화는 디즈니에서 제작했으며, 교육방송에서 토요일 오후에 방송되었던 EBS 가족극장으로 소개되었다. 헬렌이 말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때문에 방황했지만, 설리번의 끈질긴 교육, 가족들과 고용인들의 인내와 협조로 장애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미국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실례로 영화에서 헬렌의 부친, 모친, 오빠, 고모할머니 그리고 집안살림을 맡아보는 분들은 헬렌이 장애를 극복하자 자신의 일처럼 같이 기뻐한다.

[편집] 기적은 계속된다.

1984년, 헬렌 켈러의 삶 이야기는 《기적은 계속된다》 TV 영화로도 만들어졌다..[24] 《미라클 워커》의 속편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헬렌 켈러의 대학 생활과 초기 성인으로써의 생활을 담았다. 초기의 어떠한 영화들도 헬렌 켈러의 삶의 흔적인 사회주의적 행동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2000년에 디즈니에서 제작한 텔레비전 방송용 미라클 워커 영화는 헬렌을 평등을 위한 행동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주의 운동경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편집] 블랙

볼리우드 영화인 《블랙》 (2005)은 대부분 헬렌 켈러의 어린시절부터 졸업 때까지의 그녀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샤이닝 소울: 헬렌 켈러의 영적인 삶과 유산》[25]은 같은 년도에 스베덴보리 재단이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그녀의 삶에 대한 스웨덴 개신교 영성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신학에 의한 역할극과 어떻게 헬렌 켈러가 3대 악재인 실명, 실청 그리고 거대한 언어의 장벽을 넘었다는 것에 영감을 받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편집] 사진

2008년 3월 6일, 뉴잉글랜드 역사족보협회는 이미 발표 되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진 진귀한 1888년에 찍은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사진을 직원들이 찾았다고 발표하였다.[26] 그녀의 많은 인형 중 하나를 들고있는 헬렌 켈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앤 설리번의 가장 오래된 사진일거라 믿어진다.[27][28]

[편집] 사후의 명예

헬렌 켈러가 그려져 있는 앨라배마 주 쿼터 동전

1999년에는 헬렌 켈러가 "갤럽이 선정한 20세기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인물" 1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03년 앨라배마 주는 주를 상징하는 쿼터(25 센트) 동전에 헬렌 켈러를 그려넣었다.[29]

앨라배마 셰필드에 있는 '헬렌 켈러 병원'은 앨라배마 주가 헬렌으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30]

전 세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도시는 스페인헤타페이스라엘로드가 있다.[31]

인도 마이소르에 있는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유치원은 설립자 K. K. 스리니바센에 의해 헬렌 켈러의 이름을 따게 되었다.

2009년 10월 7일, 헬렌 켈러의 동색 동상이 "미국 조각 수집관"(National Statuary Hall Collection)에 1908년 자베즈 커리(Jabez Lamar Monroe Curry)의 앨라배마 주 동상 대신으로 추가되었다. 이 동상은 "미국 국회의사당 방문객 센터"에 전시되어 있으며, 수중 펌프앞에 서있는 7살의 헬렌 켈러를 담아냈다. 이 동상은 그녀가 W-A-T-E-R(물)이라는 단어를 앤 설리번이 그녀의 손에 써가면서 처음으로 이해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글은 일반 글자와 점자로 쓰여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거나 만져질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 속에서 느껴질 것이다.
 
—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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