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강희제 康熙帝  (재위1661~1722년)

순치제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나 8세때 황제로 즉위해 61년의 재위기간으로 역대 중국황제중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황태자의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때 황제로써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닫고 학문엘 열중하며 지식을 쌓아나갔다.  


8세의 어린 황제앞에는 청나라의 1대, 2대 황제때부터 온갖 전쟁에서 용맹함을 보여 "만주 제일의 용사" 라는 평가를 받던 오배가 있었다.  오배는 청나라의 병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어 그는 거칠것이 없었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았고 심지어 어린 강희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구는등 방자한 행동을 계속하였지만 아무런 힘이없었던 어린 황제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씨름 구경을 하며 즐거워 하는척 하면서 명망 높은 학자들을 불러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았다.  오만방자하던 4명의 대신 중 한명이 사망하자 오배는 자신의 정적에게 24가지의 누명을 덮어 씌워 제거한 후 모든 권력을 손게 쥐게 되었다.  어느날 오배의 병문안에서 오배의 몸에서 단검을 발견하자  강희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만주족은 본래 몸을 지키기 위해 단도를 가지고 있는것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지." 말을 했지만 언젠가는 그 단도로 황제를 시해할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오배를 없애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善營이라는 특별군을 조직하고 관람했다.  실상은 오배를 속이며 황제의 친위대를 조직한 것이다.  강희제가 16살이 되던 해 오배가 홀로 궁정에 오자 사로잡고 그에게 30가지 씌어 처형을 하려했지만 오배가 죽기 직전에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따라 싸우면서 생긴 수많은 상처들을 보여주며 애원해 형량을 낮추었다. 


오배를 없앤 후 실권을 잡게 된 황제에게는 삼번(三藩)이라는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  강남 일대로 파견한 세명의 번(藩)왕들이 비옥한 강남 일대에서 세금, 군사, 관리의 임명등 모두 자신들의 맘대로 처리하며 각자의 지역에서 황제와 같이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신이 국사의 전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들의 세력은 큰 문제가 되어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 때를 기다릴 줄 알던 황제는 기회가 왔을때 놓치지 않고 번을 해체해버렸다.  신하들은 번을 폐지하면 틀림없이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번을 폐지해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고 폐지하지 않아도 모반을 일으킬 것이니 차라리 선수를 치는것이 낫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9년간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명나라의 장군으로 명을 배반하고 청나라를 도왔던 '오삼계'는 3명의 번왕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삼번의 난'이 일어나 반년이 채 되지 않아 강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을 손에 쥐에 되었다.  반란군들의 엄청난 기세에 몽골의 칸들이 강희제를 지원하겠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상황을 길게보고 끈질기게 대처했고 반란군인 오삼계는 지나치게 신중해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공격하지 않고 어물거렸다.  오삼계의 반란군은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 만주족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한족의 명나라를 수복하자'는 명목이었지만 오삼계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빌붙은 인물이라 한족들이 큰 호응을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한족 출신의 명장들을 대거 등용해 반란군에게 역습을 하게되고 반란군의 장군들 중 자결하는 자도 있고 투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와중 반란군의 총대장인 오삼계는 노환으로 사망하자 9난간의 '삼번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그 당시 대만등은 청나라가 아닌 독립 지역으로 '삼번의 난'에 가담하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였다.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 한 후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대만의 전설적인 인물인 '장성공'은 무역을 하던 명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일본인의 어머니와 사이에서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명나라로 유학을 온 인물로 일곱살에 명나라로 유학을 할때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을 소탕하는등 큰 공을 세워 명나라 조정의 벼슬을 받았다.  명나라의 장수인 '오삼계(삼번의 난을 일으킨 인물)'가 변심해 청나라에 투항 한 후 명나라를 쳐 자신이 몸담았던 한족의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을때 그는 명나라의 황손인 주율건이라는 인물을 융무제로 세워 남명(南明)왕조를 건국해 명나라에 대항했다.  남명의 황제는 정성공을 높이 여기어 그에게 명나라 황제의 성인 주씨 성을 하사했으나 곧 남명의 황제인 융무제는 청군에 잡혀 굶어 죽게 되었고 정성공의 일본인 어머니가 죽게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나라와 전쟁을 하게된다.  정성공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청나라는 그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정성공은 전혀 듣지 않자 분노한 청나라는 아버지 정지룡을 잡아 천천히 살을 떠서 죽였다.  명나라를 침공했지만 태풍등으로 계속 좌절하자  정성공은 장기 전투를 생각해 청나라가 쉽게 공격하기 힘든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성공이 대만에 도착했을때 대만은 네덜란드인들의 동인도 회사가 대만을 점령하고 있을때 정성공은 2만의 군대로 10개월동안 네덜란드인들을 압박해 네덜란드들로부터 통치권을 전부 넘겨준다는 문서받고 대만의 왕으로 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오래 전부터 골치덩어리인 대만을 청나라로 흡수할 려고 했지만 네덜란드로부터 배운 서양문물로 만든 배들이 몹시 빨라 바다에선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무역으로 먹고 살던 대만인들에게는 청나라의 오랜 침공으로 무역을 하고 대만인들의 삶은 점점 힘들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청나라는 침략보다는 많은 뇌물을 동원해 정씨 집안에서의 분란을 유도하기 사작했고 대만의 왕족들은 후계자 쟁탈전을 벌여 대만인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후계자 쟁탈전으로 12세의 어린 '정극상'을 대만의 왕의 자리에 올린' 풍석범'이란 사람이 전권을 손에 쥐고 전횡을 휘둘러 대만인들 사이에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만군은 패배하고 청나라에 귀속되었다.  


대만을 점령한 강희제는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들은 칭송할만 하다" 며 대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희제의 성군정치를 펴 내,외부의 적을 없앴지만 북쪽의 러시아는 강희제의 아버지인 순치제때부터 많은 전쟁이 극심했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파견되어 러시아군을 물리친 '나선 정벌'이 이 시기의 전쟁 중 하나이다.   국경에서 러시아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등 계속 세력을 넒히려 해 분노한 강희제는 강경책으로  러시아의 요새 아르바진을 점령합니다. 그 후 청군과 러시아군은 몇차례 더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다 협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양국간에 조약을 맺게 되었다. 


1. 헤이룽강의 아르군·케르비치 두 강과 외싱안링 산맥(外興安嶺)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정하고 알바진 성은 파괴할 것

2. 흑룡강에 접하는 아르군강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 북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다.

3. 월경자의 인도와 처벌

4. 양국 민간인 사이의 교역의 자유 등을 규정하다

5. 과거의 갈등은 일체 불문에 부친다. 각자의 나라에서 정당한 업무활동을 하는 양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6.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며, 앞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조약이 의미의 가장 큰 의미는 이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나라와 외교할때의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천자(황제)의 것이다”  라며 신하의 나라, 형의 나라였지만  이 조약문으로 두나라가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다것이다.  그전까지는 로마 교황이건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건 그저 신하로 세계사에 안하무인이었지만 이 조약 하나로 새로운 청나라로 세계속에 발을 디딘것이다.  


강희제가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청의 태조 누르하치가 설립한 팔기군 제도를 강화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단속했으며 능력이 있으면 한족 출신의 장군들도 높이 등용했고 과거 적이었던 인물들도 포용하여 지휘관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학문을 사랑했고 호신술로 무예를 열심히 익혔으며 서양에서 온 여러 책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라틴어를 배웠고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화살의 명수로 사냥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만주족 전통의 기마술이나 무예도 부지런히 익혀 문무를 겸비했다.  또한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는 역대 황제와는 달리 폭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분별있게 먹으며 나이가 들서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학문을 사랑하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끝이 없었다.  서양의 여러 학문을 배웠으며 그들의 지리와 역사, 수학등을 배웠고 서양의 우수한것을 인정하고 배워나갔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지 않았고 배울 생각도 없었으나 가톨릭의 포교와 종교의 자유를 허가했다.  그가 무엇을 질문하면 신하들은 쩔쩔맬 정도로 엄청난 학문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옆에서 지켜본 서양인 선교사이 귀국해 중국 학회를 세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는 유교를 숭배했지만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카톨릭을 믿지도 않았지만 카톨릭의 선교활동을 금하지도 않았다.  현대 중국어의 어법을 확립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완성해 현대 중국어의 기틀을 잡았던 그의 68번째 생일 날에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서양 선교사들 등 수많은 인종들이 차별없이 참가했으며 각기 3000여명의 다른 민족들이 모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라며 명나라말기 무려 10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고작 400명로 줄여 국고의 낭비를 줄였으며 옷이 찢어지지 않는한 최대한 꾸메어 입기조차 했다. 그는 강남을 자주 순회하며 백성들의 삶이 풍성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황제였다.  평생동안 하루에 300~400통이 넘는 보고서를 모두 보고 답변까지 달아주며 그 모든것을 처리한 후 잠이 들었다.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이지만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어소박하기 그지없어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이었다.  한족 출신이 아닌 만주족 출신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에도 불구하고 한족에게조차 존경을 받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황제였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황제 강희제는 35명의 아들과 20명을 딸을 두었다.  


그의 61년 재위기간은 중국의 역대 황제중 가장 긴 재위기간이었지만 청나라를 황금의 시대로 이끈 성군으로 그는 평생의 좌우명을 삼국시대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보고 제갈량이 남긴 말중에 鞠躬盡瘁 鞠躬盡瘁(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로 삼아 평생 이뜻을 가슴에 새겨 모범으로 삼고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신하들에 '제갈량의 말은 신하가 군주를 모시는 태도에 관한 말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따르시겠습니까?'  라는 신하들에게  '나는 하늘을 섬기는 신하이외다.'   청나라에 이런 황제가 있었다는게 청나라의 축복이었다. 

하를 경영한 조조와 강희제의 인재등용 철학은 대조를 이룬다. 위나라를 세운 조조는 재능을 늘 첫 손가락에 꼽았다. 반면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청나라 강희제는 덕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두사람은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인재를 중시한 대표적인 지도자에 속하지만 용인술은 이와같이 대척점에 서 있었다. 이 때문에 재능이 먼저냐 덕이 먼저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조조는 능력만 있으면 남에게 욕을 먹거나 말거나 주저없이 발탁했다. 그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비록 형수와 간통한 인간이라도 뇌물을 받아 먹은 전과가 있는 인간이라도 재능만 있으면 쓴다." 인재를 널리 구하는 구현령을 발표했을 때도 그의 철두철미한 능력 우선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가 아니면 안된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언제 현인을 찾을 것인가?"란 구절이 단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재능만으로 인재를 발탁한다는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원칙을 어김없이 실행했던 조조는 "덕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기용했다고 해서 꼭 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되묻는다.

 

 

          (조조의 인물상)

조조와 달리 강희제의 인재등용 기준은 덕재겸비(德才兼備)였지만, 덕을 늘 우위에 두었다. <강희정요(康熙政要)>에 그의 인재관이 잘 녹아있다.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덕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짐은 사람을 볼 때 반드시 심보를 본 다음 학식을 본다. 심보가 선량하지 않으면 학식과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재능이 덕을 능가하는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재관은 그런 점에서 조조와 빼어 닮았다. 이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능력이 있으면 도덕성에 좀 흠이 있더라도 괜찮다." 인사철학을 밝혀왔다. 이대통령 스스로 그런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유권자들도 위장전입, 자녀위장취업, BBK문제같은 이대통령의 도덕성 논란에는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조각 때부터 의혹많은 재산형성이나 도덕성 문제를 치지도외(置之度外) 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검증 시스템의 문제'라는 진단이 있었지만 인사철학이 더 큰 난점이었다. 이대통령의 인사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

 

역대 중국 용인사(用人史)에는 또 다른 양대 원칙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오직 능력과 인품만을 보고 사람을 기용한다는 '임인유현(任人唯賢)과 능력과는 관계없이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인용한다는 임인유친(任仁唯親)의 원칙이 그것이다.

 

 

 

이점에서도 이대통령은 대부분 자신과 가깝고 아는 사람을 등용하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아는 사람만 찾다보니 편벽한 돌려막기 인사가 불가피하다. 오죽하면 낯가림 증세싸까지 있는게 아니냐는 염려가 나온 것도 이때문이다. 인재 풀이 좁기 그지없는 까닭이다.  

 

이대통령의 인사는 중국역사의 거울에서 비춰보면 흠집이 있어도 능력만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도 아는 사람만 쓰겠다는 고집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른바 '고소영 내각'에서부터 지금까지 국민의 객관적 평가가 어떤지는 물어보나마나다.  

 

4월27일 재보선선거가 끝나면 곧 개각과 청와대 개편을 단행할 것이란 설이 벌써부터 파다하다. 초대 대통령실장이자 최측근 가운데 한사람인 류우익 주중대사를 지난주에

교체한 것도 그를 통일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 등으로 기용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른 자리에 거론되는 인사들도 대부분 현정부에서 요직을 지내 이대통령에게 '낯익은' 사람들이다. 

 

하마평대로라면 또다시 돌려막기 인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게 틀림없다. 이명박정부의 실패는 인사의 실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2년이 채 남지않은 

임기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진부하지만 값진 격언은 이대통령의 인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청나라 관리 심문규는 이렇게 충언했다. "하늘은 한세대에 충분히 쓰고도 남을 인재를 내려 줍니다." 

 

(*출처 : 김학순의 서재에서 인용)

출처 : technic
글쓴이 : 테크 원글보기
메모 :

 

 인문학이란?

 

예부터 文,史,哲이라 했다. 문장과역사와 철학이다.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니다. 문장은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더불어 역사는 포폄(褒砭,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다.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단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삶의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가는 살아있는 운동이다.

이것이 문.사.철이 바로 인문학의 본령이다.

 

문,사,철은 세간에서 흔히 오해하듯이 결코 박제화된 관념의 관념의 집합이 아니다.그것은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폎쳐지는 거대한 魂의 운동이다.

인문학은 살아 있다. 삶의 끈끈하고 처절한 몸부림과 절규가 녹아난것이 인문학의 진짜모습이다.

진정한 인문학은 '훈고학'으로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활설화된' 변화의 학'이며 지속하는 '삶의 고투에서'에서 응어리져 빚어진 빛나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문학은 살아 있다.숨을 쉰다.거기에는 인간의 감각적 돌기들, 그리고 꿈이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욕망, 감각, 꿈이야말로 인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사실 어떤 통찰도 인간의 욕망,인간의 감각,그리고 인간이 주체할 수 없는 꿈을 아우르고 꿰차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 인문학의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정진홍)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덴동산골프하기  (0) 2011.12.21
에덴동산에서 골프하기  (0) 2011.12.21
기억력 키우는 열 가지 습관  (0) 2011.12.21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1  (0) 2011.12.20
50대 독립선언문  (0) 2011.08.02

LPGA 폴라 크리머 F-16 전투기 탑승

 

LPGA 홈페이지 캡처

지난 7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오크먼트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폴라 크리머(Creamer)가 전투기에 탑승했다. 크리머는 지난 9월9일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 곡예비행팀 ‘썬더버드’의 F-16 전투기를 타고 비행했다. 크리머가 탑승한 전투기의 조종은 여성 최초로 썬더버드 조종사가 된 크리스틴 허바드(Hubbard) 대위가 맡았다. 아버지가 해군과 민항사에서 조종사로 근무했던 크리머는 “전투기를 타고 비행할 때의 짜릿한 스릴을 느껴보고 싶다”며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종사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LPGA 홈페이지 캡처
LPGA 홈페이지 캡처
출처 : 알럽 페낭
글쓴이 : Jenny 원글보기
메모 :

남의 험담을 하지마라
남을 헐뜯는 소문을 내는 건 살인보다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중상모략은 퍼뜨리는 사람,
듣는 사람, 그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해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죄가 무겁다.
나쁜 소문은 멀리서도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
촌철활인: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그것이 좋지 않다는 교육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한 험담의 유혹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성공의 비결은 남의 험담을 결코 하지 않고 장점을 들춰내는데 있다.”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이대엔 과학의 피 흘러 … 노벨 과학상 1호 낼 것”
대학 경쟁력을 말한다 -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이화여대 캠퍼스의 가을은 젊었다. 교문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뻗은 계곡형 건물 사이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명 건축가인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캠퍼스 ECC(Ehwa Campus Complex)다. 2008년 연면적 6만6000여㎡에 6층 건물로 개관한 ECC는 이대 변신의 상징이다.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서는 학생들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김선욱(59) 총장은 "125년 역사의 이대는 끊임없이 변신 중이며 이공계 교육에서 미래를 찾겠다"며 "한국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24일 총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캠퍼스에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이대가 조용해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그렇지 않다. 그동안 등록금, 파주캠퍼스, 감사원 감사 등 여러 문제가 있었으나 내실을 기하느라 분주하게 지냈다. 이화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1946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 공식 인가를 받은 이대는 의대·공대·로스쿨 등 여자대학으로서 모든 것을 갖췄다. 대학의 미래를 과학에서 찾으려고 한다. 노벨 과학상 1호를 우리가 낼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는 구상이 생소하다.

 "나는 법학자지만 총장이 된 후에는 과학 쪽에 쓰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면서 교육할 수 있으려면 대학의 이공계 연구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학생과 교수가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얻으면 대학은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과학은 인류에 기여하지만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이디어는 세계적인 벨기에 화학기업인 솔베이(Solvay)에서 얻었다."

 이대는 올해 5월 세계 5대 화학업체인 솔베이의 글로벌 연구개발(R & D)본부를 유치했다. 세계 다국적기업이 국내 대학과 공동으로 R & D센터를 설립하기로 한 것은 처음이다. 솔베이는 이대에 2013년까지 2150만 달러(약 280억원)를 투자해 산학협력동 건축과 장학금, 연구인프라 등을 지원한다. 김 총장은 "솔베이와 우리가 '제2의 마담 퀴리를 키우자'는 데 공감했다"고 했다.

 -글로벌 산학협력만으로 노벨 과학상이 나올까.

 "3년간 연구비 100억원을 투자하는 '이화 글로벌 톱5'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대학이 교비에서 100억원을 연구에 투자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글로벌 연구역량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톱5는 어느 부문에 집중하는가.

 "나노·바이오·화학·에너지·녹색성장 분야를 생각 중이다. (집무실 책상 위의 솔베이 태양에너지 비행기 모형을 가리키며) 글로벌 산학협력의 모델을 제시하겠다. 이화에는 '과학'의 피가 흐르고 있다.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도 이화인이고, 바이오·나노 융합 분야를 처음 연구한 대학이기도 하다."

 -노벨 과학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새 개념과 분야에 대한 연구, 이를 통한 사회적 기여가 필요한데 우리는 과학의 역사가 짧다. 기존 연구를 넘어서는 데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새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선구적인 자세를 추구해 온 이대가 노벨상 배출에 잠재력이 큰 이유다."

 -대학 경쟁력은 교수에게서 나온다. 교수들이 더 피곤해져야 한다.

 "(웃으며) 교수님들 요즘 정말 피곤하다. 연구·강의 다 잘해야 한다. 세계적인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올린 분들에게 인센티브를 더 줄 생각이다. 경쟁무대는 국제다."

 -정부가 등록금 문제로 사학을 감사하는 등 자율권 훼손 논란이 있다.

 "대학이 책임을 지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사립대에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니까 자율성이 퇴보한 느낌이 든다. 다양한 대학을 일률적으로 가이드하면 발전이 없다."

 -대학이 뽑는 경쟁만 하고 가르치는 경쟁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이 있다.

 "입시 자율이 거의 없다. 고교의 평가를 각 대학이 그대로 활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사회적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이대는 지난해부터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교수학습센터에선 강의 개선을 원하는 교수들에게 강의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컨설팅한다. 인문학·글쓰기·리더십·다문화·다언어 교육을 1~2학년 때 완벽하게 시킬 것이다."

 -등록금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9월에 교비회계 장학적립금을 1350억원 늘려 총 2097억원이 됐다. 기존(747억원)의 세 배, 전체 적립금(6569억원, 2010년)의 3분의 1이다. 국내 최대 규모다. 적립금 운용수익 장학금도 60억원 늘어나 연간 235억원, 2015년에는 410억원이 된다."

 -학생들이 취업 문제로 고민한다. 졸업 후 서비스도 필요하다.

 "경력을 밀착 관리하는 이화케어넷(Ewha CareNet)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여성은 졸업 후 사회·직장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데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해주겠다는 뜻이다. 취업, 법률상담, 경력관리, 대학원 진학 등이다."

인터뷰=양영유 정책사회 데스크

정리=박수련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 yangyyjoongang.co.kr >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

=1952년 서울생. 명동 계성여고 학생회장에 이어 이화여대 법학과에 수석 입학한 뒤 3학년 때인 1973년 총학생회장을 맡아 유신 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88년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행정법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95년부터 이화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다. 2005년 1월~2007년 4월 최초의 여성 법제처장(장관급)을 역임했고, 한국독일동문네트워크 아데코(ADeKo)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9월 제14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평. 산행(山行)을 즐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 문화산업 비법은?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리스크 큰 CT<컬처 테크놀로지>산업… 내 성공 비결은 매뉴얼, 인내 그리고 꿈"

5만5000명의 청중이 야광봉을 흔들며 파도처럼 물결 치고 있었다. 5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을 거의 모든 청중이 내내 서서 지켜봤다. 소녀시대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고, 따라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회장이 말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 ·가상국가)'이란 말이 실감 났다.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일본인이기도 하거니와 'SM엔터테인먼트'라는 가상국가의 국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1만2800엔,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이다. 그런데 맨 앞자리이든 3층 맨 뒷자리이든 객석 어느 자리나 티켓 값이 똑같다. 이수만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는 오직 '충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인터넷 예매 때 1초라도 빠르면 앞자리에 앉고, 5분이 늦으면 맨 뒷자리에 앉는 식이다.

원래는 4월에 갖기로 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3·11 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공연이 무기 연기됐다. SM측은 티켓값을 환불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팬들이 결사 반대했다. "로또 당첨되듯 표를 구했는데, 왜 뺏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불해 주지 않고 돈을 고스란히 5개월을 갖고 있다가 공연했다.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영 석학 장 클로드 라레슈 교수가 "제품을 고객에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팔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라. 스스로 물살을 만들어 올라타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게 딱 떨어지는 예일 것이다.

기자는 이수만이 부른 ‘행복’이며 ‘모든 것 끝난 뒤’와 같은 노래를 듣고, 그가 진행하는 TV쇼를 보며 자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만난 그의 나이가 만으로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었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지난해 그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강연 제목이 ‘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Don’t try to cut your ears)’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반 고흐 같은 천재가 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천재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천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어요. 반 고흐의 천재성은 남들이 못 갖고 있는 오감(五感)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는 음악을 들어도 그림이 보이고, 음식을 먹어도 그림이 보였을 겁니다. 이수만이란 사람은 반대로 그림을 보면 음악으로 들리겠죠. 어느 날 고흐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막 녹아내리는 겁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보이는 거죠.”

―감각이 통합되는 경험 말씀이군요.

“예. 사실 그런 경험은 천재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흐도 그런 느낌을 처음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게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귀를 잘라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안 돼 있어서 생긴 비극인 셈입니다.”

그는 주먹구구식이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흐처럼 천재의 싹을 가진 연습생을 뽑아 13년 동안 장기 육성해 아이돌 스타로 길러냈다.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시스템화가 필요

하지만 13년에 이르는 장기계약은 ‘노예계약’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 끝에 계약 기간을 한국에만 있을 경우 7년, 해외에 나갈 경우 10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13년이란 시간은 연습생에게는 물론, 경영자에게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기간 동안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는 약속이니까.

가수이자 TV쇼 진행자였던 이수만.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SM을 통해 수많은 아이돌을 길러낸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수만 회장은 K-팝이 전 세계를 휩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장기 계약에 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꼽았다.

“우리 같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미국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장기 계약해서 오랫동안 트레이닝하는 일이 미국에선 못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에이전시 제도라고 해서 가수나 연예인이 스스로 커지면 에이전시 회사에 일을 하도급을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에이전시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유망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뒤늦게 문화산업이 발달한 한국이나 일본은 자유 계약이 가능했고, 그래서 장기 투자를 하게 된 겁니다.”

―CT(컬처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만드셨는데, CT 산업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은 뭡니까?

“IT 산업을 흔히 고위험-고수익 산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CT 산업은 한술 더 떠 초고위험-초고수익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공의 예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뛰어난 도자기공이 독보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기술은 그의 감각과 손끝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 배워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기술을 잘 성문화(成文化)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리고 이것을 잘 전수해서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하나의 산업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SM은 이걸 하자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 또 우리 직원 누군가가 갖고 있는 기술, 이런 것들을 성문화하고, 교육을 통해 전수하자. 그래야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문화산업 특유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시키는 매뉴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충고는 비단 엔터테인먼트산업뿐만 아니라 ‘초불확실 환경’에 직면한 모든 기업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충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영자라면 감성 지향의 우뇌형 경영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쉬운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다분히 좌뇌적이었다.

그는 “이수만이 없으면 SM이 끝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래서 이수만을 대신할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내에 춤과 노래, 믹싱 등 각 분야 전문가 6명으로 만든 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플러스 알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수만의 머리를 카피한 것 이상이 나올 것이고 SM은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만 경영의 요체는 ‘인내’

이수만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그의 성공 비결을 “최고를 위한 인내의 경영”이라고 표현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가수를 고르고, 좋은 스태프를 고르고, 좋은 음악을 고른다. 그런데 그 선택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이수만 회장이다. 선택을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를 검토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포기한다.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en cost)’이 발생하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정쩡한 제품에 목을 매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최고가 될 때까지 투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수만 회장이 키워낸 대표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는 요즘 새로운 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콘셉트의 팀 두 팀을 구성해서 한 팀은 한국에서, 다른 한 팀은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곡을 부르게 된다. 가칭 M1과 M2이다. 두 팀의 타이틀곡 하나를 쓰기 위해 SM은 지난 8월 덴마크노르웨이에서 뮤직캠프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 작곡가 50여명이 모여서 3~6일간 SM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곡을 쓰는 행사이다. SM측이 M1과 M2를 보여주고, 원하는 콘셉트를 이야기하고, 리듬을 들려주면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곡을 창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두 차례나 했는데도 아직 M1과 M2의 타이틀곡을 못 골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비를 다 날린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트레이닝, 둘째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 셋째 곡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새 팀 하나 론칭하는데 보통 4년이 걸립니다. 동방신기 곡 하나 쓰는데 50명이 모여서 썼고, 맨 처음 데뷔하는 데 40억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음반을 내는 프로모션비가 또 40억원씩 들어갑니다.”

그는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팀에서 최고를 한 사람씩 뽑아서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팀을 구성했고, 그것이 동방신기였다. “여기에 선발되지 않은 팀은 모두 와해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팀 중에서 음악도 잘하고 버라이어티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키운 게 슈퍼쥬니어였어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저희도 미안해서 도와주게 됐지요.”

그 슈퍼쥬니어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 슈퍼주니어는 유럽, 태국, 남미에서 최정상의 가수이다.

◇동양의 할리우드를 한국이 만든다

―미국 LA에 이어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 진출한다기보다 SM타운이란 가상 국가의 동포들이 거기에도 있으니 위문공연차 가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미국보다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머지않아 동양에 할리우드가 생기면서 문화의 중심이 갑자기 이리로 대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미국에서는 동양 노래를 잘 모른다고요? 전혀 상관없어요. 중심은 아시아가 될 거니까요.”

그는 “아시아에 제2의 할리우드가 생긴다면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업고 가는 전략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프로듀싱은 우리가 하고, 마케팅은 일본이 하고, 가수나 탤런트, 감독은 중국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해서 그 큰 시장의 3분의 1만 우리가 가져와도 우리 국민이 4500만명밖에 되지 않으니 1인당으로 따지면 우리가 가장 수혜를 보지 않을까요?”

그는 늘 꿈을 꾼다. 그가 새로 꾸는 꿈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뮤지컬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팀을 선발해 공연하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이 클래식과 팝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가 화합해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내용이란다. 그동안 나온 SM엔터테인먼트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섞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쓰던 중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이던 테디 라일리가 소녀시대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썼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수만 회장은 “SM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를 배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포토
국내사진
해외사진
테마포토
그래픽
만평
  오는 6일 코오롱 한국오픈 개막
    기사등록 일시 [2011-10-05 17:09:32]
【천안=뉴시스】전진환 기자 = 오는 6일부터 나흘 동안 천안 우정힐스C.C 에서 열리는 코오롱 제54회 한국오픈 골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왼쪽부터)김경태, 로리 매킬로이, 양용은, 리키 파울러, 노승열이 5일 태극기 홀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독도홀(13번 홀)에서 엄지를 들어보이며 최고의 경합을 펼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코오롱 한국오픈 조직위원회 제공

출처 : KGSA 엘리트 골프 티칭프로(EGTP) 양성과정
글쓴이 : 골프사랑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