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이 인간에게 내린 金이 세 가지  황금,소금,지금이 있는데 그 중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지금 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순간이다.삶이란 순간 순간 의 지금을 이어온 자취다.지금의 궤적이 바로 나의 존재이고 나의 가치이다.
과거의 결과가 지금이고 지금의 결과가 미래가 된다.지금 이 순간을 찾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찾는 것이다.
숨을 깊고 길게 쉬면서 호흡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넘어 형이상학적 차원과 영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숨결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순간순간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그 중에서도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가는 삶의 중심을 과거나 미래로부터 현재를 이동시켜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불안,두려움 등은 호흡을 고 빠르게 만든다.이러한 나쁜 호흡은 자신의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방법은 숨을 깊고 천천히 쉬면서 지금의 순간을 자각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거나 일어나 전 잠깐만이라도 호흡 명상에 젖어보자.누운 채로 마음을 고요하게 가다듬고,쉼 없이 뛰고 있는 심장 박동소리에 귀를 기울려 본다.가슴 부위가 시원해지면서 음이 녹아내리 듯 긴장이 풀어질 것이다.

          * 이때 마음속으로 내가 존재하는구나라고 말하고 숨을 내쉴 때는 '지금이라고 읊조린다.금 이 순간을 감사하게 생 

             각하라.그리고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지도 느껴본다

숨을 깊고 길게 천천히 마실수록 ,지금 이 순간에 자각도 그만큼 깊고 길어진다.숨을 충분히 내쉰 다음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숨 정지도 느껴본다.인위적으로 노력하지 말고 그 냥 떠오르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호흡 명상은 따로 시간을 갖질 필요는 없다.들숨 날숨을 하면서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내가 존재하는구나’ ‘지금을 말 하기만 하면 된다.
호흡 명상은 습관이 되면 자신의 존재감에 무한한 감사를 느낄 수 있고,일상의 스트레스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 호흡명상  #충남대학교 MBRS #김원식 교수 #라이프설계#이경진멘탈코칭 

호흡은 생명이다.호흡은 자율 신경을 지배한다. 들숨에서는 우주의 기 에너지와 산소가 들어와 몸 속의 말단 세포까지 공급되고 날숨에서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간다.

호흡 명상으로 육체적,정신적,사회적,영적 건강까지 만들 수 있다.

 

 

#충남대 평생교육원MBRS,#김원식 교수,# 호흡 명상#건강강,#바른 숨#자기 경영#이경진멘탈 코칭,

인생 명언) 폴 발레리

 

 

출처 : pixabay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 폴 발레리(프랑스,詩人) -

 

<명상>을 생각을 다스리는 트레이닝으로 무엇보다도 효과적을 보고 있다. 명상이란 지각(Intellect)의 힘과 지혜를 채우고 산스카라(기질,personality)를 정화시켜 영구적인 마음의 평화를 획득하는 행위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기 위해 지금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는 습관을 만들고,마음의 센서를 켜두고 관찰하고 음미하는 방범요원이 감시하는 것처럼 점검하면서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다.

 

# 관찰 명상,# 통찰력 #명상 #골프레저연구원,#멘탈코치 이경진 

 

뇌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

 

가소성’,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원래는 탄성한계를 넘는 외부의 힘이 작용하여 형태가 변한 물체가 외부의 힘이 없어져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물질의 성질을 말하는 물리학용어이지만, 뇌과학에서는 외부 자극과 환경의 변화로 초래되는 뇌의 기능과 구조의 변화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 변화의 결과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뇌는 변화하는가? 자극이나 상황에 의해 뇌기능은 물론 쉽게 변화된다. 그러면 뇌기능의 변화는 뇌의 구조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초기 성인기가 되어 뇌성장이 멈춘 다음에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뇌가 변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뇌의 구조가 변화되려면 뇌졸중이나 뇌손상, 중독, 치매 등의 병적 상황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970년대 개발된 PET(양전자방사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촬영)로 뇌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특히 1992년 개발된 fMRI(기능적자기공명영상촬영)로 뇌의 변화를 실시간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뇌는 기능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소성을 설명할 때 흔히 드는 대표적인 예는 영국 런던에서 블랙캡(Black Cab)이라 부리는 고급택시 운전기사와 관련된 것이다.


블랙캡의 운전기사는 우리나라 택시기사와는 다른 모양이다. 블랙캡의 기사가 되려면 런던 중심가에서 반경 10Km 안쪽의 무수히 많은 작은 거리에 대해서 다 외우고 있어야 할뿐더러, 두 지점 간에 가장 빠른 지름길까지 다 꿰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데 약 3년간의 혹독한 수업이 필요하고, 그 기간 동안 지원자의 3/4은 중도에 포기한다고 한다. 시험에 통과하여 합격하면 보통 택시기사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거리에 대한 학습(시공간적 학습)을 많이 한 택시기사의 뇌를 MRI 촬영을 해보니 일반인에 비해 기억중추 중 하나인 해마(hippocampus)가 더 컸고,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더 컸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인 학습과 학습된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뇌를 자라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측두엽 내측에 위치한 ‘해마’라는 부위는 단기기억과 공간기억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억중추이다. 그런데 이 해마에 있는 신경세포는 스트레스 호르몬에 취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 호르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해마의 신경세포는 죽어 없어져 크기가 줄어든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해마는 일반인에 비해 20% 정도 작았고, 어려서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해마의 크기가 10%정도 작다고 한다. 해마가 작을수록 기억장애가 심하게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매 맞는 아내’나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들이 특히 건망증이 심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해마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뇌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정보들을 처리해야 하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아야한다. 현실에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동의 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내적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공황장애를 앓았다가 증상이 좋아져 약을 끊고 잘 지내던 환자가 다시 내원했다. 전망이 창창한 소기업에 다니는 환자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얼마 전 회사의 재무를 담당하는 자리까지 승진했다.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수금을 위해 거래처를 닦달해야 했다. 그러면서 불안이 악화되었다. 환자는 푸념하다.

“예전에는 사장님이 하시던 일인데 이젠 다 내가 해야 돼요. 사장님은 회사 일을 다 나에게 맡기고,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매일 골프나 치고 놀러 다녀요. 전처럼 회사에 신경을 안 써요”라고.

환자가 승진하면서 많은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 책임만큼 스트레스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중용하고 있는 사장에 대한 원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스트레스이다.

“사장님한테 화가 나 있군요. 사장님이 골프치고 놀러 다닌다고 회사에 소홀한 것은 아닐 거예요.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사장님이 당신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겨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당신의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해 훈련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설득했었다.

승진에 따른 책임, 과도한 업무 같은 외적인 스트레스는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학습의 기회로 삼고, 스스로 만들어 낸 스트레스는 ‘사장’이라는 역할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함으로써 긴장을 줄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이후 환자의 불안은 다시 나아져갔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 방송에서는 실물경기의 위축이 이제 시작이라고 하는데 벌써 여기저기서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병원에 오시는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하시는 분들 중의 상당수가 이미 경제적으로 곤란해졌고, 앞으로도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걱정한다. 전 사회적으로 불안과 긴장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도 경제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두가 힘든 시기인 만큼 잘 견뎌야 한다. 잘 견디려면 ‘위기’를 ‘실패’로 보지 않고, ‘위기 그 자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아 적당히 긴장하여 위기를 통해 자신을 더 강한 체질로 변화시켜야 한다. <Crisis>는 '분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Krinei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향후 몇 년이 지나 위기가 걷힐 때쯤이면 위기를 통해 성장한 자와 위기에 빠져 좌절한 자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분리될 것이다.


다윈은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종은 강한 종도,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이다”라고. 삶에는 항상 위기가 존재한다.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려면 변화해야 한다. 위기는 변화를 위한 좋은 기회인 것이다. 우리가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두뇌를 성장하게 할 수도 있고, 우리 뇌세포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08.11.17.

정두훈

 
‘離見の見(리켄노켄)’. 일본 전통극 ‘노(能)’에서 연기의 최고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마음의 눈’으로 객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한다. 남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보다 진일보한 관법(觀法)이다. ‘리켄’의 자세로 이런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선우정의 '離見(이견)의 見(견)' 중에서 (조선일보, 2007.2.13)

어떤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당당한, 그래서 향기로운 내 모습일까... 가끔 생각에 잠깁니다.

아마도 그 모습은 내가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만들어지는 모습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판단의 기준이 전적으로 '타인의 시각'이 되어서도 안될 겁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되 그들의 시각만 의식하지는 않는 것...

'離見의 見'(이견의 견, 리켄노켄). 일본 전통극 ‘노(能)’에서 연기의 최고 경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객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하지요.

삶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고 경지의 연기자가 연기를 하면서 관객의 눈이 아닌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객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 관객을 배려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관객만 의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것.

항상 ‘마음의 눈’으로 인생의 객석에서 무대위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잡는 자세. 그런 자세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티유 리카르 스님 “행복은 기술…연마해 습득할 수 있어”
“수행? 마음은 최고의 친구ㆍ최악의 적도 될 수 있어 하는 것”
 

 

 

2012년 11월 02일 (금) 16:45:26 조현성 기자 cetana@gmail.com

미국 위스콘신대 신경과학 연구팀은 지난달 30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선정ㆍ발표했다. 프랑스 승려 마티유 리카르(Matthieu Ricard)가 그 주인공. 스님은 세포유전공학자, 달라이라마 불어 통역관, 철학자인 부친 장프랑수아 르벨과 함께 베스트셀러였던 <승려와 철학자>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한국에 왔다.

스님은 랍잠 린포체(H.E. Shechen Rabjam Rinpoche)와 함께 방한해 7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사진전ㆍ법회ㆍ명상워크샵 등을 통해 티벳불교의 가르침을 전한다.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불리는 마티유 리카르 스님은 "행복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타적으로 살아야…남 배려 않으면 살 수 없다
마티유 리카르 스님은 2일 서울 법련사(주지 법경)에서 사진전 개막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자비롭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 남을 배려하지 않으면 모두가 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남을 좀 더 배려하면 단기적으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경제, 중기적으로는 삶의 질, 장기적으로는 환경이라는 세 가지를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양철학에 기반한 심리학, 경제학, 진화론 등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가정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새로이 등장한 ‘통찰’은 이타주의가 나와 내 이웃을 초월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설명이다.

리카르 스님은 “이타주의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필수이다.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 이념이다”라며 “한국에서 예정된 법문에서도 이를 강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타주의’에 관한 생각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서적 100여 종과 논문 200편을 읽는 중”이라고 밝혔다.

제대로 행복하려면 마음 수련해야
1946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스님은 명문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1972년 네팔의 세첸 사원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행복을 얻으려면 다른 어떤 진지한 목표를 이룰 때와 마찬가지로 정진과 마음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지식탐구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티벳불교에서 출가한 이유를 “까루 린포체(Kalu Rinpoche), 딜고 켄체 린포체(Dilgo Kyentse Rinpoche), 달라이 라마(Dalai Lama) 등 티벳 스승들로부터 인간 완성의 극치를 보았다. 나도 수행하면 (그들을) 닮을 수 있을까 싶어서 출가했다”고 밝혔다.

스님은 출가 후 40여 년 동안 4만 시간 가까이 명상 수행 중이다. 스님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별칭은 스님의 뇌가 일반인과 다른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콘신대 연구팀은 숙련된 명상가들을 대상으로 12년간 실험해 마티유 리카스 스님에게서 신경과학 사상 보고된 적이 없는 수치의 감마파가 발산된 것을 확인했다. 감마파는 의식과 집중력, 학습, 기억력과 관련이 있다. 또 스님의 뇌는 행복을 느끼는 좌측 전두엽이 우측에 비해 월등히 활성화 돼 있는 것도 찾아냈다.

   
▲ 마티유 리카르 스님의 작품.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스님은 “행복은 즐거움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경험을 계속 추구하단 정신적 피로감에 탈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삶의 존재 방식이다. 이미 내 안에 갖춰진 지혜, 내적 평화[佛性]등을 활용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행복은 기술이다.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연마해 습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외적 조건을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님은 아르헨티나 독재 시절, 정부 측에 아내를 잃은 한 불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생각했습니다. 내 아내를 죽인 그들을 증오할 것인가, 증오하지 말 것인가.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증오하지 말자고.”

스님은 “그 불자는 윤회와 과보를 알고 있었기에 증오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해를 끼친 자를 증오한다면 증오-복수의 고리가 끊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스님은 “비폭력이 (폭력 대응보다) 현실적으로 더 많은 힘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로 강조했다.

또, 마티유 스님은 “절망ㆍ좌절하는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그 마음 깊은 곳에 변화의 가능성ㆍ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육ㆍ스포츠ㆍ예술 등을 통해 사람이 변화하듯 마음공부를 통해서도 변화한다. 하루 20분 명상만 해도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마티유 리카르 스님과 네팔 세첸 사원에서 수행 중인 랍잠 린포체. 티벳 랍잠 법맥의 7대 계승자로 NGO단체인 카루나-세천을 만들어 히말라야 사람들을 돕고 있다.

 

내 사진은 세상에 올리는 나의 공양
마티유 리카르 스님은 사진을 찍는다. 스님의 렌즈에는 영적 감동이 가득 담겼다. 

스님은 “나의 사진은 집착이 아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가. 나는 위대한 스승과 함께 한 소중한 순간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 카메라를 잡은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사진은 아름다운 순간을 모든 이에게 올리는 나의 공양”이라고 말했다.

어려움 만난다면 내 탓이려니, 긍정적으로 행동해라 
랍잠 린포체는 랍잠 법맥 7대 전승자로 네팔 세첸사원에서 티벳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 딜고켄체 린포체의 상좌인 그는 NGO단체인 카루나-세첸(Karuna Shechen)을 설립해 히말라야 인근 주민들에게 교육ㆍ의료 서비스를 펼치고 있다.

2007년에 이어 두 번째 방한한 랍잠 린포체는 “불교가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등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회의를 느끼는 네팔 젊은이들이 많았다. 마티유 스님이 네팔에 온 뒤 스님의 과학적ㆍ합리적 사고를 접한 많은 젊은이들이 생각을 바꿨다”고 전했다.

랍잠 린포체와 마티유 리카르 스님은 “현재 상황서 어려움 만난다면 (과거의) 내 업이라 생각하라. 그리고 좀 더 긍적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라”고 말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나 나아지고 있고,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최고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쉬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 마티유 리카르 스님의 작품. 법륜사 불일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한편, 이날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는 마티유 리카르 스님의 사진전을 개막했다. 두 스님은 같은 날 저녁 서울 봉은사에서 ‘마음을 닦아 뇌를 바꿔라’를 주제로 법문했다. 이어 3~4일 남양주 봉인사에서 티벳불교 전통에 따른 의례 등 일정 소화 후 7일 출국한다.

두 스님의 방한에 맞춰 한국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상생 교류를 원력으로 설립한 단체인 세첸 코리아는 마티유 라카르 스님의 사진집 <고통에서 피는 희망>을, 민족사는 티벳 스님의 100가지 지혜를 담은 <세상의 끝에서 만난 스님의 말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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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개 혹은 끌개장이란 무엇인가?


우주만물은 단절이 없는 에너지 흐름으로 이뤄져 있지요. 그러므로 우주 안에 칼로 자르는 듯한 테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울타리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육체라든지, 사물의 윤곽이라든지, 행성의 윤곽, 태양계, 은하계, 더 작게는 하나의 세포, 분자, 원자..... 이런 식으로요.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그 모든 것을 이루는 근원인 에너지의 흐름이 끊겨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테두리는 무엇일까요? 사물들이 각자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잖아요.

바로 그 테두리로 둘러싸인 개별적인 무엇으로 인식되는 것이 끌개장입니다.

끌개장은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그와 유사한 에너지들이 끌어당겨져 우리 육체의 눈에는 마치 독립된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눈송이가 형성되는 과정을 아시지요? 물분자들이 어느 크기 이상 모이게 되면, 그 강한 힘에 끌려, 주변에서 그와 유사한 분자들이 끌어당겨져서 눈송이가 점점 더 커지잖아요.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도 하나의 끌개장인데, 하나의 의지 혹은 뜻을 중심으로 뭉쳐진 에너지 덩어리인 것이지요. 민족혼이나 인류혼 같은 것도 끌개장인데, 그것도 하나의 공통된 뜻을 중심으로 그와 유사한 에너지들이 끌어당겨져 마치 살아있는 하나의 개체와 같이 활동합니다.

우리가 보거나 인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것들은 모두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들은 독립된 개체인 것처럼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합니다. 

우리 육체의 눈은 감각이 둔하므로, 가장 진동수가 낮은 물질적인 것만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테두리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에너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발달하면, 그 테두리가 애매모호함을 보게 됩니다. 각각의 끌개장은 각각의 중심핵을 가지고 모인 에너지인 것이지요.

원자라는 끌개장이 모여 분자라는 끌개장을 이루고, 그것들이 모여 다시 세포라는 끌개장을,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생물체라는 끌개장을, 그것들이 모여 행성이라는 끌개장을, 그것들이 모여 태양계, 은하계...... 그것들이 모여 우주라는 끌개장을 이루죠.

우주라는 끌개장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우주만물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해 끌어당겨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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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고요히 앉아 숨 쉬며 그저 명상하라

무언가를 찾으려고 계획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 갖추어진 것에 온전히 머물러라...

억지로 쥐어짜듯 하다 보면 탈이 나고
힘 빠지고 낙망하고 좌절하며 무너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고요한 호흡으로
온전히 자신의 몸을 편안히 이완하고
의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자

내가 머물 수 있는 머물고 싶은 그 자리
침잠하고 침잠하며 어둡고 어두워진다

계속 깊어지고 어두워지면
어느 순간 넓디넓은 밝디 밝은
응축된 공간이 드러날 것이다

사념처(四念處) 명상

  몸에 달린 육문(六門)과 외부의 육경(六境), 이 둘을 조건으로 眼識(안식), 耳識(이식), 鼻息(비식), 舌識(설식), 身識(신식),그리고 意識(의식)이라는 육식이 일어난다. 우리는 밖을 향해서 육문을 열어놓고 밖에 있는 육경을 안으로 들여와 마음이 경험한다. 그러면 이어서 생각으로 말로 몸으로 행동을 한다. 여기서 육문은 ·····의라는 감각기관이고, 육경은 色(색,안식)·聲(성,이식)·香(향,비식)·味(미,설식)·觸(촉,신식)·法(법,의식)이라는 감각대상이다. 붓다는 육문과 육경을 일체(一切)라고 설하신다.

 

이 사념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몸에 대한 관찰, 느낌에 대한 관찰, 마음 대한 관찰, 법에 대한 관찰이라고 하는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데요. 그중에서도 몸이라고 하는 것 혹은 육체적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쉽게 포착할 수 있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됩니다. 육체적 현상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주의를 모으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 진리인 사성제의 진리를 깨우쳐나가는 행위 바로 이것이 몸에 대한 관찰(身隨觀, kāyānupassin) 즉 신념처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사념처의 첫 번째 세부항목인 신념처라고 하는 것은 그것자체가 독자적인 명상법으로 독립된 형태로 실천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까야가따사띠(Kāyagatāsati) 라고 하는 신지념경(身至念經, Kāyagatāsati-Sutta)’이라고 하는 경전에서 몸에 대한 관찰만으로 궁극의 깨달음이 얻어지는 그러한 과정이 묘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에 대한 관찰 다시 말해서 신념처의 대상이 되는 육체적 현상은 매우 다양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마시고 내쉬는 숨이라든가 팔을 구부리고 펴는 따위에 신체적 동작, 혹은 옷을 입거나 음식물을 맛보거나 대소변을 보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위, 또한 육체적 현상의 범위에 포함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신념처의 세부 내용으로 이야기 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몸에 관련된 일체의 현상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라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관찰 다시 말해서 신념처에서는 육체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이 위빠사나(, vipassanā)라고 하는 통찰 수행의 매개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념처의 두 번째 단계로서 일컬어지는게 수념처, 즉 느낌에 대한 관찰(受隨觀, vedanānupassin)이 되겠습니다. 느낌에 대한 관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좋거나 나쁜 느낌을 내면적으로 갖고 있을 때, 바로 그러한 느낌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라는 가르침이며, 그것을 우리가 행해야하는 실천법으로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여러 가지 느낌에 노출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컨대 편안한 느낌, 불쾌한 느낌, 편하지도 불편하지 않은 여러 가지 느낌 등 여러 느낌들에 노출되면서, 좋은 느낌에 노출되었을 때는 내면의 어떤 탐욕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쾌한 느낌들에 노출되었을 때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는 여러 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수념처에서는 편한거나 불편한 여러 가지 느낌들에 대해서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해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좋거나 싫은 느낌들이 지속적인 관찰 대상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때, 그런 느낌들은 잠시 발생했다가 사라져가는 무상한 현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념처 수행 다시 말해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갖가지 느낌들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다만 관찰자로서 남아 있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느낌에 대해서 관찰자로서 남아 그것을 관찰하는 바로 거기에 전념하면, 그것은 수념처 즉 느낌에 대한 관찰을 올곧게 실천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사념처의 세 번째 세부항목은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 cittānupassin)이 되겠습니다. 즉 심념처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심념처는 스스로의 마음을 지긋이 주시하면서 알아차리는 그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마음에 대한 관찰은 마음 자체를 내용으로 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여러 가지 일상 속에서 굉장히 산만한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아 내 마음이 산만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혹은 내가 여러 가지 욕심 혹은 분노에 빠져 있을 때 아하 내가 지금 욕심에 빠져 있구나.’ 그때그때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을 심념처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합니다. 사념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념처경에서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마음 상태를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산란한 마음 등등에 여러 가지로 구분을 하면서 전체 열여섯 가지 유형의 마음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심념처 수행, 다시 말해서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에서는 이들 모두를 통찰의 대상으로 합니다. 이들 열여섯 가지 마음에는 부정적인 마음, 예컨대 탐욕이라든가, 성냄이라든가, 무기력한 마음 같은 부정적인 마음도 포함이 되지만, 긍정적인 마음들, 예컨대 고요해진 마음, 해탈한 마음 등과 같은 긍정적인 상태도 망라가 됩니다. 이러한 부정적, 긍정적 마음들은 사념처 명상이 현재 포착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마음들을 모두 망라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념처의 심념처를 닦을때는 우리에게 포착되는 모든 마음 상태를 강제적으로 억누르거나 혹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만 바라봐야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설령 고요한 마음이라든가 해탈한 마음이 느껴지더라도 지속적으로 그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지금 내 마음이 이렇다'하고 다만 알아차릴 것을 권장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몸이라든가 느낌이라든가 마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관념들에 휩쓸리지 않고, 다만 관찰자로 남아있을 수 있는 그러한 힘을 키우게 됩니다.

 

사념처 마지막 항목으로 제시되는 내용이 법념처입니다. 법념처는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 dhammānupassin)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몸이라든가 혹은 느낌이라든가 혹은 마음이라고 하는 앞서 세 단계에서 통찰했던 내용을 법으로서 재인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법념처의 의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몸을 관찰하면서 이와 같이 이러저러한 육체적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바로 이러저러한 현상이 이렇게 해서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사라지는 것이 곧 무상의 진리구나.라고 알아차리면 곧 몸이거나 느낌이거나 마음을 매개로 해서 법념처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념처의 마지막 항목인 법념처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의 진척과 더불어서 알게 되는 모든 내용들을 통찰의 결과로서 다시 한번 포섭해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명상의 진행과 더불어 체험하게 되는 깨달음의 계기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분명한 앎으로 정착시켜 낸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몸, 느낌, 마음 그리고 법을 통찰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는 결국에 있어서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사성제를 실현해내기 위한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그 의의를 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네 가지 진리를 말씀드리자면 괴로움의 진리.’ 해서 고성제(苦聖諦).’ 그 다음에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苦集聖諦).’ 해서 집성제.그 다음에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聖諦).’ 해서 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苦道聖諦).’ 해서 도성제가 되겠습니다.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에 해당합니다. 붓다는 바로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시(施論)에 대한 가르침, 그 다음에 계율(戒論)에 대한 가르침, 그 다음에 천상세계(生天論)에 대한 가르침 따위의 예비적인 가르침을 먼저 설파를 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내면의 번뇌가 어느 정도 정화된 사람에 한해서 초기불교의 본래적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쳤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초기불교의 경전어인 빨리어로 표현하자면 짜따리 아리야삿짜(cattāri ariyasaccāni)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짜따리는 네 가지를 의미하고 그 다음에 아리야삿짜.’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아리야하는 그 말은 성스럽다혹은 고귀하다라는 의미가 되겠고 그 다음에 삿짜진리.’라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현상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관념을 투사해서 사변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이것은 육체적 괴로움에 대해서건 정신적 괴로움에 대해서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어떠어떠한 괴로움에 빠져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나는 괴롭다.’ 혹은 나는 이 괴로움이 싫다.’ 라는 따위의 생각을 지니곤 합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가 괴롭다.’고 하는 것과 괴로움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붓다는 나는 괴롭다.’ 라는 생각 대신에 여기 이러저러한 괴로움이 있다.’ 라고 하는 방식으로 괴로움 자체만을 직시할 것을 권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첫 번째 항목으로 제시되는 고성제, 즉 괴로움의 진리에 우리가 접근해 나가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깊이를 지닙니다. 우리는 나라든가 너 혹은 우리 따위의 관념에 메인 상태에서 괴로움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괴로움을 짊어진 나 혹은 나의 자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붓다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괴로움은 나라고 하는 관념이 투사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증폭이 된다고 진단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괴로움은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의 이 지긋지긋한 괴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한단 말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는 괴로움을 괴로움 자체로 보지 않고 나라는 관념과 얽힌 상태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의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붓다는 말합니다. 당연히 괴로움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괴로움의 원인도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또한 괴로움의 소멸 상태에 대한 바른 전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게 고성제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부분입니다.

 

섣부르게 우리가 괴로움을 맞선다거나 혹은 괴로움을 제거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 자체를 더 증폭시킬 수가 있습니다. 또한 괴로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새로운 괴로움의 악순환으로 초래되기 쉽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괴로움들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증폭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괴로움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나라든가 너라든가 우리 따위의 관념을 내려놓고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 자체만을 냉정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수용적인 태도는 괴로움이 야기 시킨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들로부터 얼마간 벗어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괴로움과 연결된 혹은 괴로움에 수반된 여러 가지 정서적, 심리적 요인들로부터 우리가 거리를 둘 때 괴로움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고 그 다음에 그러한 괴로움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 이었는가하는 부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붓다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괴로움을 바라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괴로움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기 이전에 괴로움 자체로서 보는 것.’ 바로 여기에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실전적 접근의 실마리가 담겨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언어적 유희의 차원에 머무는 사변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실제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한 치유책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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